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륵은 경성의전 학생 신분으로 3·1 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에 수배되어 해외 망명길에 올랐다. ⓒ(사)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 제공
이미륵은 경성의전 학생 신분으로 3·1 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에 수배되어 해외 망명길에 올랐다. ⓒ(사)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 제공

1959년 3월20일은 몹시 추웠다. 눈보라도 몰아쳤다. 이미륵의 9주기 기일이던 그날, 전혜린은 이미륵의 친구였던 독일인 T, S와 함께 뮌헨 교외의 묘지를 찾았다. 무덤은 거친 들판 가운데 작은 공동묘지 안에 있었다. “그의 무덤은 아무 장식도 없고 아무 데나 굴러다니는 것 같은 돌로 만든 작은 비석 위에 단 세 글자, 새겨진 한문 李彌勒 때문에 누구의 눈에나 금방 띄었다. … 나는 화환을 비석 앞에 갖다 놓았다(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966).”

전혜린(1934~1965)은 시대의 신드롬이었다. 수학을 0점 맞고도 서울대 법대에 차석 합격했다는 일화가 생길 정도로 유명했다. “그것이 없으면 안 되는 유일한 것, 정신(Geist)을 찾아” 독문학으로 방향 전환을 하고, 1955년에 뮌헨으로 유학을 떠났다. 1959년에 귀국해 대학에서 가르치며 에세이를 쓰고 번역에 매진했다. 그녀는 서구 문화에 대한 청년들의 절망적인 선망을 대변했다. 정신의 몸살을 앓다가 31세로 요절했다. 대중은 비극적 천재의 죽음을 애도했다.

전혜린은 수필가로 신화가 됐지만, 번역가로서 훨씬 많은 작품을 남겼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1961),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64),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1964?) 등 10여 종을 번역했다. 그중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가 있다. 뮌헨의 고서점 주인을 통해 이미륵을 알게 되어 무덤을 찾았고, 그 해 5월에 잡지 〈여원〉에 ‘이미륵씨의 무덤을 찾아서’를 실었다. 같은 해에 〈압록강은 흐른다〉의 번역본을 출판한다.

그녀는 금수저였다. 아버지 전봉덕은 경성제국대학 졸업 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와 행정과에 합격하고 경기도 경찰부 보안과장까지 지낸 친일파였다. 이승만 정권에서도 경찰과 관료, 변호사로 승승장구했다. 전혜린이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지식에만 탐닉할 수 있었던 데는 아버지의 전폭 지원 덕이 컸다. 여성의 유럽 유학이 상상력 한계 바깥의 특권이던 시절이었다. 거기서 전혜린은 이미륵을 만났다.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산 사람을.

뮌헨 거주 시절의 전혜린.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를 번역했다. ⓒ나무위키
뮌헨 거주 시절의 전혜린.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를 번역했다. ⓒ나무위키

항일운동에 뛰어든 경성의전 학생들

이미륵(본명 이의경, 1899~1950)은 황해도 해주의 천석꾼 집안에서 태어났다. 한문 고전을 읽으며 자랐다. 독학으로 1917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합격했다.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교가 의전으로 승격한 후 첫 입학생이었다. 경성제대 설립 전이었으니, 식민지에서는 가장 성공한 수험생 축에 들었다.

1919년의 어느 날, 친한 동기 유상규가 다음 날 저녁 모처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가보니 학생 10여 명이 있었다. 상규는 준비 중인 시위에 대해 말하며 “관립학교의 학생들만 시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사람들이 의전 학생들을 ‘절반짜리 왜놈’이라며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시위 동참에 모두 찬성했다. “마침내 그는 첫 번째 시위가 3월1일, 오후 두 시,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될 것이라는 비밀 교서를 전달해주었다.”

3월1일, 군중이 운집한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이미륵은 독립선언서 낭독을 들은 다음 누군가에게서 삐라 한 뭉치를 받았다. “뿌리시오!” 사람들이 삐라를 가져갔다. “그래, 우리 학생들이고, 우리 아이들이야!” 사람들이 외쳤다. 여인들이 울부짖고 몸서리를 쳤다. 마실 것과 먹을 것도 건네주었다. 목이 터져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는 전국으로 번졌다. 경찰이 밤낮으로 사람들을 고문하고, 도처에서 사람들이 죽어갔다. 서울의 학생들은 네 번째 시위 후에 비밀 활동에 들어갔다. 이미륵도 선전문 작업에 투입됐다.

체포망이 점점 다가오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신없이 잠이 들었다가 깼을 때 어머니가 말했다. “도망가거라! 도망가야 한다!” 압록강 너머로 도망가서 여권을 만들면 유럽에서 공부할 기회가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강을 건너다 체포되고 총살된 이야기를 아는 이미륵은 겁이 났다. 유럽에서 공부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들은 바 있어서 떠나기 싫었다. 어머니의 거듭된 설득에 결국 망명길에 올랐다.

