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그림

현대인들은 점점 자기중심적이 되고 나르시시스트가 되어간다. 그것도 아니면 우울증과 소진(burnout)에 멍들어간다. 이들은 간혹 가해자나 피해자로 뉴스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다. 이 시대의 가장 예리하고 독창적인 사회 비평가이자 철학자인 한병철은 〈리추얼의 종말〉(김영사, 2021)에서 이런 현상을 리추얼(Ritual)이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지은이가 사용하고 있는 독일어에서 리추얼은 ‘의례’ ‘의전’ ‘의식’ ‘잔치’ ‘예식’ ‘축제’ 등의 의미를 두루 포괄하고 있는데, 영어 사전에도 리추얼은 ‘의식’ ‘제사’ ‘절차’로 풀이된다.

리추얼은 공동체가 보유한 가치들과 질서들을 반영하고 전승한다. 리추얼은 소통 없는 공동체를 발생시킨다. 리추얼에서 본질적인 것은 상징적 지각이다. 본래 상징(symbol)이란 우호적인 주인과 손님이 서로를 다시 알아볼 수 있도록 주인이 사용하는 표지를 가리켰다. 주인은 하나의 점토판을 둘로 쪼개어 절반은 자신이 가지고 절반은 다른 사람에게 환대의 표시로 준다. 그렇게 서로를 다시 알아보기 위하여 상징이 활용된다. “상징이란 다름 아닌 반복의 특수한 형태다.” 본론과는 상관없지만, 이 구절은 특히 예술가 지망생이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선생님, 상징은 무엇입니까? 응, 뭐든 두 번 반복하면 상징이지. 한 편의 시 속에서 바퀴벌레가 두 번 이상 나온다면, 한 편의 단편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양치질을 무려 두 번이나 했다면, 한 편의 영화 속에서 교통사고가 두 번 나온다면 그건 우연이 아니고 상징이야.

지은이는 상징 곧 반복이 인간을 덧없는 것으로부터 끄집어내어 지속할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한다. 반복을 통하여 세계는 우연성으로부터 해방되고 비로소 거주할 수 있게 된다. 마을 한복판에 있는 고목 그리고 계절에 맞추어 돌아오는 축제(기념일)는 공간과 시간 속에 인간이 거주할 수 있게 해준다. 세계를 내 집과 같이 느끼게 해주는 장소에서는 누구도 소진되지 않는다. 반면 데이터와 정보가 만드는 세계는 반복을 추방한다. 가산적인 성질을 본질로 하는 데이터와 정보는 갱신되어야 하고 교체되어야 하며 쉼 없이 유동해야 한다. 디지털 세계의 주민들은 ‘좋아요’를 덧없는 의례 삼아 데이터와 정보를 서핑한다. 리추얼의 세계가 소통 없는 공동체를 발생시킨다면 SNS에는 공동체 없는 소통이 무성하다.

‘최후의 인간’은 웰빙만을 원한다

〈리추얼의 종말〉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김영사 펴냄

한국 현대 불교사의 대표적인 고승이었던 성철(性徹, 1912~1993) 스님은 자신을 친견하려는 사람에게 삼천배를 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이 조건은 성철 스님의 수행을 방해할 만큼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만든 방편이지 스님이 오만하거나 도도해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조건에는 그런 현실적 이유 외에 더 큰 뜻이 있다. 성철 스님은 삼천배가 스님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라, 절을 하는 그 사람에게 이익(깨달음)을 준다고 생각했다. 삼천배를 하는 사람은 그것을 하는 과정 중에 자아를 내버리게 되고 오로지 의례와 하나가 된다. 한병철은 성철 스님의 뜻을 바로 파악했다. “리추얼은 자아가 자기라는 짐을 내려놓게 해준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리추얼은 자아를 의례에 귀속시킨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더 많은 생산과 소비를 위해 전통적인 의례를 파괴하고 의례라고도 할 수 없는 가상의 의례를 내세운다. 도시의 곳곳에는 우주목(宇宙木) 대신 백화점과 쇼핑센터가 랜드마크처럼 서 있고, 밸런타인데이·화이트데이· 로즈데이·키스데이 같은 판촉 행사가 공동체의 축일을 잠식한다. 데이터와 정보를 숭배하는 자본주의는 상징(반복)을 비생산적·비효율적으로 보고 간소화하거나 삭제한다.

공손한 몸짓, 상냥한 인사, 사교 모임은 그것이 연극적이더라도 의례인 한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에게 상당한 내적 변화를 가져다준다. 리추얼은 비대하고 병든 자아를 흡수해준다. 이는 유교의 예(禮)가 작동하는 방식을 상기시켜주는데, 동양이나 서양 그 어느 문명의 전유물도 아닌 리추얼이 사라지면서 현대사회에는 자기중심적이고 나르시시즘적인 괴물이 생겨나고 우울증과 소진이 번성한다. 한병철은 팬데믹이 그나마 남아 있는 리추얼을 없앴으며, 팬데믹 이후 아무런 리추얼도 남아 있지 않으리라고 본다.

〈고통 없는 사회〉에서 한병철은 온통 긍정성(행복)으로 치장된 현대사회의 또 다른 리추얼 부재를 탐색한다. 인간은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하지만 자신에게 닥친 고통을 무의미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고통에는 내가 모르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19세기의 생리학자와 해부학자들은 문화적(기독교적)인 몸에서 의미를 완전히 제거했다. 이후로 고통은 무의미한 통증일 뿐이었다. 게다가 “행복하라”라는 현대의 지배 공식은 각종 진통제와 심리치료를 통해 몸과 마음의 고통을 말살한다.

고통은 타자와 연결시키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매개다. 고통이 퇴치되는 것과 함께 나 혼자 잘사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 “행복 장치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사회의 탈정치화와 탈연대화를 초래한다. 각자가 스스로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행복은 사적인 문제가 된다. 고통 또한 개인적인 실패의 결과로 해석된다. 그래서 혁명 대신 우울이 있다. 자신의 영혼을 치료하려고 애쓰는 사이에 우리는 사회적 불화를 낳는 사회적 연관을 시야에서 놓치고 만다. 두려움과 불안이 우리를 괴롭힐 때, 우리는 그 책임이 사회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적 행복 장치는 이런 고통의 싹을 질식시킨다. 진통 사회는 고통을 의학적 문제로, 사적인 문제로 만들어 탈정치화한다.” 팬데믹이 마스크 쓰기와 비대면 문화를 강제한 것처럼, 고통을 원천 차단하고자 친구도 사귀지 않고 사랑도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니체가 일찌감치 예견했던 ‘최후의 인간’은 웰빙(well-being)만을 원한다.

2011년 이후로 한병철의 신간은 거의 매해 출간되었다. 그 가운데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 2012)만 선풍을 불러일으켰을 뿐, 독자의 관심은 미적지근했다. 속 시원한 처방과 대안을 고대하는 대중과 진단만 되풀이하는 지은이 사이의 괴리가 원인이다. 도사처럼 답을 내놓아야만 주목받을 수 있는 사회에서 철학자의 사유 노동은 인기가 없죠. 한국에서는 도사가 철학자를 이긴답니다. 그런데 지은이가 한국에 없으니 망정이지 그가 한국에 있었다면 벌써 도사 흉내를 내는 철학자가 되었겠죠. 한국에는 그런 철학자들이 득시글합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철학자와 도사는 대적(vs)하는 관계가 아니라, ‘철학자=도사’인 거죠.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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