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5일 대구 수성구 전교조 대구지부 사무실에서 이만호 전 전교조 위원장 권한대행이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김흥구

대구에 사는 이만호씨(82)는 평생 교직에 몸담으며 교육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교육자다. 1970년대 초부터 대구 지역 ‘명문 사학’으로 꼽히던 영남고등학교에서 영어 과목을 맡아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는 특히 진학 지도에 능해 늘 학교 당국이 인정하는 ‘모범 교사’로 통했다. 지방에서 이른바 일류 고등학교의 기준은 서울 명문 대학에 몇 명을 입학시키느냐였다.

이만호 교사는 1970~1980년대 영남고에서 서울 소재 명문대를 가장 많이 보내는, 실력 있는 교사로 통했다. 각종 표창을 독차지했다. 그만큼 학교에서는 그의 영향력이 막강했고,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제자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화려한 입시 성적의 이면에 자리한 교육의 그림자에 늘 가슴 아팠다. 전국에 걸쳐 한 해 100여 명의 학생들이 과열 입시 경쟁에 치여 스스로 목숨을 끊던 군사정권 치하 ‘교육 지옥’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그가 1980년대 후반 들어 가장 맹렬한 교육민주화 전사로 탈바꿈하게 된 이유였다.

교사 이만호는 교육 현장에 민주화 요구가 한창이던 1988년 11월 대구교사협의회 대의원대회에서 대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전교조 창립 이전까지 대구·경북 지역 교육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다. 이어 1989년 전교조 대구경북지부를 결성해 그해 5월28일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전교조 결성 창립대회에 참석했다.

이 자리가 그에게는 운명의 순간이었다. 초대 전교조 지도부를 맡은 윤영규 위원장(2005년 작고)이 당시 노태우 정권의 총공세를 받고 초기에 감옥에 체포됐다. 수세에 몰린 전교조는 이만호 대구지부장을 전교조 위원장 권한대행으로 추대했다. 당연히 노태우 정권과 교육 당국의 온갖 회유와 협박이 그에게 쏟아졌다.

온갖 협박과 회유를 뿌리치고 그가 잠적하자 지명수배령이 떨어졌다. 그는 잠적한 상태에서 전국을 누비며 ‘전교조 사수’에 목숨을 걸었다. 하지만 전교조를 ‘체제 수호’ 차원에서 와해시키라고 직접 명령한 노태우 대통령의 초강수 탄압 앞에 신생 전교조 교사들은 추풍낙엽 신세였다.

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전교조 탈퇴를 거부한 전국의 교사 1527명이 파면 또는 강제 해직을 당했다. 끝까지 양심을 지키려 하는 교사와 가족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수모와 모멸이 뒤따랐다. 그는 수배 상태에서 전국을 누비며 해직 교사들을 격려하다가 이듬해인 1990년, 경부고속도로 부산톨게이트에서 체포돼 3년의 옥고를 치렀다. 이 과정에서 그가 목격한 수많은 전교조 교사들의 억울한 죽음과 한 맺힌 병마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2021년, 그는 피해 동료 교사 246명과 함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전교조 결성 과정에서 자행된 끔찍한 국가 폭력의 진상을 규명해달라는 신청서를 냈다(〈시사IN〉 제721호 “알려진 탄압은 ‘새 발의 피’, 전교조 해직 교사들이 다시 뭉친 이유” 기사 참조). 지난해 12월9일 진실화해위는 이 사건에 대해 1년여의 조사를 거친 끝에 ‘11개 국가기관이 조직적으로 불법 개입해 저지른 중대한 인권유린 사건’이라고 진상규명을 결정했다.

진실화해위가 조사 발굴한 각종 정부 비밀 자료에 따르면, 1989년 안기부의 총괄기획 아래 당시 문교부·법무부·보안사령부(보안사)·경찰 등 11개 국가기관이 전교조 소속 교사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한 탄압 행위에 투입됐다. 문교부(현 교육부)는 ‘교원 전담실’을 설치하고 각 시·도 교육청을 통해 ‘문제 교사’를 특정해 해당 교사와 이들의 가족, 학부모까지도 사찰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보안사는 전교조 주요 간부에 대한 대공 혐의점을 찾기 위해 주거에 침입하는 등 불법행위를 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처음 발굴된 ‘진드기 공작철’이라는 문건에는 보안사가 1990년대까지 전교조 소속 교사를 대상으로 미행·감시·촬영·주거 침입은 물론 절도까지 저지른 내용이 고스란히 포함됐다.

