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기회다 - 행복한 방구석 ① 미야베 미유키 전작

김홍민 북스피어출판사 대표가 미야베 미유키의 전작 도전을 제안한다. 읽고 있을 때는 정신없이 빨려 들어가 다른 일을 할 수 없도록 하고, 읽지 않는 중간에는 얼른 다음 대목을 읽어야 할 텐데 조바심치게 만드는, 사소한 놀라움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미야베 미유키 작품의 매력을 설명한다. 

 

 

사회파 미스터리 장르에서 가장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작가 미야베 미유키.

“이상적인 미스터리란 설사 마지막 부분이 없어져도 읽게 되는 작품이다.” 레이먼드 챈들러를 인용했지만, 정말이지 그런 소설들이 있다. 읽고 있을 때는 정신없이 빨려 들어가 다른 일을 할 수 없도록 하고, 읽지 않는 중간에는 얼른 다음 대목을 읽어야 할 텐데 조바심치게 만드는. 요컨대 사소한 놀라움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미스터리 소설들은 일반적으로 대저택의 밀실 같은 클로즈드 서클(Closed Circle)에서 예상하기 힘든 살인 사건이 벌어지면 비범한 재능을 지닌 탐정이 해결한다는 패턴으로 진행되었다. 인간의 죽음을 수수께끼 풀이 게임으로 만들어 독해 작업에 열중시킨 이 장르를 ‘본격’이라는 말로 정의한 사람은 소설가 고가 사부로인데, 본격 미스터리에서는 마지막에 의표를 찔러 놀라게 할수록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좀 더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작가들이 작위적인 설정을 남발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현실과 양립하기 어려운 트릭의 틀을 벗어나 리얼리티를 부여하고자 했던 시도로 미국에서는 레이먼드 챈들러로 대표되는 하드보일드가, 일본에서는 마쓰모토 세이초가 기틀을 세운 사회파 미스터리가 인기를 끌었다.

국적이나 활동한 시기로 볼 때 챈들러와 마쓰모토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다만 이들의 작품은 선배 세대의 기류를 거부하려는 측면이 강했다. 코난 도일과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들은 기교에 치우쳐 있고 엘리트주의적이라는 것이 챈들러의 불만이었다. 마쓰모토는 퍼즐 같은 유희로 전락해버린 본격 미스터리에 진저리가 난다고 적었다. 그가 지극히 현실적인 설정을 출발점으로 삼아 범죄가 일어나게 된 사회적 동기를 추적해가는 사회파 미스터리의 시초가 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마쓰모토 세이초.

젠더의 벽 따위, 이제 낡은 이야기지

“일단 미스터리 소설의 세계에 발을 디디면, 하늘에 언제나 태양이며 달이 있듯이 거기엔 ‘마쓰모토 세이초 작품군’이 있었습니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세례를 받지 않고 미스터리 소설을 쓰는 젊은 작가는 단 한 사람도 없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습니다.” - 미야베 미유키, 〈문예춘추(文藝春秋)〉 1992년 임시 증간호

현재 세이초가 만든 사회파 미스터리 장르에서 가장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를 한 명만 꼽으라면 단연 미야베 미유키라 하겠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본명은 야베 미유키다. 데뷔하기 직전에 고단샤의 편집자로부터 “제대로 된 펜네임을 정하세요. 특이한 이름보다는 독자가 기억하기 쉬운 것으로”라는 조언을 듣고 이름 짓는 법이 담긴 책을 구입하여 끙끙대며 정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영화광이었다. 닥치는 대로 보다가 좋은 영화를 발견하면 반드시 딸에게 권해주었다. 히치콕이 만든 영화를 특히 좋아했다.

소설을 쓰기 전에는 고등학교 졸업 후 평범하게 직장 생활을 했다. 속기사로 일하다가 법률사무소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때 강연회나 판례·연설 등의 녹취록을 문자로 바꾸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일에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창작 강의를 수강하게 된다. 고단샤 페이머스 스쿨즈 안에 설립된 소설 교실이었다. 강사는 주로 현직 소설가들이었지만 고단샤의 편집자들도 집필에 필요한 이런저런 실무 강의를 해주어서 도움이 되었던 모양이다. 이곳에서 기초를 다지며 세 번을 투고한 끝에 〈우리 이웃의 범죄〉로 ‘올 요미모노 추리소설 신인상’을 받았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 살 때다. 1989년에는 〈마술은 속삭인다〉로 일본 추리 서스펜스 대상을 받으며 “전후 엔터테인먼트 문학계에 느닷없이 나타난 귀재” “무엇을 써도 걸작을 만들어내는 터무니없는 작가”라는 찬사를 듣는다. 평론가 가타가미 지로는 이 작품을 두고 “지금부터 미스터리를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당신, 이것으로 입문하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대로 책 띠지의 카피가 되었다.

