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제도는 법률과 기구로 구성된다. 법률로 아무리 촘촘하게 견제와 균형 시스템을 마련해도, 권력기관을 감시하는 기구를 만들고 또 만들어도 민주주의는 보장되지 않는다. 비슷한 헌법과 법률, 비슷한 기구를 가진 나라들의 민주주의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미국과 남미 여러 나라의 헌법은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민주주의 수준은 큰 차이가 있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다. 역사와 전통, 문화와 윤리, 시민의식 등도 있다. 이들 요소는 근본적인 영향력을 미친다. 그렇지만 그만큼 간접적인 한계가 있다. 민주주의에 직접 영향을 주는 요소로 상호 관용과 자제의 규범이 있다.

상대방을 타도해야 할 적으로 보지 않고 애국심을 가진 국가 경영의 건전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것, 이것이 관용이다. 민주주의에서는 언제든지 다수가 소수가 되고 소수가 다수가 될 수 있다. 어제의 야당이 오늘의 여당이 되고 오늘의 여당은 내일의 야당이 될 수 있다.

다수와 소수, 여당과 야당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정권의 정당성은 출범의 정당성만이 아니라 통치의 정당성도 포함한다.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으면 대화와 타협이 없다. 대화와 타협이 없으면 민주주의는 없다.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서는 상호 관용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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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제는 권한을 극단적으로 행사하지 않는 것이다. 국가기관의 권한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지만 그 경계는 모호하다. 권한은 항상 중첩된다. 권력의 공백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한의 중첩은 자칫 국정의 마비를 초래하기도 한다. 사면권은 대통령의 권한이지만 이를 극단적으로 행사하면 사법부는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대법관 임명 동의권은 국회의 권한이지만 이를 극단적으로 행사하면 대통령의 임명권은 유명무실해진다. 대통령과 장관에 대한 탄핵 발의는 국회 권한이지만 이를 남용하면 국정은 마비된다. 불법만 아니면 된다는 주장은 과도한 권한 행사로 인한 국가기관의 충돌을 낳는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권한도 중복된다. 원래 검찰 업무는 법무부 업무다. 하지만 수사의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외청으로 검찰청이 설립되었다. 구조적으로 법무부와 검찰은 권한이 중복된다. 법무부가 자신의 권한을 극단적으로 행사하고 검찰 역시 권한을 극단적으로 행사하면 국가의 법무행정, 검찰행정은 마비된다. 검찰의 수사 중립성은 위기에 처한다. 권한이 중복되어 있어도 현실에서 법무행정, 검찰행정이 이루어지는 것은 서로 자제하고 협조하기 때문이다.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권한대로라면 탄핵을 둘러싸고 국회와 대통령이 대립할 수도 있지만 이런 경우가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 것은 역시 자제의 미덕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자제는 관용과 함께 현대 민주주의의 필수 요소다.

관용과 자제를 위태롭게 하는 논리

관용과 자제, 대화와 협력이 점점 사라지는 시대다. 관용과 자제를 위태롭게 하는 배경에는 양극화가 있다. 양극화로 지지자들만 바라보는 정치와 정책이 등장하고 있다. 상대방 무시와 극단적 권한 행사로 갈등은 폭발한다.

트럼프 등장 이후의 미국 사회를 관찰한 후,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썼다. 이들은 상호 관용과 자제의 규범이 무너지면서 미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고 진단했다.

관용과 자제를 위태롭게 하는 논리는 단순하다. 상대가 먼저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의 불관용과 권한 남용이 나의 불관용과 극단적 권한 행사를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불관용과 권한 남용을 끝내려면 남이 아닌 자신에게서 열쇠를 찾아야 한다.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상대방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다. 관용과 자제라는 훌륭한 덕목을 실현하는 수준 높은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사람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기자명 김인회 (변호사·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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