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시민 배춘환씨가 〈시사IN〉 편집국에 4만7000원을 보내왔다. 47억원의 손해배상이 청구된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에게 힘을 보태달라는 뜻이었다. 노란봉투법은 그 4만7000원에서 시작되었다. 지난 11월9일,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노란봉투법을 제안한 시민 배춘환씨가 '거부권을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그 편지를 싣는다.
윤석열 대통령님께
저는 10년 전 겨울에 한 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해고된 노동자들에게 수십억원의 손해배상이 청구됐다는 기사를 본 후였습니다. 해고만으로도 보통 사람들에게는 큰 상처이고 충격인데, 생계도 막막한 해고 노동자들에게 47억원이라니, 숫자를 듣는 것만으로도 무거운 돌에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당시 저는 셋째를 임신 중이었고, 이런 세상에서 셋째를 낳을 생각을 하니 갑갑한 마음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47억원의 10만분의 1인, 4만7000원을 동봉해 한 시사지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가 공개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많은 사람들이 4만7000원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가족이 짜장면 먹을 외식비를 대신 보낸다는 가장, 아들이 취준생인데 남의 일 같지 않다는 어머니, 1000원씩 47명이 모았다는 고등학생들, 장난감을 안 사고 보낸다는 7살 아이까지. 그렇게 노란봉투 캠페인이 시작됐고, 노란봉투법 입법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노란봉투법의 시작은 여당과 야당의 대립도 아니고, 경영계와 노동계의 대립도 아니었습니다. 내 이웃이 고통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더 정의로웠으면 하는 마음, 돈 때문에 누군가 더 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그런 마음들이 모여 만들어진 법이 노란봉투법입니다.
내 이웃이 고통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저는 노란봉투법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담아 노란봉투 캠페인에 참여했던 많은 분들이 떠올랐습니다. 이게 연대의 힘이구나, 시민 효능감이라는게 이런 것이구나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그리고 특히 한 사람의 안부가 궁금했습니다. 불치병을 앓는 아이의 아빠라고, 내 아이가 얼마나 살지 모르지만 내 아이가 살아서 어른이 된다면 좋은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노란봉투 캠페인에 참여한다던 그 아버지. 그 아버지도 어딘가에서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고 계실까. 그 아이는 건강하게 자라서 어른이 되었을까. 드디어 우리가 그 아이를 위해 더 좋은 세상을 만든 것일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들에게 노란봉투법은 경영권을 저해하는 법도 아니고, 파업을 촉진하는 법도 아닙니다. 내 아이가 삶의 안정감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하는 법, 부당함에 처했을 때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법, 남을 밟아야 네가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세상에 저항하는 법입니다. 우리들에게 노란봉투법은 품위 있는 시민으로 살기 위한 복지이고 민생입니다.
노란봉투법이 있기까지 마음을 모았던 많은 국민들을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이 법이 없는 동안 죽어나간 많은 인생들을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이 법이 있음으로써 꿈을 꾸게 될 많은 청년들을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2023년 11월27일
국민의 한 사람 배춘환 드립니다.
-
4만7천원에 그저 눈물만 나왔다
4만7천원에 그저 눈물만 나왔다
이숙이 편집국장
이숙이 편집국장님께안녕하세요. 1년 내내 받기만 하다가 글을 쓰려니 쑥스럽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1주일에 한 번씩 〈시사IN〉을 받으면 가장 먼저 펴보는 글이 ‘편집...
-
영·프·독·일 노동자에겐 ‘손배 폭탄’이 없다
영·프·독·일 노동자에겐 ‘손배 폭탄’이 없다
전혜원 기자
지난 2월4일 영국 철도해운교통노조(RMT)와 사무감독기술직노조(TSSA)가 48시간 파업에 나섰다. ‘매표소 창구 260곳을 폐쇄하고 직원 950명을 해고한다’라는 런던지하철공사...
-
이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이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천관율 기자
평범한 시민의 편지 한 통이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다. 모금을 시작한 지 19일 만에, 1명은 1만7500명이 되고, 4만7000원은 6억9000만원이 되었다. 국내 소셜 펀딩 사...
-
윤석열 대통령, 노란봉투법 제대로 알고 있나?
윤석열 대통령, 노란봉투법 제대로 알고 있나?
전혜원 기자
2013년 12월, 곧 세 아이의 엄마가 되는 배춘환씨는 〈시사IN〉에 보도된 한 기사를 보고 편집국장 앞으로 편지를 썼다. 쌍용차 노조가 손해배상(손배) 판결을 받았다는 기사였다...
-
노란봉투법 입법까지 “아직 시간이 있다”
노란봉투법 입법까지 “아직 시간이 있다”
이은기 기자
10년 전 일이다. 2013년 12월, 배춘환씨는 쌍용자동차 노조에 47억원 배상책임을 묻는 1심 판결을 접하고 〈시사IN〉에 편지와 함께 4만7000원을 보냈다. “47억원… 뭐...
-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한 노란봉투법 ‘생애사’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한 노란봉투법 ‘생애사’
전혜원 기자
이번 21대 국회 들어 야당 단독으로 노란봉투법과 방송 3법을 통과시켰다(이전에는 양곡관리법과 간호법을 야당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윤석열 대통령은 두 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
소년소녀가장과 노란봉투 [편집국장의 편지]
소년소녀가장과 노란봉투 [편집국장의 편지]
차형석 편집국장
‘가족돌봄 아동’과 ‘소년소녀가장’. 뒤의 말이 더 익숙하다. 하지만 정부는 2014년부터 공식 문서에서 소년소녀가장이라는 이름을 지웠다. 변진경 기자가 쓴 이번 호 커버스토리를 ...
-
〈시사IN〉 독자들이 만든 ‘노란봉투법’ [취재 뒷담화]
〈시사IN〉 독자들이 만든 ‘노란봉투법’ [취재 뒷담화]
장일호 기자
11월9일 ‘노란봉투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10년 만에 어렵게 한 걸음을 뗐다. 전혜원 기자가 노란봉투법 ‘생애사’를 정리했다.오랫동안 국회에서 잠자던 법이 드디어 통과됐다.쌍용...
-
노란봉투법, 그게 최선이었을까 [프리스타일]
노란봉투법, 그게 최선이었을까 [프리스타일]
전혜원 기자
‘노란봉투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을 때, 사실 별로 기쁘지 않았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 거의 확실했기 때문이다. 노란봉투법이라 불리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