레이먼드 챈들러.

〈마술은 속삭인다〉는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순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는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10’에 대항해서 만들어진 상이다. 기성 작가보다는 경력이 일천한 작가들의 작품을 우선 눈여겨본다는 특징이 있으며, 추리뿐만 아니라 어드벤처나 SF를 기반으로 한 소설도 두루 선발한다. 미야베 미유키는 상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보다 다른 의미로 더 기뻤다며 〈소설신조(小説新潮)〉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상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미스터리계에서 여성 작가는 오로지 여성의 심리를 메인으로 그린 미스터리나 연애물 같은 것만 쓰면 된다’는 분위기가 있었고, 작가 자신도 그런 주박에 씌워져 있었습니다. 그때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가 등장한 거예요. 이 랭킹은 바깥쪽에서 ‘젠더의 벽 따위, 이제 낡은 이야기지’ 하고 무너뜨려버렸다고 할까요. 성별에 상관없이, 작가라면 무엇이든 좋아하는 것을 써도 괜찮다며 지지해준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미스터리계의 여성 작가를 젠더에서 해방시켰다는 점에서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의 공적은 말 그대로 대단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엄청난 공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목청껏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무렵 미야베 미유키는 발간 부수만 놓고 보면 고만고만한 작가에 불과했다.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 초판은 3000부,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 신인상을 나란히 함께 수상한 나카지마 라모의 수상작 〈오늘 밤 모든 바에서〉가 수상식 당일까지 21만 부 넘게 팔렸다고 하니 얼마간의 초조함도 느꼈으리라. 그러던 중 〈화차〉로 야마모토 슈고로 상을 수상하며 입지가 급상승한다. 신용카드 사용자의 증가와 함께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었던 도요타 상사 사건(현물 모조 수법을 통한 신용 사기를 저질러 그 피해자가 수만 명에 이르고 피해액이 2000억 엔에 달한 거대 사기 사건)에서 얻은 모티브를 통찰력 있게 풀어간 〈화차〉는 출간과 동시에 주목을 받았다. 이후로 그는 ‘개인의 경제권과 사회구조’를 이야기의 밑바탕에 두고 이를 반복해서 문제 삼는다.

〈화차〉는 변영주 감독이 동명의 작품으로 영화화했다.

〈화차〉를 통해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오른 미야베 미유키는 1998년에 처음으로 전국지 연재를 시작한다. 이때 〈아사히신문〉에는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를 배경으로 부동산 버블을 다룬 〈이유〉를, 〈주간포스트〉에는 연쇄살인범을 쫓아 범죄의 본질에 대해 파헤친 〈모방범〉을 동시에 연재했다고 하니 대단하다. 아니, 대단하다는 말로는 모자라다. 믿어지지 않는다고 할까. 두 작품 모두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엄청난 성취였기 때문이다. “현대 일본의 빛과 어둠을 드러내고 사회와 인간을 폭넓게 그린 발자크적인 작업”이라는 나오키 상 심사위원들의 평가가 결코 과하지 않다. 그러나 거대한 이야기를 연거푸 쓰면서 밸런스가 무너졌던 탓에, 얼마간 시대물에 몰두하다가 새롭게 선보인 소설의 스케일은 직전의 작품과 달리 작고 소박했다. “저 자신도 시리즈를 하나 가지고 싶었어요. 하지만 제 성격으로는 엄청 멋지다든가, 특수한 능력이 있다든가, 천재라든가 하는 캐릭터는 도저히 그릴 수 없어요. 사람이 좋고 성실하고 자식을 끔찍이 아끼는 샐러리맨이라는 설정이 제 분수에는 맞는 게 아닐까 하고. 앞으로 현대물은 이걸 기본으로 해서 무언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시리즈로 써보자고 결정했습니다.”

탐정소설에 흔히 나오는 명석한 탐정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건과 조우해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작가의 바람에 따라 태어난 것이 ‘행복한 탐정’이다. 야마나시현의 농가 출신인 스기무라 사부로는 낯선 남자에게 추행당할 뻔한 재벌가의 딸을 구해준 인연으로 결혼까지 하고 대기업 총수인 장인의 회사에 입사해 사보 편집자로 일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장인의 지시로 장인 차를 몰던 운전기사의 죽음을 조사하며 어설픈 탐정 흉내를 내다가 급기야 탐정으로 전직한다는 것이 전반적인 내용이다. ‘행복한 탐정’ 시리즈를 통해 작가는 일상의 부조리한 일면에서 눈을 떼지 말고 직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 때문에 타인을 해치려는 자들과 끊임없이 대결해나가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성실한 사람들을 위하여. 일본에서 최근에 출간된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에는 탐정으로서 제2의 인생을 살기 시작한 그가 자신에게 지워진 무게를 새삼 절감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하지만 스기무라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지 않는다. 그게 바로 이 동네 탐정의 멋진 점이다.

