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의 넓이〉
이문재 지음
창비 펴냄

〈혼자의 넓이〉(창비, 2021)는 이문재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이죠. 그의 시는 점점 묵시록이 되어갑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었다/ 한때 다들 그 섬에 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섬에 가본 사람이 없었다/ 애초에 섬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사이 다른 것이 들어섰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스마트폰이 있었다/ 아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 스마트폰이 있지 않았다/ 스마트폰과 스마트폰 사이에/ 사람이 있었다 아니/ 스마트폰 안에 사람이 들어가 있었다”(‘사람’).

인간의 종말을 불러오는 것은 과학기술 산업·소비주의·방사능·생태 위기·기후 위기다. 이것들은 인과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원환이죠. 그 속에서 우리는 편안해요. “탈이 났는데도 아프지 않은 우리 개인들/ 경제적으로 성난 동물이 된 우리 소비자들/ 세련되게 나약해진 우리 혈기 왕성한 괴물들”(‘녹슬었다’). 하지만 누구나 혈기 왕성하지는 않다. 저 둥근 고리 바깥에 누가 있다. “기역자로 굽은/ 할머니가 밀고 가는/ 낡은 유모차// 옹알옹알 아기 대신/ 젖 잘 나오는 유모 대신/ 할머니가 온종일/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는 건/ 종이박스 폐휴지 소주병 맥주병/ 박카스병 활명수병 생수병/ 반지하 독거노인에겐/ 유모차가 전 재산/ 손자 손녀 없는 유모차가/ 곁에 남은 유일한 피붙이”(‘유모차’). 할머니가 손주 대신 재활용 쓰레기만 가득 찬 유모차를 힘겹게 끌고 가는 이 풍경은 끔찍한 묵시록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집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종말론자들이 퍼트린 묵시사상(종말사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이 세계는 점점 더 악해질 것이며, 세계는 파멸로 끝나도록 계획되어 있다고 한다. 이처럼 비관주의적이고 결정론적인 역사 이해에는 인간의 의지가 끼어들지 못하죠. 이러한 묵시사상은 세계에 대한 무관심과 무감각을 조장하며, 원래의 종말론에 숨어 있는 세계 변혁의 정신(유토피아)을 포기해요. 그런 뜻에서 〈혼자의 넓이〉는 종말론자들의 그것과 다르다. 시인은 “맨 끝에서 다시 시작하는/ 맨 끝에서 처음으로/ 다시 태어나는”(‘분수’) 전환의 묵시록을 노래하죠. 그러는 그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그런 전환이 ‘혼자’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우리를 가둔 원환은 결코 홀로 있음을 용납하지 않으려 하기에, 시인은 “혼자 있음이 넓고 깊어”(‘혼자 울 수 있도록’)져야만 비로소 유모차를 끄는 독거노인도 만날 수 있다고 역설적으로 말하는 거죠.

“나는 저 큰물 기슭이 좋아서”

장혜령의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문학동네, 2021)는 시로 등단했지만 〈진주〉(문학동네, 2019)라는 소설부터 내놓았던 작가의 첫 번째 시집이다. 한국 시는 2000년대 이후 산문화되는 것을 넘어 아예 소설을 닮아왔는데, 이 시집의 1~3부에 실린 꽤 긴 시들이 그런 경향을 반영하죠. 시인의 등단작이자 이 시집의 맨 앞에 실려 있는 〈눈의 손등〉은 세 겹의 플롯으로 구성되었다. 이 시에 처음으로 발을 다친 여자가 나오는데, 이 시집에는 “발 없는 것들”(‘시리아의 유령들’)이 자주 출몰하죠.

