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대병원 옥상에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맨 왼쪽)가 취재를 하는 동안 폴 코트라이트(오른쪽 두 번째) 등 미국 평화봉사단원들이 돕고 있다. ⓒ5·18 기념재단 제공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대병원 옥상에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맨 왼쪽)가 취재를 하는 동안 폴 코트라이트(오른쪽 두 번째) 등 미국 평화봉사단원들이 돕고 있다. ⓒ5·18 기념재단 제공

주한 '미국 평화봉사단(The Peace Corps/Korea·피스코)'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알다마다, 피스코 단원에게 영어를 배운 적도 있다고요? 그렇다면 당신은 1966~1981년 사이에 한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을 것입니다. 평화봉사단은 미국 시민 가운데 봉사단원을 선발해 개발도상국(초청국)으로 파견했습니다. 이들은 초청국에서 2년간 일하며 사람들의 자립을 도왔죠. 현재 한국인들이 해외에서 2년간 봉사활동을 하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떠올리면 될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1966년부터 1981년까지 약 15년간 평화봉사단이 주재했습니다. K-1(1기)부터 K-51(51기)까지 50여 차례에 걸쳐 봉사단원을 파견했습니다. 그동안 약 1200명이 한국의 중·고등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활동했고 500여 명이 군 혹은 면의 보건소에서 보건요원으로 활동했습니다. 행정직원과 의료진까지 합치면 약 2000명이 한국에서 봉사한 것이죠. 냉전 시대에는 미국의 문화 제국주의를 개발도상국에 퍼뜨리는 한 방편이라며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개별 봉사단원들은 미국 정부의 암묵적 의도와 무관하게 초청국 사람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문화를 습득했습니다.

초청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 공개적으로 발언하지 말라는 평화봉사단 내부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 평화봉사단원은 1970~1980년대 한국의 군부독재 상황에 대해 대외적으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규정에 불복한 이들도 있습니다. 특히 1980년 5월 전남 지역에 배치된 봉사단원들 중 일부는 '광주를 즉시 떠나라'는 미국 대사관의 명령을 어기고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목소리를 내거나 활동했습니다.

한센병 지역사회 보건을 담당하던 팀 완버그 씨(K-45)는 전남도청에서 환자를 이송하고 시신을 수습하는 등 광주 시민을 도왔습니다. 팀 완버그 씨와 함께 보건요원이었던 폴 코트라이트 씨(K-48), 데이비드 돌린저 씨(K-45)는 〈타임〉지와 AP 통신 등 외신기자들의 취재와 통역을 도왔습니다. 스티븐 헌지커 씨(K-45)와 캐럴린 투비필 씨(K-45)는 일본을 거쳐 덴마크와 스웨덴에 가서 당시의 광주 사진과 기사를 현지 언론에 제보했습니다. 폴 코트라이트 씨는 2020년 〈5·18 푸른 눈의 증인〉이라는 회고록을 펴내 평화봉사단으로서 다시금 광주 문제를 환기하기도 했죠. 

한국을 경험한 모든 평화봉사단원에게 1980년 5월은 충격적인 시간이었습니다. 1971년부터 2년간 광주의 중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하고 이후 1년간 전남 도교육위원회에서 연장 근무한 도널드 베이커 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의 아시아학과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는 그는 광주에 3년간 거주하면서 전라도 사투리를 배우는 등 광주 시민과 깊은 정서적 교감을 나누었습니다. 머물던 하숙집 사람들을 진짜 가족이라고 부르기도 했죠.

1972년 광주의 한 대폿집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도널드 베이커 씨. ⓒmichael brady
1972년 광주의 한 대폿집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도널드 베이커 씨. ⓒmichael brady

베이커 씨는 제2의 고향이 광주라고 할 만큼 광주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평화봉사단 임무를 마친 뒤 한국을 더 배우고 싶은 마음에 미국에 돌아가 워싱턴 대학 대학원에서 '조선 후기 사상사'를 공부했습니다. 1978년 풀브라이트 재단 장학금을 받고 박사논문 자료수집차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대학과 자료수집처가 서울에 있었기에 그는 광주가 아닌 서울에 거주하며 공부했습니다.

1980년 5월15일 베이커 씨는 우연히 서울 남대문 로터리 인근에서 전투경찰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당시 전두환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대규모 대학생 시위대와 전투경찰이 대치 중인 가운데 신원 미상의 운전자가 모는 버스가 전투경찰을 덮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서울의 봄’ 당시 남대문 버스 사고의 현장이었습니다. 사고가 난 직후 앰뷸런스가 아닌 픽업트럭이 와서 재빨리 쓰러진 전투경찰을 싣고 갔습니다.

‘아아 광주여’ 시 배포하다 제지당하기도

이튿날 신문에는 광주 출신의 버스 운전사가 사고를 내서 경찰관 한 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당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베이커 씨는 의문에 사로잡힙니다. 버스에 치여 사망한 것처럼 보이는 전투경찰 5~6명 중에 단 한 명만 사망한 것이 과연 사실일까. 사망자를 줄여야 하는 당국의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 아니면 그 장면을 목격한 스스로가 오류에 빠진 것은 아닐까.