“에도 시대는 사람의 목숨을 간단히 뺏을 수 있는 시기였기 때문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연대감이 강했습니다. 제가 에도 시대물을 계속 쓰고 싶어 하는 이유는, 그렇게 따뜻한 인간의 정이 있는 사회를 향한 동경 때문입니다. 작은 것도 함께 나누고 도와가며 살았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전하고 싶습니다.” - 미야베 미유키, 〈외딴집〉 작가의 말 중에서

미야베 미유키는 평론가 나와타 가즈오와 대담하면서 “현대물과 시대물 중 어느 쪽부터 먼저 쓰기 시작한 겁니까?”라는 질문에 “매우 드문 일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지만 거의 동시에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 습작이 시대물이었으니까요. 단지 저의 경우, 흔히 생각하는 시대물의 전형보다는, 미스터리 안의 ‘도리모노초’라는 느낌이지만요”라고 대답한 바 있다. ‘도리모노초’란 일본 시대물의 주류 장르 가운데 하나이며 주로 에도를 무대로 한 탐정소설을 말한다. 시대물과 미스터리를 융합한 도리모노초라는 장르는 오카모토 기도의 〈한시치 체포록〉에서 시작되었는데, 미야베 미유키는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주로 파헤치는 현대물을 쓰다가 마음이 무거워지면 기어를 바꾸어 시대물을 집필하며 균형감각을 잡아나간다고 한다. 시대물의 경우 불가사의한 사건을 거론하거나 초자연적인 기교를 부리기가, 즉 작가가 마음 내키는 대로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하기 때문이다.

자료 수집에 기반한 기상천외한 상상력

그렇다고 고증도 없이 상상력만으로 쓴다는 얘기는 아니다. 시대물을 집필하기 전에 철저히 자료를 수집하고 관련 분야의 전문가를 찾아가 과외를 받았다는 사실은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지만, 온다 리쿠와 기타무라 가오루를 비롯하여 친분이 있는 작가들과 오랫동안 역사 스터디를 해왔다는 건 꽤 유명한 일화다. 그와 같은 노력이 헛되지 않아, 어느 하급 무사가 전당포에서 우연히 손에 넣게 된 검이 밤마다 울며 사건을 예고한다는 내용의 〈말하는 검〉으로 제12회 역사문학상을 수상하며 평단의 인정을 받는다. 이듬해 발표한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는 혼조의 일곱 가지 불가사의를 다루어 제13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한 연작소설로, 미야베 미유키가 요괴나 초능력이 실재함을 전제로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방식에도 능하지만 무엇을 쓰든 그 근저에는 따뜻함 혹은 인정이 자리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흔들리는 바위〉와 〈미인〉은, 〈말하는 검〉에서 활약한 오하쓰가 등장하는 장편소설이다. 오하쓰는 보통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보통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이 들리는 영험한 능력을 가진 소녀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이용하여 오캇피키(절도죄로 옥에 갇혔다가 나온 뒤에 포도청에서 포교의 심부름을 하며 도둑 잡는 일을 거들던 사람)인 오빠를 도와 사건을 해결해나간다. 두 작품 모두 〈미미부쿠로〉라는 기담집의 내용을 차용하고 있다. 〈미미부쿠로〉란 ‘소문을 모아 수집한 이야기 주머니’라는 뜻으로 에도 시대의 기이한 이야기를 모은, 우리로 치면 ‘전설의 고향’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전부 10권에 1000편의 기담이 담겨 있는데 이 중 〈흔들리는 바위〉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기이한 돌’을, 〈미인〉은 ‘오래 살아서 사람의 말을 배운 고양이’를 모티브로 삼았다.

등장인물의 심리를 파고드는 필치와 더불어 에도 시대 음식에 대한 묘사가 점점 더 노련해지고, 보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보이고 듣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듣고 마는 자신이 때때로 슬픈 오하쓰의 운명이 점점 궁금해지는 가운데 작가는 차기작인 〈메롱〉에서, 구원이란 초능력을 지닌 외부의 존재가 주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다른 이들과의 유대를 통해 만들어가는 것임을 절절하게 그려낸다. 이 때문에 ‘마경’이나 ‘미늘 갑옷’ 같은 일종의 신물(神物)을 사용하여 ‘괴이’를 잠재우는 패턴은 이후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리 음침한 사건을 그린다 해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마음속 어둠을 마구 발산시킨다 해도, 미야베 미유키가 결국 희망을 그리면서 인정 넘치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이미 얘기한 바 있다. 그런데 〈얼간이〉에 이르러 이 같은 기조가 미묘하게 변한다. 〈얼간이〉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 단편 단편이 연결되며 중반까지 인정 어린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의외의 형식으로 연결되는 중반 이후가 되면 범죄에 손을 물들였는데도 흔들림 하나 없는 ‘범인’과, 범인의 실체를 다 알면서도 숨겨주는 주인공의 모습이 묘사되며 씁쓸한 뒷맛을 남긴 채 막을 내린다.

