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때였다. 갑자기 TV 앞에 사람이 모여들었다. 전쟁이라도 터진 것처럼 대통령이 직접 나와 발표문을 읽었다. “내일부터 전면적인 록다운을 시행합니다.” 새 영화 〈운디네〉(2020) 파리 홍보 일정이 중단되는 순간이었다. 급히 독일로 돌아가는 감독과 배우에게 미안했는지 배급사 관계자가 선물을 건넸다. 프랑스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에릭 로메르의 DVD 박스 세트.

귀국 직후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어서 매일 영화만 보았다. 에릭 로메르의 〈여름 이야기〉(1996)를 틀어놓고 생각했다. 부모와 함께 여름휴가를 보내는 독일 아이들과 달리 프랑스 청춘들은 자신만의 여름을 보내는구나. 상처 받고 상실을 경험하고 인생의 쓴맛을 보는 ‘그해 여름’의 기억을 간직한 채 어른이 되는구나. 여름 한철을 보내며 우리는 ‘퇴보’하는데 그들은 ‘진보’하는 까닭이 그거였구나.

“소방관 아빠를 주인공으로 디스토피아 스토리를 쓰던” 감독이 마음을 바꾸는 순간이었다. 여름의 감각이 살아 있는, 청춘의 이야기를 써보기로 했다. 때마침 재미있게 읽은 안톤 체호프의 단편 〈중간 이층이 있는 집〉에서 ‘두 젊은 예술가의 여름휴가’라는 설정을 가져왔다.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다 자신들에게 찾아온 멋진 사랑의 기회마저 놓쳐버린’ 소설의 이야기를 감독 크리스티안 펫촐트는 이렇게 바꾸었다.

새로운 소설을 마무리하고 있는 작가 레온(토마스 슈베르트)이 예술학교 진학을 앞둔 사진가 친구 펠릭스(랭스턴 위벨)와 함께 바닷가 숲속 별장으로 휴가를 떠난다. 그곳엔 근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일하며 여름휴가를 보내는 여성 나디나(파울라 베어)가 이미 짐을 풀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오버부킹으로 별장을 함께 쓰게 된 나디아가 레온은 계속 신경 쓰이는데, 밤마다 남자를 불러들여 벽 너머로 들려오는 신음소리가 가장 신경 쓰인다. 그 ‘벽 너머 남자’의 정체는 휴가철 바닷가 인명구조요원으로 일하는 청년 데비트(에노 트렙스). 그렇게 만난 두 예술가와 두 노동자가 따로 또 같이 잊지 못할 밤과 낮의 시간을 쌓아가는 ‘여름 이야기’.

여기에 산불을 더했다. 영화의 마지막 주인공으로 ‘먼 하늘을 노을처럼 붉게 물들인 산불’을 캐스팅했다. ‘붉은 하늘’이 점점 가까워진다. 그들이 머무는 숲을 향해, 그들의 예상보다 빠르게. 모든 것이 다 타버린 뒤에도 다시 타오를 사랑이 있을까? 여름 한철에도 이 세상은 어김없이 ‘퇴보’하는데, 우리는 과연 조금이라도 ‘진보’할 수 있을까?

어차피 소설은 망했고 그래도 바다는 맑았고 사랑은 여전히 모르겠고 산불은 쉽게 잡히지 않을 것이다. 텅 빈 바다를 찍는 펠릭스와 하이네의 시 ‘아스라’를 두 번 외는 나디아는 그해 여름이 끝난 뒤에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팬데믹 한복판에서 마주친 에릭 로메르’였기에 청춘의 여름이 재난의 불씨를 품게 된 이야기. 〈바바라〉 〈피닉스〉 〈트랜짓〉 〈운디네〉와는 다른, 하지만 언제나처럼 이번에도 너무나 좋은, 크리스티안 펫촐트 감독의 신작 〈어파이어〉의 독일어 원래 제목은 〈붉은 하늘〉이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