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님 왈, “거기서 고기잡이 했으니 너는 간첩이다”
  • 김형민(SBS CNBC PD)
  • 호수 638
  • 승인 2019.12.13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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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바다와 싸우며 고기 잡아 가족을 먹여 살리던 어민들은 납북된 뒤 졸지에 ‘간첩’ 또는 ‘반공법 위반자’ 아니면 최소 ‘요시찰 대상자’로 전락했다.
ⓒ연합뉴스2009년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납북 귀환 어부 박춘환씨(왼쪽)와 그의 친구 임봉택씨가 만나 화해했다.

1953년 7월27일 지리한 협상 끝에 한국전쟁 휴전협정이 맺어졌어. 육지와 바다는 또 달랐다. 육지에는 철책이라도 세울 수 있지만 바다에는 그럴 수도 없지 않았겠니. 이 애매한 바다 위에서 남북은 칼날같이 맞섰고, 그 역사에서 가장 큰 희생양으로 남은 사람들은 바로 바다에서 고기 잡으며 삶을 일구던 어민이었어. 남한 어민들은 상당 기간 상대적 우위를 보였던 북한 해군의 손쉬운 표적이 되었지. 휴전 이후 지금까지 북한 해군에 끌려간 남한 어민의 수는 무려 3700여 명, 그중 466명이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했다고 해(〈동아일보〉 2019년 3월8일).
 
1960년대 후반, 북한 해군은 무시로 뚜렷한 경계선 없는 바다를 넘나들며 우리 어선들을 나포하기 시작했어. 자신들의 영해를 침범한 어선들을 단속한다는 뜻도 있었겠지만 그들을 통해 남한의 정보를 수집하고 어민들을 북한의 협조자로 만들겠다는 의도도 드러냈지. 1967년 12월26일 치안국 발표에 따르면, 그해에만 어선 39척과 어민 339명이 납북됐어. 그리고 이듬해인 1968년, 울진·삼척 지구에 대규모 무장공비들이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남한 당국은 해안 지역 정보가 납북 어민에 의해 북한에 들어간 것으로 파악하고 바짝 긴장해서 상황을 주시하기 시작했지. 이 살기 어린 남과 북의 고래가 격돌하는 사이에 낀 새우들이 바로 납북 어민들이었고, 대한민국 검찰은 허리 꺾인 새우들을 쓸어 담는 촘촘한 그물이 된단다.

“(동해 어로저지선 근해에서) 1200척의 어선이 작업하는데 경찰 경비정은 두 척, 어로 지도선도 두 척(〈경향신문〉 1967년 12월26일)”이었던 빈약한 나라는 북한 해군에 납치된 자국 국민을 두고 “반공법과 수산업법 위반 혐의”를 묻기로 한다. 심지어 1973년 9월12일 대법원은 납북 어민에게 탈출죄는 인정하되 국가보안법상 간첩 혐의 등은 무죄로 본 고등법원 판결을 되돌리며 이렇게 말했어. “어로저지선 부근에서 조업을 하면 북한 경비정에 납치될 수 있다는 미필적 예측이 인정돼야 하는데 원심이 이를 배척한 것은 잘못이다.” 쉬운 말로 해석하면 “납북될 수도 있는 사정을 알면서 거기서 고기잡이 하다니 너는 간첩이다”라는 얘기야.  
 
법원이 이 지경이었으니 검찰은 한술 더 뜰밖에. “대검찰청은 (납북된 후) 귀환한 어민들 중 신고하지 않거나 위장 신고한 어민들에 대해 간첩죄와 반공법(제6조 4항 탈출, 잠입)을 적용, 사형을 구형하도록 각급 검찰에 지시했다(〈경향신문〉 1968년 12월24일)”라고 하니 그 살기를 짐작할 수 있겠지. 1969년 당시 춘천지검 강릉지청 임상현 검사는 대검찰청 기관지 〈검찰〉에 기고한 ‘납북 어민의 죄책’이라는 논문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어. “납북은 어민 개인의 안전에 관한 문제가 아니며 ‘안보상의 문제’로 여겨야 한다. 북한의 의도를 봉쇄하기 위해서는 납북의 원인이 되는 어민의 월선 조업 행위를 억제할 필요가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 귀환자에게는 종전의 ‘관용’이 아니라 ‘엄벌’로 임할 수밖에 없다.” 북한이 잘못했으면 북한에 뭐라고 해야 할 텐데, 자국 국민을 잡아 족치겠다는 사람들을 제정신이라 할 수 있을까.
 
거친 바다와 싸우며 고기 잡아 가족을 먹여 살리던 어민들은 납북된 뒤 졸지에 ‘간첩’ 또는 ‘반공법 위반자’ 아니면 최소 ‘요시찰 대상자’로 전락했다. 간첩으로 몰린 사람들은 별의별 혐의를 뒤집어쓰고 희한한 ‘공작도’의 주인공이 되어 사람으로는 참아내기 어려운 고문과 턱없는 징역을 받거나 심하면 교수대에 오르기도 했어. 극심한 냉전 반공의 전성시대에 ‘간첩’이란 그 본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온 가족이 왕따를 당하고 수모를 겪고 툭하면 끌려가서 두들겨 맞는 건 예사였고, 그 주변 친구들까지도 봉변을 당하는 일이 흔했어.