〈얼간이〉가 나온 직후 인간 말종에 가까운 범죄자 ‘피스’를 주인공으로 한 현대물 〈모방범〉이 출간되었으니, 확실히 세기가 바뀌는 시기에 간행한 〈얼간이〉는 미야베 미유키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이는 〈얼간이〉의 후일담이 되는 〈하루살이〉에서 좀 더 분명해진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고민하는 자, 마음에 상처를 입은 자 모두를 구하려 하지 않는다. 타인의 어리광을 받아주거나 상처를 핥아주는 것은 진정한 인정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라는 도피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냉철한 인식 덕분에 〈외딴집〉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외딴집〉은 한 줌도 안 되는 위정자들이 정보를 틀어쥔 채, 위기에 빠진 번(고장)의 존속을 위해 번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불합리한 희생을 강요하는 조직의 비정함을 리얼하게 그려내 ‘시대물의 끝판왕’이라 불린다.

현재 미야베 미유키가 가장 열중하고 있는 작품은 ‘라이프 워크(필생의 사업)’라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던 미시마야 시리즈다. ‘우리는 왜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입고 또 상처를 주는가’라는 운명철학적 질문을 괴담이라는 소재로 증폭시켜 완성한 〈흑백〉을 탈고할 당시 “이건 한 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100화까지 쓸게요”라고 말해 담당 편집자를 기함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흑백〉부터 〈금빛 눈의 고양이〉까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달려온 미시마야 시리즈의 여섯 번째 이야기도 올해 일본에서 발매되었다. 새카만 불을 뿜어내는 화산의 그림이 걸린 어느 저택의 큰 방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는데 한국에는 오는 8월에 번역, 소개될 예정이다.

봉준호 감독님, 여기 좀 봐주세요!

글을 마무리하려다 보니 문득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다. 나는 2007년에 월간 〈판타스틱〉이 미야베 미유키를 만날 때 관여했고, 2012년과 2015년 직접 그를 찾아가 인터뷰한 적이 있다. 흥미롭게도 세 번의 만남에서 한결같이 “〈살인의 추억〉을 보고 봉준호 감독의 팬이 되었다. 내 소설도 그가 영화로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라는 얘기를 들었다. 자신의 작품이 일본에서 몇 번인가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마음에 드는 작품이 단 하나도 없었다면서. 미야베 미유키는 단순히 인터뷰에서 애정을 피력하는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칸 영화제가 열렸을 때, 봉준호 감독이 묵고 있는 호텔로 자신의 영화 에이전시 팀을 보냈다. 취재차 영화제에 참가한 허남웅 기자에 따르면 “수소문 끝에 칸까지, 그것도 숙소까지 찾아온 그들의 정성에 마음 약한 봉준호 감독이 차마 거절 의사를 밝히지 못하고 기회가 되면 다시 한번 이야기해보자”라며 돌려보냈단다. 이후로 미야베 미유키는 〈괴수전〉을 발표하며 “저는 괴수물을 무척 좋아하고 울트라 시리즈도 전부 보고 자란 세대여서 언젠가 괴수물을 쓰자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쓰면 좋을지 몰랐어요. 시행착오를 거듭하다가 봉준호 감독의 〈괴물〉에서 힌트를 얻어 ‘괴물이 날뛰는 이야기’를 쓸 수 있었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쯤 되니 봉준호 감독도 약간 궁금해졌는지 〈괴수전〉을 구입한 모양이다. 봉 감독의 단골집이자 북스피어출판사 근처에 있는 카페홈즈의 주인장이 문자를 보내준 덕분에 나도 알게 되었다. “북스피어 사장님, 안녕하세요? 카페홈즈에 오신 봉준호 감독님이 미야베 미유키 작가님의 〈괴수전〉을 사가셨습니다. 왠지 미미 여사님이 기뻐하실 듯하여 알려드려요.” 하지만 아직 봉준호 감독이 미야베 미유키 작가의 원작에 관심을 보였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독보적인 사회파 작품을 지향하는 만큼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자극도 적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떨지. 〈시사IN〉 정도 되는 매체라면 봉준호 감독도 읽지 않을까 싶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적어본다.

기자명 김홍민 (북스피어출판사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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