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특히 유신 시대는 택시 승객이 술김에 박정희 대통령 욕 몇 마디 했다가 바로 파출소에 ‘배달’되고 여차하면 징역 몇 년을 받을 수도 있는 암울한 시기였어. 그 갑갑한 시절 최인호 작가가 작사하고 가수 송창식이 부른 ‘고래사냥’은 요즘 말로 ‘사이다’ 이상의 청량제였어.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삼등 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서울에서 이 ‘동해 바다’에 가려면 어느 노선의 완행열차를 타야 했을까? 그 시작은 일단 서울의 동쪽, 청량리역 그리고 노선은 중앙선 철도였어. 동해 바다에 가는 완행열차는 중앙선을 타고 경북 영주에 도달한 뒤, 영동선으로 방향을 전환해 태백산맥을 뚫고 동해안으로 나갔으니까. 1970년대의 여름, 청량리역 앞과 중앙선 완행열차 안에서는 ‘고래사냥’을 부르며 열광하는 청춘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다가 열차 공안원이나 경찰관에게 붙잡혀 곤욕을 치르기도 했고 말이야.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대륙 침략 야욕을 불태우던 일제는 더 많은 자원과 더 편리한 교통이 필요했지. 일제는 중앙선 건설 목적을 이렇게 밝혔어. “반도 제2의 종관(縱貫)선을 형성함으로써 경상북도·충청북도·강원도·경기도 등 4도에 걸치는 오지 연선 일대의 풍부한 광산·농산 및 임산자원의 개발을 돕고, (중략) 격증하는 일본·조선·만주의 교통 연락, 객·화의 수송 완화를 도모하고자 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리고 1942년 중앙선 전 구간이 개통되었어.
중앙선 일대는 우리나라에서 지하자원이 가장 풍부한 곳이야. 지금도 화물 수송량이 철도선 가운데 가장 많아. 강원도의 석탄, 충북의 시멘트 등이 수십 년 동안 화물열차에 실려 중앙선을 타고 서울 청량리역으로 들어왔어. 나라 전체가 가난하던 시절, 청량리역 주변에서는 지금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단다.
1960년 10월26일자 〈경향신문〉이 묘사한 청량리역 풍경이야. “땅에 떨어진 사탕에 개미 꾀듯이 수백명이 달라붙어 캐낸 탄은 또 그 위에서 대기 중인 수백명의 아주머니들의 푸대자루로 들어가고 밀거래는 순식간에 끝난다.” 밤 11시께 석탄을 가득 실은 열차가 청량리역에 들어오면 한 손에는 부삽, 한손에는 쇠갈퀴를 든 청년 수십명이 나타났어. 그들은 열차가 속도를 늦추면 일제히 달려들어서는 쇠갈퀴를 휘둘러 열차 옆문을 따고 탄을 퍼갔지.
그렇게 없어지는 석탄이 연간 1만t쯤 됐다고 해. 경비원이라고 해야 두세 명. 괜히 호루라기 불고 달려들었다가는 되레 몰매를 맞기 십상이었을 거야. 작심하고 경비를 보던 청량리경찰서 형사가 총을 쏘기도 했지만 석탄 도둑들은 돌팔매로 맞서며 물러서지 않았다는구나.
51명 사망한 대강터널 사고
보다 못한 당국은 철로 변에 장벽을 쌓아버렸어. 효과는 탁월했지만 곧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단다. 석탄 도둑으로 끼니를 잇던 주민들이 굶어 죽게 생겼다며 아우성을 친 거야. “이들 도탄배(盜炭輩) 세대는 약 400가구로 추산된다고 경찰은 말하고 있다. 그래서 도둑질을 못하게 된 사람들이 하는 수 없이 경찰에 석탄을 훔치지 못할 바에야 취직 알선을 요구했다(〈경향신문〉 1960년 12월22일자).” 이에 석탄공사 청량리출장소장, 청량리경찰서장, 청량리역장 등이 모여 대책회의를 열었다니. 참 우습고도 서글픈 우리 역사의 숨은 그림이라고나 할까.