정부는 전교조 탄압을 위해 법원과 헌법재판소도 활용하려고 했다. 전교조가 행정·민사 소송이나 헌법재판소 위헌법률심판을 신청할 것에 대비해 당시 정부가 법원과 헌법재판소에 로비를 벌였다는 기록이 나온 것이다. 1990년 ‘문교부 회의 결과 보고’ 문서에는 문교부 차관을 위원장으로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소송 업무를 전담하고, 재판관 9명에 대해 집중 로비 활동을 전개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전교조 와해 공작에는 전국적으로 말단 행정조직까지 일사불란한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전국 각지의 구청·동사무소 직원들이 직접 동원돼 가입 교사의 탈퇴를 종용하러 다녔다. 또 노태우 정권은 일선 경찰관과 동장, 마을 이장 등이 나서서 전교조 소속 교사의 가족에게 이혼을 요구하거나 자살 소동을 벌이는 방식으로 심리적 압박을 가하라고 주문을 내리기도 했다. 이런 진실규명을 토대로 진실화해위는 “국가가 신청인들에게 공식으로 사과하고, 피해 회복을 위해 배·보상 등 적절한 조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전교조 창립 당시 ‘48세의 최고참 교사’로, 구속된 윤영규 위원장을 대신해 위기에 처한 조직을 이끌었던 교사 이만호는 이제 세월이 흘러 82세의 원로 교육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교육민주화 의지와 열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어 보였다. 전교조 와해 공작이 국가기관의 중대한 인권침해라는 진실화해위의 결정문이 나온 뒤 대구를 찾아 그를 만났다.

1989년 5월28일 전교조 결성식에 참석한 교사들이 사복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오른쪽이 사복 경찰.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제공

33년 만에 나온 국가 폭력 인권유린 진상규명의 의미는?

진실화해위의 결정을 반기고 환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글프다. 국가기관이 헌법과 법률에 따라 조사한 결과, 국가 폭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유린이라고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럽게 현 정부는 사과는커녕 뜨뜻미지근한 반응이다. 죄 없는 선생들 1500여 명을 구속·파면·해임하고 5년 동안 무임금에 호봉도 동결했으며 강제 탈퇴 과정에서 온갖 몹쓸 인권유린을 벌여 피해가 큰 상황에 대해 이제 정부가 답할 차례다.

초대 전교조 위원장 권한대행을 맡게 된 경위는?

윤영규 위원장과 이수호 수석부위원장이 당시 연세대에서 회의를 하던 중 체포 구속됐다. 당시 교육민주화를 위한 밀알이 되어 내가 썩어야만 교육민주화의 싹이 트이고 제자들도 ‘입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사명감에 지부장 중 연장자로서 기꺼이 지도부를 맡았다. 7월19일부터 명동성당에서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전교조 교사 600명이 12일간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노태우 정권은 나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해 잡으려고 혈안이 됐다. 수배 상태에서 도피하며 전교조를 지도하기로 의견이 모아져 나는 6개월 동안 전국을 돌며 탄압받는 전교조 교사들을 위로하고 지도했다.

당국의 경계가 삼엄했을 텐데.

서울 중부경찰서와 대구 수성경찰서 형사 각 한 명씩이 집 앞에서 6개월간 잠복했다. 도피 중 전국을 떠돌며 ‘중앙집행위원회(중집위)’ 회의를 열었다. 〈부산일보〉 〈영남일보〉 등 언론 인터뷰를 통해 전교조가 건재함을 알렸다. 안기부 주도로 전 국가 행정기관이 총동원돼 전교조를 와해하려 했지만 조직이 잘 유지되어서 교육민주화 투쟁을 끝까지 할 것이라는 의기를 천명했다.

대구를 정치 기반으로 하는 노태우 정권의 반응은 어땠나?

탈퇴 회유 등 탄압 강도가 더욱 극심했다. 안기부 직원들이 학부모를 사칭해서 나에게 전화해 ‘당신을 가만두지 않겠다’든지 내 아이들을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당시 나는 3남매를 두고 있었는데 그런 온갖 비열한 짓을 당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

당시 전국 지도부인데도 파면 대신 해임됐던데.

당시 전국에서 대부분의 전교조 지도부를 파면했는데, 나를 해임한 것은 내가 학교 학생들을 우수한 성적으로 이끌었고 모범 교사로서 표창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나를 따르는 교사와 학생들도 많았다. 처음에는 교육 당국이 새로운 학교장으로 부임시켜주겠다며 회유하다가 굴하지 않자 결국 7월15일자로 해임했다. 전교조 탈퇴 공작에 맞서고자 했으나 도를 넘은 인권유린과 가정파괴, 협박 등에 못 이겨 많은 교사가 탈퇴했다. 대구에서 58명이 해직당했다.

2019년 5월25일 서울 종각역 인근에서 전교조 결성 30주년 기념 전국교사대회가 열렸다. ⓒ연합뉴스

탈퇴 공작 과정에 피해도 많았다.