먼저 상하이로 가 한동안 대한적십자대에서 간호사 교육에 종사했다. 1920년, 중국 여권을 만들고 안중근의 동생 안봉근과 함께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의학 공부를 하다 동물학으로 방향을 바꿨다. 1927년 벨기에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김법린·이극로 등과 함께 한국 대표단으로 참가했다. 뮌헨 대학에서 동물학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대공황 시절이라 취직할 곳이 없었다. 그때부터 글을 썼다.

독일 그래펠핑에 있는 이미륵(본명 이의경)의 묘소. 원래 공동묘지에 있다가 1997년 현 위치로 이장됐다. ⓒ(사)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 제공
독일 그래펠핑에 있는 이미륵(본명 이의경)의 묘소. 원래 공동묘지에 있다가 1997년 현 위치로 이장됐다. ⓒ(사)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 제공

글쓰기만으로는 생계가 어려워 서예와 중국 고전도 가르쳤다. 자연스레 독일 지식인들과 교류하게 됐다. 반나치 활동으로 유명한 백장미단 사건으로 처형당한 쿠르트 후버(1893~1943) 뮌헨 대학 교수도 그중 한 명이다. 체포되고 처형되자 지인들이 후버의 가족을 멀리했다. 후버의 절친 중에는 나치 시대를 상징하는 음악 ‘카르미나 부라나(Carmina Burana)’의 작곡가 카를 오르프도 있었다. 그는 후버가 체포될 때 도와주기를 거절하고 사후에도 가족을 외면했다. 목숨이 위태롭던 시절이니 이해할 수 있다. 전후에 나치 관련을 부인하며 자신도 백장미단 멤버였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 오직 이미륵만이 자신의 배급식량을 나눠주며 후버의 가족과 함께했다.

종전 후인 1946년, 이미륵은 유년기부터 독일 도착까지의 여정을 그린 자전적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Der Yalu Flieβt)〉를 발표했다. 독일 평단의 주목을 받았고,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 불가리아어 등으로 번역됐다. 폐허가 된 독일 문단에 활력을 불어넣은 작품이 됐다. 뮌헨 대학의 강사로 동양철학을 가르치며 작가로 활동했다. 해방된 조국에 돌아오고 싶어 했으나 1950년, 위암으로 사망했다.

뮌헨 대학 인근 쿠르트 후버 거리에는 이미륵의 기념 동판이 설치되어 있다. ⓒ(사)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 제공
뮌헨 대학 인근 쿠르트 후버 거리에는 이미륵의 기념 동판이 설치되어 있다. ⓒ(사)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 제공

백장미단을 이끌다 처형된 한스 숄과 조피 숄의 누나이자 언니인 잉게 숄이 살아남아 이들의 이야기를 증언한 책 〈하얀 장미〉를 펴냈다. 독재정권 시절 한국에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저항정신을 일깨웠다. 2019년 5월28일, 이미륵의 묘지가 있는 뮌헨 인근 그레펠핑시청 앞 쿠르트 후버 교수 거리, 후버의 동판 맞은편에 이미륵의 동판이 설치됐다. 두 사람의 우정을 기리며 그레펠핑시와 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함께한 일이다. 동판에는 이미륵이 즐겨 쓰던 문구가 새겨졌다. “사랑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에게는 가시동산이 장미동산이 되리라.”

‘절반짜리 왜놈’이라고 의심받던 경성의전 학생들이었지만, 만세운동에 많이도 참가했다. 1919년 4월20일자 조선총독부 보고에 따르면, 구금된 학생 중 경성의전 학생이 가장 많아서 31명이었다. 경성고보 22명, 보성고보 15명, 경성공전 14명, 경성전수학교 12명, 배재고보 9명, 연희전문 7명, 세브란스의전 4명 등이었다. 1919년 동안 경성의전에서 조선인 학생 79명이 퇴학 처분됐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 의사는 그야말로 특권층이었다. 보장된 길을 마다하고 거리로 나선 청년 의학도들의 피가 뜨거웠다. 어떤 이는 독립투쟁에 투신했다. 이미륵의 동기 한위건은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내무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그 처가 페미니스트 여의사로 유명한 이덕요였다(〈시사IN〉 제823호 ‘네 명의 여성이 보여주는 사랑과 혁명의 이중주’ 참조).

더 일찍 독립운동에 뛰어든 의사도 있었다. 세브란스의학교 1회 졸업생 김필순은 105인 사건에 따른 체포 위협을 피해 1911년 말 중국으로 떠나 독립운동에 나섰다. 그 아들이 중국에서 ‘영화 황제’로 불린 항일 배우 김염이다. 그의 동기로 세브란스의학교 교수이던 박서양은 1917년 간도로 가서 독립군 군의로 활동했다. 2회 졸업생 이태준은 남경(난징)을 거쳐 몽골에서 개업과 독립운동을 병행했다.

