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레리뇽 고원

매기 팩슨 지음, 김하현 옮김, 생각의힘 펴냄

“평화는 왜 그렇게 연구하기 어려울까? 아니면 반대로, 폭력은 왜 그렇게 연구하기 쉬울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프랑스 비바레리뇽 주민들은 나치를 피해 도망쳐온 난민 수백, 수천 명을 받아들였다. 인류학자인 저자는 자신의 먼 친척 중 한 명인 다니엘 트로크메가 당시 피난 온 어린이들을 보호하는 곳을 지키다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저자는 자신의 방 벽에 그의 사진을 붙여놓고, 그때 당시 비바레리뇽 고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재구성한다. 서문이나 다름없는 1장은 이렇게 끝난다. “나는 사회과학자다. 이제 더 이상 전쟁을 연구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알고 보니, 나 혼자서는 그럴 수 없다.”

나의 살던 고향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김동훈·김형민 지음, ㅁ(미음) 펴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고향의 봄’이다.”

80대 아버지와 50대 아들의 합작 자서전. 출간 과정이 흥미롭다. 가족이 모인 팔순 잔치에서 아버지는 “나중에 내가 세상 떠난 후 문상하러 온 사람들에게 내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남겨 소개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글 잘 쓰는 아들이 “정리는 제가 해드리죠” 했는데, 정말로 아버지는 워드프로세서를 익혀 독수리 타법으로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아버지가 메일로 보내온 원고를 아들 ‘산하’ 김형민 PD가 다듬었다. 1939년생 김동훈씨는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태어났다. 자신이 겪은 일제강점기, 해방, 전쟁, ‘한강의 기적’ 등을 기록했다. ‘산하’의 말처럼, ‘개인이라는 작은 구멍을 통해 그 너머에 펼쳐진 역사를 드넓게 굽어볼 수 있는 망원경’ 같은 책이다.

겨울나그네

최인호 지음, 열림원 펴냄

“관자놀이의 혈관을 망치질하듯 두드리는 것을 느끼면서 생각했다."

“잃어버린 순수와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이란 이 책의 홍보 문구가 2024년의 독자들에겐 낯설지도 모르겠다. 〈겨울나그네〉는 한국 문학의 전성기 중 하나인 1980년대의 쟁쟁한 작품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인 대중소설이다. 민중과 민족이라는 큰 의제가 문학계의 대세로 자리 잡았던 시대라지만 다른 흐름의 감성과 기개로 꺾이지 않고 자신의 존재감을 꿋꿋하게 지켜냈다. 1960년대 중반 ‘한일 협정’에 상처받은 젊은 영혼으로 출발했던 작가 최인호가 이 시기를 어떤 방식으로 소화해냈는지 주목하며 읽어도 재미있다. 여느 연애소설과 마찬가지로 슬프고 즐겁고 자극적이며 비통하다. 봄날, 아름답고 선한 젊은 남녀가 밝고 활기찬 대학 캠퍼스에서 우연한 부딪침으로 맺은 인연이 예정되어 있던 잔인한 운명에 꺾이고 만다는 연애소설의 문법을 지키는 와중에도 통속적이란 느낌을 주지 않는다.

TMI: 정보가 너무 많아서

캐스 R. 선스타인 지음, 고기탁 옮김, 열린책들 펴냄

“안타깝게도 어떤 정보는 사람들의 삶을 어떤 식으로든 개선하지 않는다.”

미국 식품의약국이 영화관의 팝콘 칼로리를 공개하도록 하자 몇몇 사람들은 분노했다. “팝콘 맛을 망쳐놓았군.” 심지어 이들은 추가비용을 지불하고라도 칼로리를 모르는 편을 선택했다. 찜찜할 뿐만 아니라 유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는 것은 힘이지만 무지는 축복이다’라는 저자의 도발적 주장은 정보 과잉의 시대에 남다른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듯하다. 알권리 자체를 부정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세부적인 지식들로 인해, 삶을 정말로 유용하게 하는 ‘알권리’가 퇴색된다고 비판한다. 오바마 행정부에서 규제정보국 국장을 지낸 법학자인 저자가 공공 정책을 둘러싼 정보의 어두운 단면을 파고들었다. 어떤 정보는 적을수록 더 이롭다.

어항을 깨고, 바다로 간다

김예지 지음, 사이드웨이 펴냄

“그리고, 나는 그것을 깨기 위하여 여기 왔다.”

당과 이익을 가리지 않고 소신 있는 행보를 펼치고 있는 첫 여성 시각장애인 국회의원 김예지가 에세이를 냈다. 정치가 가장 필요했던 사람이 정치인이 되어 느끼는 책임감과 고민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특히 2022년 3월, 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투쟁 현장을 찾아가 무릎 꿇은 기억을 떠올리며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바친 사과였다”라고 회상한다. 전장연을 비난하던 이준석 당시 당대표를 대신해서, 혹은 전장연 활동가들에게 사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권 내의 한 사람으로서 장애인들에게, (중략) 불편을 겪은 비장애인 시민 모두에게 드린 사과”라는 의미다.

타이틀 나인

셰리 보셔트 지음, 노시내 옮김, 위즈덤하우스 펴냄

“일단 문제에 이름을 붙이면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다.”

성별과 관계없이 학습권을 누리고 스포츠에 참여하도록 하며, 성적 괴롭힘과 성폭력 생존자 지원을 위한 정책 개선에 기여하고, 임신한 학생을 계속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하고, 퀴어와 트랜스젠더 학생을 위한 보호 장치를 만들었으며, 학생들이 성별 고정관념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준 법이 있다. ‘타이틀 나인’은 미국 교육에서 성차별을 금지한 최초의 법이다. 주석만 80여 쪽, 한국어판은 600쪽이 넘는 이 ‘벽돌책’은 타이틀 나인을 만들어내고 지키기 위해 싸운 역사이자, 미래를 준비하는 오늘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먼저 싸워온 사람들의 이야기 덕분에 한국에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생긴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볼 수 있다.

기자명 시사IN 편집국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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