군사정권의 후신인 노태우는 전교조 와해를 위해 온갖 탈법을 저질렀다. 심지어 우리를 체제 전복 세력이라 몰아붙이며 적 소탕작전을 하듯이 대했다. 친지 동원과 부모 협박 등 비인도적인 방법까지 쓰면서 탈퇴를 종용했다. 부산에서는 초등교사가 해임됐는데 아버지가 학교에 찾아가니 딸이 빨갱이라고 손가락질해서 분을 못 참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도 있었다. 처절한 싸움이었다. 나중에 조사해보니 반인권적 탈퇴 공작 과정에 위암 등에 걸려 죽은 해직 동료도 전국에서 60명이나 되더라.

탄압 과정에서 일부 제자들도 피해를 본 것으로 안다.

당시 전국 각지에서 제자들이 전교조 선생님들 탄압에 맞서 해임 반대 시위를 벌였다. 대구 경화여고의 김수경 학생이 선생님들을 탄압하지 말라며 항의하다 영남대에서 투신했다. 교육 당국이 엄청나게 그 학생을 압박했다. 오죽 견디기 힘들었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겠나. 그 생각만 하면 치가 떨린다. 매년 전교조에서 추모식과 기념행사를 벌이고 있다.

이후 복직은 어떻게?

창립 과정에서 1500여 명이 해직당해 생계를 위협받으니 많이 고통스러웠다. 5년에 걸쳐 기약 없는 길거리 투쟁을 했다. 정해숙 위원장 시절 우리는 복직해서 투쟁하는 쪽으로 방침을 정했다. 나는 당시 사립 영남고에서 받아주지 않아 공립 고교로 복직했다.

복직 후에는 어떤 활동을 했나.

2002년 명예퇴직을 신청해 학교에서 나온 뒤 민선 교육위원 선거에 나갔다. 그때 전국 교육위원 중 전교조 출신이 24명 당선됐다. 대구에서는 교육위원 9명 중 전교조 출신이 2명이었다. 우리는 전교조 내부 방침에 따라 철저하게 교육 현장의 부패와 부조리를 조사·감시하고 개선하는 역할을 맡았다. 각 시도 교육위 과장과 장학사 등 과거 전교조 탄압에 앞장섰던 이들이 그때부터 표변해 굽신거리며 비굴한 모습을 보이더라.

영남고 출신 홍준표 대구시장이 전교조를 부쩍 비난하던데.

홍준표 시장은 학창 시절 나를 잘 따르던 제자다. 영남고 21회인데 고2 때 나에게 영어를 배웠고, 나를 많이 따랐다. 졸업 후 ‘고시 붙으면 한번 찾아뵙겠습니다’라고 하더니 사시 합격한 뒤 찾아와 인사하더라. 70명 뽑는데 중위권으로 합격했다고 하기에 격려해줬다. 그 뒤 영남고 21회 졸업 30주년 홈커밍데이 행사에 과거 존경하는 선생님들을 초빙해 감사 잔치를 하는데 홍준표가 양주 들고 찾아왔더라. 그런데 그 뒤 갈수록 보수적인 말을 하고, 최근에는 앞장서서 전교조를 비난하고 헐뜯고 있다. 실망해서 요즘은 곁도 안 준다.

다른 제자 중 기억에 남는 이는?

영남고 22회 졸업생 중 배득식이 있다. 학교 때부터 나를 따르던 그가 33세 되던 해에 찾아와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길래 들어주었다. 그런데 나중에 기무사령관이 되더니 못된 짓에 연루돼 결국 감옥에 가더라(이명박 정부 시절, 국군기무사령부(현 국군방첩사령부)의 ‘댓글 공작’을 주도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배득식 전 기무사령관은 이 사건으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한때 나를 따르던 제자들이 그런 길로 접어들 때면 아직도 몹시 실망스럽고 속상하다.

지난해 12월9일 발표된 ‘전교조 결성 및 교사 해직 과정에서의 인권침해 사건 진실규명’ 관련 자료.

보수세력이 여전히 전교조를 총공격하는데….

시대착오적이고 비민주적인 시각이다. 국가가 선진화됐으면 감정이 아니라 헌법정신에 입각해서, 노동 3권을 보장하고 이행해야 하는데 그걸 어기고 있다. 우리는 헌법정신에 따라 계속 투쟁하는 길밖에 없다.

앞으로의 계획은?

진실화해위 결정 이후 전국의 피해 동지들이 서울에 모여 해직교사 원상회복추진단을 만들었다. 진실화해위가 정부에 사과와 피해 회복 조처를 권고했는데 이행되지 않고 있다. 조만간 교육부와 행정안전부 장관 면담을 요청해 이행을 촉구할 것이다. 또 입법적으로는 현재 국회에 계류된 해직교사 피해 원상회복 특별법에 대해 진실화해위 권고를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법을 처리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아울러 사법적으로는, 국가기관의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라는 진상규명 결정을 토대로 국가 상대 손해배상 소송을 내려고 한다.

기자명 대구·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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