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 잠에서 깬 세미(박혜수)가 왼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낸다. 그길로 선생님을 찾아가 조른다. “하은이가 너무 걱정돼요. 꿈이 불길했단 말이에요. 하은이한테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요.” 선생님의 대답. “(조퇴는) 안 돼. 학교 끝나고 가서 봐. 수학여행 전날이라고 봐주고 그런 거 없어.”

어느 병원. 잠든 하은이(김시은)를 세미가 깨운다. “조퇴했어. 너 걱정돼서.” “내가 왜? 나 완전 괜찮은데?” “뻥치지 마. 너 슬프잖아. 제리 죽어서.” 얼마 전 떠나보낸 반려견 제리 이야기. 아무렇지 않은 척 화제를 돌리는 하은이. “아니, 제리 죽은 건 안 슬픈데 나 다리 다친 건 슬퍼.” “그거는 슬픈 게 아니라 아픈 거지.” “수학여행을 못 가잖아. 인생에서 한 번인데.”

그렇게 시작되는 하루였다. 꿈에서 친구의 죽음을 본 세미는 몰래 학교를 빠져나와 하은이에게 달려왔고,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한 하은이는 자기도 수학여행 가고 싶다고 투정을 부린다. 이제라도 방법을 찾아보자는 세미와 달리, 하은이는 그다지 적극적인 것 같지 않다. 세미는 서운하다. 나랑 가장 친한 친구에게 나보다 더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생긴 것만 같다. 그래서 불안하고 자꾸 짜증내고 금세 미안하고 계속 후회하다 저물어가는 하루.

불 꺼진 교실로 다시 돌아온 세미가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낸다. 혼자 읽어본다. “하은이에게. 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 모르겠다. 오늘은 꼭 고백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좋은 걸 보면 너랑 같이 보고 싶고, 맛있는 걸 먹으면 너랑 같이 먹고 싶어. 이 편지를 보고 너가 달아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 마음이 너한테 닿을 수 있을까. 네 마음도 나랑 같았으면 좋겠어. 수학여행 다녀와서 우리 꼭 맛있는 거 먹자. 하은아. 그냥 내가 너를 많이 좋아하는 거 같아. 그냥 이 말이 하고 싶었어.”

편지를 와락 구겨 다시 가방에 쑤셔 넣는 세미. 아마도 끝내 부치지 못하는 편지가 될 것이었다. 그렇게 꾸깃꾸깃 구겨진 채로 가방 밑바닥에서 점점 납작해질 마음이었다. 이건 우정일까 사랑일까. 나는 지금 슬픈 걸까 아니면 아픈 걸까. 학교가 있는 곳은 경기도 안산. 내일이면 제주도로 수학여행 떠나는 세미. 우리 모두 짐작하는, 바로 그해 봄날, 바로 그 아이들 이야기.

조현철 감독은 “광화문에서 세월호 생존 학생이 먼저 떠난 친구들에게 쓴 편지를 읽는 장면이 뇌리에 깊이 박혀”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친구가 꿈에서라도 나타나 만났으면 좋겠다’며 우는 모습”이 잊히지 않아 이 꿈같은 이야기를 생각했다고 말했다. 어두운 바닷속에 가라앉기 전, 눈부시게 반짝였을 마지막 하루를 상상한 이유다. ‘그날 어떻게 죽었는지’가 아니라 ‘그날까지 어떻게 살았는지’를 기억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구겨서 버려둔 감정을 다시 펴 비행기로 접는 일. 나는 그게 ‘이야기를 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꾸깃꾸깃 접힌 채로 납작해진 지난날의 어떤 시간을, 정성껏 다시 접어 잠시 하늘로 날려보내는 게 영화라고 생각한다. 좋은 이야기는 더 멀리 날아갈 것이다. 그보다 조금 더 좋은 이야기는 기어이 내 앞으로 날아와 발밑에 툭, 떨어질 것이다. 그걸 주워 펼치면 꽃이 되는 영화가 있다.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 한참을, 그저 한참을 바라보게 되는 이야기가 있다. 영화 〈너와 나〉의 세미와 하은이 이야기처럼.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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