“재주도 좋다. 어떻게 검찰총장까지….”

1968년 봄, 군산 앞바다의 개야도에 사는 어민 박춘환은 연평도 근처에서 고기잡이하다가 북한에 끌려갔어. 몇 달 뒤 돌아왔지만 반공법 위반 혐의로 옥살이를 했고 이후로도 엄청난 감시에 시달리다가 1972년 다시 경찰서에 끌려갔지. 무작정 두들겨 패면서 자신도 모르는 걸 자백하라는 경찰 앞에서 박춘환은 북한에서 가져온 책을 친구들에게 주며 ‘포섭’하려 했다며 경찰이 원하는 대답을 하고 말았어. 이 때문에 납북 경험도 없는 친구 임봉택이 걸려들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 군산경찰서에서 보름 넘게 두들겨 맞다가 검사에게 불려간 임봉택은 그 뒤 50년이 지나도록 자신을 수사하던 경상도 사투리의 검사를 잊지 못해. 첫마디는 “니 학교 어데 나왔노.” 임봉택이 “국민학교는 나왔습니다” 하니, 검사는 “그라모 한글은 알겠네” 하며 법전을 펴 주고 읽으라고 했다는구나.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것은 ‘불고지죄’. 정황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죄였지.
 

ⓒ연합뉴스불고지죄 혐의로 임봉택씨를 구속 기소한 김기수 검사는 1995년 검찰총장에 임명됐다.

검사는 윽박질렀어. “봐봐, 이 자식아. 불고지죄라 하는 것은 이북에 대한 박춘환이한테 들은 이야기를 한 가지가 되든, 열 가지가 되든, 불고지죄는 불고지죄야. 그러니까 다 들었다고 해도 그렇고 세 가지 들었다 하나, 열 가지 들었다 해도 불고지죄는 불고지죄라(‘진실의 힘’ 홈페이지 ‘마이데이’ 임봉택편).” 경상도 사투리의 검사는 계속 버티는 임봉택에게 이렇게 호통쳤다고 해. “니가 지금 생각이 안 나는 기지, 안 들은 게 아니야. 분명히 들었어!” 결국 임봉택은 “박춘환에게 북한 얘기를 들었다”라고 진술해야 했고 국가보안법 위반자가 되어 옥고를 치렀어. 그에게 ‘책’을 주었다고 허위 자백을 한 박춘환은 무려 7년 동안 감옥살이를 해야 했지. 그는 친구들까지 망쳤다는 죄책감에 고향을 떠났다가 가족들의 삶까지 망가지고 말았어. 2017년, 그러니까 납북당한 지 49년 만에 박춘환은 법원에서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단다. 이 잔혹극의 연출자였던 검사들은 자신이 죄인으로 엮었던 이들의 무죄판결에 관심이나 있었을까.
 
불고지죄 혐의로 옥살이를 치르고 나왔던 임봉택은 수십 년 뒤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낯익은 이름과 얼굴을 만나. “어 김기수?” 1995년 9월16일 검찰총장에 임명된 김기수는 그 옛날 “생각이 안 나는 기지, 안 들은 게 아니야”라고 윽박지르던 바로 그 사람이었던 것이지. 그 장면을 보면서 임봉택이 얼마나 황망했을지 상상해보기 바란다. 임봉택씨(국가폭력 피해자 등이 만든 재단법인 ‘진실의 힘’ 이사)는 이렇게 푸념을 하더구나. “재주도 좋다. 어떻게 검찰총장까지….”
 
김기수 전 검찰총장은 임봉택씨 사건에 대해 “전혀 기억이 나지 않고 (재심) 무죄판결을 받은 사실도 몰랐다”라고 말하기도 했지(〈한겨레〉 2016년 1월28일).
검사들은 참 재주가 좋긴 했어. 위에서 ‘납북 어민의 죄책’을 준엄하게 논하며 귀환자를 엄벌해야 한다고 으르렁거리던 검사 임상현의 만년 모습은 ‘엄벌’을 받아야 할 누군가를 철저히 감싸는 호위 무사였다. 1995년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터지고 재벌 회장들이 검찰에 소환됐을 때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임상현 변호사와 그룹 비서실 직원 5~6명을 대동했다(〈경향신문〉 1995년 11월9일)”고 하니까. 대전지검장 등을 지낸 그는 검사장 출신으로 ‘전관예우’ 방패 중 하나였던 거야. 공교롭게도 당시 검찰총장이 바로 김기수였어. 김기수와 임상현. 그들은 피해자들의 아픔을 짐작이나 할까. 최소한 미안함이라도 가지고 있을까. 제발 그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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