5월15일의 충격이 다 가시지도 않은 5월18일, 북한 특수부대가 광주에서 많은 사람을 학살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그는 광주에 남아 있는 하숙집 가족과 친구들의 상황을 확인하러 길을 나섭니다. 당시 군대가 광주로 가는 모든 길을 차단했기 때문에 5월27일 해남으로 먼저 가서 나주를 거쳐 에둘러 광주로 향했습니다. 광주로 향하는 도로에는 불에 타서 버려진 버스가 있었습니다.

광주에 도착한 이후 그는 하숙집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 광주가 포위되었던 5월18일부터 27일까지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습니다. 5월18일 이전까지 그저 평범한 소시민이었던 친구들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당시 상황을 말해주었습니다. 국가 폭력에 분노한 것은 똑같지만, 각자의 이야기는 조금씩 달랐습니다. 그가 기억하는 한 광주의 친구들은 누구도 자신이 독재에 맞서 군인과 싸웠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베이커 씨의 기억에 남은 친구들의 모습은 겁에 질린 채 정신적 충격을 받은 듯했죠. 국립 5·18민주묘지에 서 있는 용감한 시민군의 동상이 베이커 씨에게 조금 낯설어 보이는 이유입니다.

광주에서 그는 도심 곳곳에 남아 있는 핏자국과 비극의 흔적들을 발견하였습니다. 시내 체육관에서 손주의 마지막 얼굴을 찾아 헤매는 할머니를 보았고, 화장터로 떠나는 자식의 관을 쫓으며 흐느끼는 어머니도 보았습니다. 광주의 한 목욕탕에서 매표소 아주머니는 그를 향해 “이제 우리나라 역사는 끝났다”라며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당시 한국의 어떤 뉴스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접할 수는 없었죠.

광주에 있을 때 누군가가 그에게 종이에 복사된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건넸습니다. 매우 강렬한 시였죠. 베이커 씨는 서울로 돌아와 용산 미군기지의 복사기에서 그 시를 복사했습니다. 당시 그는 미국 정부가 관여하는 풀브라이트 재단에서 장학금을 받는 미국인이었기에 용산 미군기지 출입이 가능했습니다. 용산 미군기지 안의 복사기가 서울 어느 곳의 복사기보다 안전하다고 판단했을 터입니다.

베이커 씨는 그 시를 복사해 버스 안에서 배포하다가 시민들에게 제지당하기도 합니다. 한 시민은 그 시를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광주 놈들, 다 죽을 만한 놈들이지.” 서울 거리 곳곳에는 군인들이, 대학 캠퍼스에는 전투경찰이 배치되어 있었죠. 그는 한국의 모든 상황에 대해 분노하며 주한 미국 대사관을 찾아갔습니다. 베이커 씨는 대사관 직원에게 자신이 광주에서 본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대사관 직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그곳에 가지 말았어야 합니다. 당신이 혹시 그곳에서 무슨 일이 생겼으면 한·미 관계에 악영향을 끼쳤을 겁니다.”

광주에서 한 경험은 그의 학문적 인생을 바꿔놓습니다.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조선시대에 관한 학위논문을 쓰기 위해서였죠. 그는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 당했던 신유박해(1801)를 연구하면서 공식 기록과 개인 기록 사이의 간극에 주목했습니다. 천주교 박해 과정에서 조선 정부의 심문 기록, 신자들의 기록, 목격자들의 기록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1980년 5월 광주의 상황과 비슷했습니다. 피해자들 모두 극심한 트라우마를 겪은 것도 같았습니다. 베이커 씨는 공식 기록과 목격자의 진술 간 차이에 주목하면서 비극적 역사를 학술적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필자와 인터뷰하고 있는 도널드 베이커 교수. ⓒ서나래 제공

5월 광주가 그를 일깨우는 것

그가 2020년 워싱턴 대학에서 발표한 ‘광주, 트라우마와 역사 서술에서 객관화의 문제(Kwangju, Trauma, and the Problem of Objectivity in History-Writing)'라는 글에는 이런 문제의식이 잘 담겨 있습니다. 그는 “만약 1980년 5월15일 서울에서 일어난 일을 내가 목격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5월27일 광주로 내려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역사에서 객관성을 확보하고 정확함을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몸소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5·18에 대해 ‘객관적인’ 태도로 글을 쓰는 것이 힘들다. 조선시대에 대해 글을 쓸 때면 나는 그때 일어난 사건들과 아무런 개인적 연관이 없기 때문에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역사가의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것이 훨씬 쉽다. 그렇지만 광주와 5·18의 영향 덕분에, 직접 목격한 것의 불완전성에 대해 광주가 지속적으로 나를 일깨우고 있기 때문에, 나는 역사적 내러티브에서 좀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내가 구성한 내러티브에서 다른 것보다 객관성에 좀 더 다가가려고 한다.”

주한 미국 평화봉사단원들의 구술생애사를 수집하는 연구자로서 저 역시 늘 객관성과 실체적 진실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베이커 씨의 삶을 통해 1980년 5월 광주를 이야기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궁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1980년 5월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스스로 목격한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40여 년 전의 기억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어느 역사가나 사회과학자도 역사적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온전히 도달하는 글을 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역설적으로 그것은 학문 탐구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단일한 시각과 하나의 내러티브로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감각이나 기억의 불완전성, 트라우마에 의한 왜곡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스스로 의심하고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시각, 각자의 내러티브가 있습니다. 우선은 많은 내러티브들을 모으는 것이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는 데 중요할 것입니다. 이 글이 1980년 5월을 밝히는 데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기자명 서나래 (국립안동대학교 강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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