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파된 정신
마크 릴라 지음, 석기용 옮김, 필로소픽 펴냄

“반동은 혁명보다 수명이 길다.”

저자는 중동의 이슬람 근본주의, 유럽의 극우 민족주의, 미국의 신정(神政) 보수주의 등을 ‘반동’으로 규정한다. 심지어 좌파의 극단적 생태주의, 반(反)지구화 운동, 반(反)경제성장론 등도 21세기 반동의 한 흐름으로 간주한다. 반동적 사상의 뿌리는 ‘지금보다 나은 황금시대가 과거에 있었다’라는 정치적 노스탤지어(향수)다. 반동주의자들은 현재에 대한 파괴적 절망감 속에서 혁명만큼이나 과격한 방식으로 상상 속의 과거로 역주행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저자는
레오 스트라우스, 프란츠 로젠바이크, 에리크 뵈겔린 등 반동 사상가들을 통해 현대의 반동이 지닌 정신의 기원을 추적한다.

 

 

 

 

 

 

 

 

 

 

어른이라는 뜻밖의 일
김현 지음, 봄날의책 펴냄

“모두 몸으로 부딪쳐 터득한 것으로 자기를 보호한다.”

김현의 산문을 읽고 나면 익숙한 일상과 삭막한 마음의 풍경이 잠시나마 달라진다. 나는 오늘 무슨 말을 들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되짚어보게 된다. 대중교통 안에서 마주한 낯선 이의 안색을 살피게 되고, 가까운 이의 이마와 손과 발을 괜히 만져보고 싶어진다. 그가 대수롭지 않은 듯 적어둔 빛과 바람과 하늘을 통해 새삼 계절을 감각하고, 그러고 나면 호들갑을 떨며 감탄하고야 만다.
저자는 시도, 산문도, 몸도, 마음도 성실하게 쓰는 사람이다. 그의 다정함에는 전염성이 있다. 나는 그의 글을 통해 다정한 사람으로 몇 번이고 거듭난다. 덩달아 애틋해지는 동안 살아가는 일이 그럭저럭 괜찮은 일이 된다. ‘어른이라는 뜻밖의 일’이 견딜 만한 무엇이 된다.

 

 

 

 

 

 

 

 

 

 

 

갈등 도시
김시덕 지음, 열린책들 펴냄

“산책은 자신이 사는 도시의 맨 밑바닥을 바라보게 하고, 그로써 인간을 정치적으로 만듭니다.”

한때 달동네였던 지역이 지금은 고층건물 밀집지가 되었다. 낙후된 구시가지에 예술가와 자본이 다시 모인다. 역동적으로 변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울의 본질은 사실 ‘철거’와 ‘개발’이다. 저자가 ‘갈등’이라는 단어를 제목에 붙인 까닭이다. 지금 밟고 있는 땅이 한때는 빈민촌, 공장, 성매매 집결지였다. 허물어지고 다시 지어지는 과정에서 누가 쫓겨나고, 누가 입주했을까. 이 책은 아름다운 도시가 아닌, ‘시민의 도시’를 걷게 만든다. 봉천동, 을지로, 영등포, 그리고 성남과 용인 등 장소의 흔적을 살폈다. 오래된 간판, 머릿돌, 마을 비석, 깃발, 플래카드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도시 빈민과 갈등의 역사가 곳곳에 서려 있기 때문이다.

 

 

 

 

 

 

 

 

 

 

래디컬 마켓
에릭 포즈너·글렌 웨일 지음, 박기영 옮김, 부키 펴냄

“우파와 좌파의 주장은 대담한 개혁을 할 수 없게 우리의 상상력을 제약하고 있다.”

이 책은 시장의 능력을 인정하지만 시장만능주의에 머무르는 대신, 시장의 기능을 급진적으로 밀어붙이려 한다. 소유 자체를 일종의 독점으로 보고 해체하며, 소유권 대신 ‘영구 경매 시스템’을 도입하면 시장이 왜 더 유능해지는지 논증한다. 1인1표 투표권을 ‘투표 저축 시스템’으로 전환하자고 제안한다. 읽다 말고 몇 번씩 저자 약력을 확인했다. 지나치게 대담한 아이디어들이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몰아친다.
이 정도면 몽상가의 헛소리가 아닐까 의심스러울 때도 많은데, 저자의 무게감이 그걸 누른다. 시카고 대학 로스쿨 교수인 에릭 포즈너는 법학과 경제학 양쪽에 탁월한 연구자다. 마이크로소프트 수석연구원 글렌 웨일은 경제학 박사학위를 1년 만에 끝낸 젊은 천재다.

 

 

 

 

 

 

 

 

 

 

그곳에 내가 있었다
일하는여성아카데미 지음, 이프북스 펴냄

“여러분, 어떻게 할까요? 밖으로 나갈까요? 아니면 앉아서 일을 할까요?”

2019년 3월, 일하는여성아카데미 치유 글쓰기 워크숍에 노동자 10명이 모여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70~80년대 대한민국 성장을 견인했던 섬유공장과 전자공장에서 일했던 여성들, 1980~90년대 대학 캠퍼스에서 최루탄을 들이마시며 학생운동에 뛰어든 여성들이 ‘나는 나 스스로에게 무엇이었는지’ 솔직한 자기고백을 이어갔다. 여성 노동자로서 고용안정, 동일임금 등을 외치며 투쟁해야 했던 기억뿐 아니라 여성 가사노동자로서 짊어져야 했던 가부장제의 무게까지, 때로는 웃음을 터뜨리고 때로는 눈물지으며 이 책을 엮어냈다. 책의 앞부분에는 1980년부터 지금까지 여성노동 운동사를 정리한 타임라인이, 책의 뒷부분에는 여성노동 관련 법률이 수록되어 있다.

 

 

 

 

 

 

 

 

 

 

한판 붙자, 맞춤법!
변정수 지음, 뿌리와이파리 펴냄

“견고한 강박에 아주 작은 실금이라도 균열이 생기기를.”

20대엔 한국어 연구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으나 주로 프리랜서 기고가였다. 간간이 출판편집자로 일했던 저자가 2003년부터 최근까지 현장의 출판편집자 또는 예비 편집자를 대상으로 100회 가까이 강의했던 내용을 글로 풀었다. 이미 서점에 즐비한 어문 규범 해설서를 답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규범의 압박에서 자유로워지게 하는 데 목표가 있다. ‘규범이 이러저러하게 규정하고는 있지만 그 취지를 이해한다면 지나치게 주눅들 필요 없다’라는 게 책의 메시지다. ‘현장 실무자를 위한 어문규범의 이해’라는 부제가 붙었다. 현장 실무자는 출판편집자만 의미하지 않는다. 개인 블로그나 SNS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된 글을 쓰는 사람 모두 현장 실무자가 될 수 있다.

기자명 시사IN 편집국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