시집 제목을 이루는 ‘발이 없는 여인’은 신체적 결손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환유적으로는 실 잣는 여인이나 베 짜는 여인을 일컫는다. 오랜 붙박이 노동이 그들을 발이 없는 여인으로 만들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들이 진짜로 하는 일은 실을 잣고 베를 짜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일이다. 신화와 민담 속에서 이들은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죠. 실 잣는 노래와 베 짜는 노래가 형식상 노동요이면서 노랫말이 온통 누군가를 기다리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 이유다. 롤랑 바르트가 말했듯이 기다림은 노래를 하게 만들고 시를 쓰게 하죠.

ⓒ이지영 그림

〈진주〉에 따르면, 민주화 운동가였던 시인의 아버지는 시인이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꽤 오랫동안 영어 생활을 했다. 아버지를 체포하러 온 형사가 어린 딸에게 말했죠. “얘야, 창문은 없고/ 거울만 있는 방에 갇히면 누구나/ 입 밖으로 손 내미는/ 자신의 비명을 보게 되지/ 아무도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런데도 기다릴 거니”(‘낙하하는 온점’). 시인이 애용하는 무채색(無彩色)과 온갖 결핍의 기호들은 유년을 지배했던 상실의 체험과 관련되어 있다. 시인은 그 부재를 향해 “당신은 오지 않고, 당신은 비에 젖어가는 옷깃. 지금쯤 어느 골목을 헤매입니까”(‘파도가 묻다’)라고 간절히 묻는다. “누가 올까. 누군가 오긴 올 거야. 너는 스스로 묻고 답한다”(‘눈 한 송이와 눈 한 송이 사이’). 그 대답이 등단작과 같은 중층적인 이야기를 낳았다.

함성호의 〈타지 않는 혀〉(문학과지성사, 2021)는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이다. 중국 불교에 약간이라도 상식이 있는 독자라면 이 시집의 제목이 구마라집의 유언에서 나온 것이라는 걸 눈치 챘을 테죠. 파계를 두 번이나 했던 그는 10여 년간 여색에 빠진 상태로 불경 번역에 매달렸고, 죽으면서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내가 번역한 경전에 잘못이 없다면, 내 몸을 화장한 후에도 혀만은 타지 않을 것이다.” 그가 죽은 후 다비식을 했는데 과연 혀만은 끝까지 타지 않았다죠. 구마라집의 일화는 성속을 함께 살아야 하는 시인의 처지를 일깨운다.

현대시는 한마디로 도시 현상이죠. 도시가 없었다면 현대시도 없었다는 뜻이다. 현대시가 도시 현상이 되면서 산책자(현대 시인)가 탄생했죠. 현대시의 미학 원칙은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을 추출하는 거였다. 반면 본래의 시인들은 산책자가 아닌 순례자였죠. 그들이 추구하고 동경한 것은 영원불변한 것이었다. 함성호는 그런 뜻에서 순례자죠. “나는 얼음으로 만든 배를 타고/ 죽은 자들의 섬/ 푸른 유리섬으로 들어가네”(‘시베리아 블루’), “나는 유리배를 타고 은하수를 흘러가네/ 소용돌이치는 성단을 지나 모든 빛들의 무덤으로”(‘초월나비’), “위태로운 바다로/ 종이배를 타고/ 노 젓는 노도 없이”(‘그리운 적막’). 예시된 시구들은 시인이 순례자이면서 우주를 떠돌고,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무속적 주체임을 암시한다.

무속적 주체인 시인은 몇몇 시에서 망자의 혼인 양 노래했죠. “나는 저 큰물 기슭이 좋아서/ 저 큰물 기슭으로 가보았습니다/ 혼자 저 큰물 기슭에서 저 큰물 기슭으로/ 홀로 저 큰물 기슭에서 저 큰물 기슭으로”(‘못 돌아오는’). 네 개의 연으로 된 이 주술적이고 점층적인 시는 과학기술 산업·소비주의·방사능·생태 위기·기후 위기로 찌든 문명과 거기에 더께처럼 붙어 사는 인간의 탐진치(貪瞋痴)를 씻어준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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