몹시 더운 날이었다. 때마침 가게 문이 열리며 에어컨 냉기가 새어 나왔다. 홀린 듯 걸어 들어가 탄성을 내지르는 할머니. “아~ 시원해.” 한숨 돌리고 둘러보니 서점이다. 뭐라도 하나 사들고 나가는 게 염치다 싶어 서가를 기웃거린다. “실례합니다. 요리책들이 여기쯤 있지 않았나요?” “계산대 앞에 있습니다. 여기는 모두 만화예요.”

마지막으로 만화를 본 게 언제였더라, 까마득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림이 예쁜 만화책 한 권을 충동적으로 집어들었다. 카운터의 점원이 움찔하는 걸 보지 못했다. “커버를 씌워드릴까요?” 하고 조심스레 묻는 이유도 눈치채지 못했다. 얼른 집에 가서 시원한 선풍기 바람 맞으며 빈둥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소싯적에 만화 좀 보았던 추억을 떠올리며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는 그날 저녁. 하이틴 로맨스라고 생각한 만화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두 남자 주인공의 입술이 닿는다. “오마나, 세상에. 키스?” 깜짝 놀라 눈을 뗐다가 다시 들여다본 만화책 맨 밑에는,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문장이 새겨져 있다. ‘다음 권에 계속.’

다음 날 서점에 가서 2권을 산다. 근처 카페에서 단숨에 읽어버리고 3권을 사러 간다. 다음 권에 계속될 이야기가 궁금해 미치겠다. 그런데 재고가 없다니.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3권을 마냥 기다려야 하다니. 잔뜩 낙담한 표정의 할머니 유키(미야모토 노부코)에게 점원 우라라(아시다 마나)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빌려드릴….”

영화 〈메타모르포제의 툇마루〉는 그렇게 시작된다. 남자와 남자의 로맨스를 그린, 일명 BL(Boy’s Love) 장르 만화를 처음 본 75세 할머니가, BL 만화 ‘숨은 덕후’ 17세 소녀를 만나는 이야기다. “내가 이런 걸 처음 읽었는데, 뭐라고 하면 좋을까… 응원하고 싶어졌어요. 나이 먹고 이러는 게 부끄럽지만,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오랜만이에요.” 수줍게 고백하는 어르신께 신나서 BL 만화 이야기를 떠들던 점원이 결국 이런 제안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오늘 몇 시까지 일해요? 내가 말이죠, 계속 누군가하고 만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카페에서 시작된 둘의 수다는 며칠 뒤 유키의 집 툇마루로 자리를 옮겨 계속된다. 우라라는 방구석에 숨겨놓은 자신의 소중한 BL 만화를 싸들고 오고, 유키는 답례로 맛있는 카레를 만들어준다. 유키는 늘 혼자였던 밥상에 수저 한 벌 더 놓을 수 있어서 좋았고, 우라라는 늘 혼자 보던 만화를 누군가와 같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둘의 만남이 시작되는 이 초반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흐뭇했는데 둘의 우정이 무르익고 꽃피우는 나머지 이야기까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자주 미소 짓고 종종 뭉클하며 끝내 충만해진다. 그들에게 BL 만화가 있다면 나에겐 무엇이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하는 사람, ‘내게 소중한 것’을 ‘우리에게 소중한 것’으로 바꿔준 사람, 나에겐 누구일까.

카페는 마주 앉는 곳이고 툇마루는 나란히 앉는 곳이다. 마주 보는 관계와는 다른, 옆에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는 관계만이 해줄 수 있는 이야기. 국내에도 출간된 만화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를 예쁘게 영화로 옮긴 이 작품은 올해 일본 영화비평가대상 작품상을 받았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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