중앙선은 남한강을 타고 달리다가 백두대간을 뚫고 충청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노선이야. 경치가 좋아 요즘은 관광 열차로 많이 이용되고 있지. 그만큼 험준한 기찻길이기도 했어. 충북 단양과 경북 영주 사이 고개인 죽령 북쪽에는 똬리굴로 된 대강터널이 있어. 똬리굴(루프식 터널)은 경사가 심한 산악 지형에 철도를 놓을 때 열차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선로를 빙 돌려 경사로를 완만하게 만든 터널을 뜻해. 그런데 1949년 8월18일 서울발 안동행 열차가 이 대강터널을 통과하다가 원인 모를 사고로 멈춰 서버렸어. 증기기관차는 석탄을 있는 대로 때면서 전·후진을 반복했고 그 와중에 발생한 유독가스는 승객들의 숨을 막아버리고 말았지.
51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참사였어. 이 참사를 처음 발견하고 남은 승객들을 구하는 데 크게 기여한 철도원 이필종씨는 뜻밖의 봉변을 당했단다. “경찰관들이 곧 나를 찾더니 (중략) 철도국원은 모두가 빨갱이라고 떠들어대더니 구원 작업에 여념이 없는 나를 처소 뜰로 끌고 가서는 구타를 하기 시작하더군요. 치고 밟고. 수없는 구타를 당했습죠(〈레디앙〉 2017년 5월11일).” 분단의 벽이 살기를 더해가던 시절이 낳은, 어이없는 해프닝이었지.
힘겹게 죽령을 넘어온 중앙선은 경북 안동을 지나면서 어느 위풍당당한 아흔아홉 칸 기와집을 가로지르게 돼. 그래서 이 집의 반절가량이 헐려나갔지. 이 집은 고성 이씨 종택인 ‘임청각(臨淸閣)’이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이 나고 자란 곳이란다. 일제가 그 집터의 정기를 누르기 위해 중앙선을 놓았다는 말은 좀 억지스럽지만 수백 년 고택에 대해 심각하게 무례했던 건 사실이다. “해방되기 전까지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라고 불퇴전의 의지로 싸우던 독립운동가의 집이었으니 일제로서는 예의를 차릴 의지가 전혀 없었겠지만.
석주 이상룡의 유해는 망명한 지 79년, 돌아가시고 58년 뒤인 1990년 9월13일 김포공항을 통해 고국에 돌아왔어. 독립운동단체 통의부 간부였던 박위승 옹(당시 91세)은 노구를 이끌고 독립운동가들의 때늦은 귀환을 맞았다. 대형 태극기로 석주 이상룡의 영정을 감싸던 박옹은 갑자기 쩌렁쩌렁하게 외쳤지. “80년 만에 돌아오는 석주 선생을 위해 만세를 부릅시다.” 만세를 부르던 사람들은 다들 눈시울이 붉어졌다고 해. 하늘 저편에서 석주 선생도 너털웃음을 터뜨리지 않았을까. “그래, 나 돌아왔도다.” 다시 찾은 조국에서 혼백이나마 중앙선 철도를 타고 고향 땅에 이르렀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허탈해하셨겠지만.
지난 몇 주간 철도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아빠는 여러 차례 상념에 젖었다. 참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철로변 자갈처럼 널려 있었고, 역사적 순간들이 차창 밖 풍경처럼 생생하게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으니까. 역사는 끝없는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빠는 저 임진각에, 그리고 경원선 월정리에 서 있는 ‘달리고 싶은 철마’들이 평양에 닿고, 신의주에 가고, 두만강에 이르게 만드는 것, 그게 우리가 칙칙폭폭 달려야 할 ‘역사의 기차’가 아닌가 해. 조만간 너와 함께 가슴 설레는 기차 여행을 떠날 수 있기를 꿈꿔본다. 그때는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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