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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분노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평소 정의는 공정한 분배 원칙으로 작동한다. 사건이 발생하면 정의는 피해자를 구제하고 가해자를 처벌한다. 손해도 배상하게 한다.

이 과정은 감정의 개입 없이 이루어진다. 특히 분노라는 감정 없이 진행된다. 분노는 뜨거운 쇳덩이와 같아서 상대방에게 던지려고 손에 쥐면 먼저 자신이 다친다. 나도, 상대도, 사회도 다친다. 모두가 다치는 것이 정의일 리 없다. 분노가 지배하면 정의는 사적 복수가 된다. 이런 이유로 정의는 개인이 아니라 국가가 실현한다. 정의는 분노를 배제하면서 복수라는 오명에서 벗어났다.

이 자명한 이치가 위기를 맞고 있다. 정의가 분노를 정당화하는 것인 양 행동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디지털교도소를 둘러싼 논쟁이 첫 번째 사례다.

디지털교도소는 성범죄자에 대한 사법부의 제재에 불신을 갖고 성범죄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겠다며 시작했다. 사적 제재다. 하지만 아무리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법이 정한 처벌 이외의 처벌을 받아서는 안 된다.

사과를 강요받아서도 안 된다. 존엄성이 있기 때문이다. 처벌을 받은 이후 모든 사람은 사회로 복귀해야 한다. 디지털교도소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다. 정의가 충분히 달성되지 않았다고 본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것은 정의가 아니라 정의로 포장된 개인의 분노일 뿐이다. 정의가 분노를 정당화한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사례는 조두순 사태다. 조두순은 2008년 여덟 살 어린이를 성폭행하고 영구적인 장애를 입힌 혐의로 12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이다. 조두순은 오는 12월13일 출소 예정이다. 그가 사회 복귀를 할 때가 되자 일부 사람들은 출소를 막아달라는 청원을 냈다. 안산시장은 아동 대상 성범죄 사범에 대한 ‘보호수용법’ 입법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조두순이 잔혹범죄를 저지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용서받기 어렵다. 하지만 법이 정한 처벌을 모두 받은 이상 조두순을 다시 처벌할 방법은 없다. 잔혹범죄를 막기 위해 범죄자를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하는 것, 즉 사형에 처하는 것은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처벌일 뿐이다. 정의라고 주장하지만 그 바로 밑에는 분노가 있다. 조두순은 형벌을 통해 교화되었을 수도 있다. 만일 교화되지 않았다면 재범을 방지할 방법을 고안하면 된다. 무조건적인 배제는 정의가 아니다.

정의에 대한 우리들의 오해가 분노를 정당화한다. 나는 항상 옳고 상대방은 항상 틀리다는 생각, 이 사실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무지가 정의와 분노를 결합시킨다. 나는 옳기 때문에 화를 내도 되며, 상대는 틀렸기 때문에 화를 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존엄하면서 평등하다. 내가 옳을 수도 있지만 상대방도 옳을 수 있다.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으면 나도 존중받지 못한다. 사람은 누구나 약점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 사회적 약자가 될지 모른다. 내가 사회적 약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 사람들은 서로 의존하면서 지낸다. 다른 사람을 가혹하게 대하면 그 영향은 반드시 나에게 돌아온다.

정의도 분노를 정당화하지 못한다

두 가지 대비되는 사례를 소개한다. 시대는 다르지만 두 사례 모두 아버지를 살해한 사람에 대한 태도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사람 오자서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를 도와 초나라를 공격했다. 그는 원수인 초나라 평왕이 죽은 것을 확인하자 무덤을 파헤쳐 시체에 쇠채찍질 300번을 했다. 미국의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은 아버지가 강도에 의해 살해당한 후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살인자가 체포된다면 사형시키고 싶은지 질문을 받았다. 이때 그는 슬프게 대답했다. “왜요? 그런다고 아버지가 살아오시는 것도 아닌데요.”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정의도 분노를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기자명 김인회 (인하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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