물론 의사의 길을 걸은 이가 훨씬 많았다. 보장된 길이 있고, 동족의 고통을 치유한다는 보람도 있는 의사직이었다. “장래에도 그런 소요에 가담하겠는가?”라는 경성법원 예심판사의 질문에 “가담하지 않겠다”라고 대답한 이미륵의 동기 백인제는, 10개월을 옥살이한 이후 어렵사리 복교하여 학교를 수석 졸업했다. 경성의전 교수이자 외과의사로 명성을 떨쳤다. 다시는 소란스러운 일에 가담하지 않았다.

또 다른 동기 유상규는 상하이로 가서 임정에 참여했다. 안창호 아래서 4년간 임정 교통국 조사원으로서 독립운동에 종사했다. 임정 내 대립이 심해지자 안창호가 귀국을 권했다. 1924년 돌아와 복학해 학업을 마치고 총독부의원 외과 부수, 경성의전 외과학교실 조수, 강사를 거쳤다. 흥사단 계열의 수양동우회와 기관지 〈동광〉에 참가하고, 조선의사협회의 창립 발기인이자 서무부 간사로 활동했다. 평생 안창호의 무실역행 노선을 따랐다.

‘신시대 지식계급’ 혹은 ‘악덕 의사’

식민지 조선에서 의사는 어떤 존재였을까? 한편으로는 “신시대의 최고 전문학문을 배운 지식계급”으로 존경받았다. 또 한편으로는 “발호하는 악덕 의사”로 지탄받았다. 가난한 환자는 받지 않고, 부유한 환자는 치료 기간을 늘린다고 비난받았다. 1934년 12월12일 밤, 서울 낙원동에서 화재가 났다. 가난한 부부는 화상 입은 영아를 안고 온 병원 문을 두드렸지만, 문 열어주는 병원이 없었다. 아이는 부모 품에서 죽었다(〈조선일보〉 1934년 12월14일자). 1937년 9월30일, 경성부 청진정 거주 임 아무개 여인이 남편과의 불화로 음독을 했다. 병원들은 초췌한 행색을 보고 돌려보냈다. 여인은 거리에서 절명했다(〈매일신보〉 1937년 10월5일자).

의사가 매춘부보다 못하다는 모욕이 1면 사설로 실리기도 했다. 유상규는 화가 많이 났다. 1935년 신간 〈개벽〉에 글을 실었다. 대부분의 기사에 병원 이름도, 의사 이름도 없으니 기사가 아니라 소설이라고 반박했다. 기자는 “‘의사’라는 스위치를 틀면 악담만 쓰러 나오게 된 두뇌의 소유자”들이었다. “조선 민중이 모두 그대들 같다고 할진대 이것이야말로 ‘돼지에게 진주’를 던진 것이 아닐까 한다”라며 언론의 선동에 놀아나는 민중을 비난했다.

민중에 대한 유상규의 절망에는 유래가 있었다. 임정에서 귀국할 때 8개월간 오사카에서 막노동을 했다. 그의 눈에 조선인은 “우마 이상의 노역”과 “돈견 이하의 생활”에 순응하는 민중이었다. 그 민중에게 신명을 바쳤다. 퇴근 후의 시간을 돈 안 받는 왕진에 쏟았다. 엘리트 의식과 민중에 대한 애증이 복잡하게 얽혔다.

유상규(뒤 오른쪽)는 임정 교통국 조사원으로서 안창호(앞)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 ⓒ흥사단
유상규(뒤 오른쪽)는 임정 교통국 조사원으로서 안창호(앞)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 ⓒ흥사단

이 열정과 분노를 고스란히 안은 채 유상규는 1936년 7월18일, 수술 중에 걸린 연쇄상구균 감염증으로 급서했다. 시신을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박사논문이 통과되고 뜻을 펼치기 직전, 만 38세였다. 생전에 아버지처럼 따르던 도산 안창호가 2년 후 옥고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잡지 〈삼천리〉 1938년 5월호에 도산의 유언이 실렸다.

“나 죽거든 내 시체를 고향에 가져가지 말고… 달리 선산 같은 데도 쓸 생각을 말고. 서울에다 묻어주오. 공동묘지에다가… 유상규 군이 누워 있는 그 곁 공동묘지에다가 묻어주오.” 망우리 유상규 무덤 바로 위쪽에 도산이 묻혔다. 민중에게 절망하고 불신했지만, 또 민중을 뜨겁게 사랑한 유상규였다. 죽어 스승과 함께하니 외롭지 않았다.

몇 년 뒤 페니실린이 나오자 유상규를 수술한 친구 백인제는 “왜 기다리지 못하고 죽었느냐”라며 슬퍼했다. 해방 후 백병원 설립, 서울시의사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다 전쟁 때 납북됐다. 생사가 전해지지 않는다.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한위건은 좌경 맹동주의 노선과 투쟁하다 숙청되었다. 그 뒤 류샤오치에 의해 복권되어 하북성위원회 서기로 도약했지만 이듬해인 1937년 폐결핵으로 죽었다. 우리 나이 41세였다. 간도의 박서양은 여러 차례 폐교에 맞서며 민족교육에 힘썼지만 결국 꺾였다. 1936년 귀국, 고향에서 개업했다. 1940년에 창씨하고 그해 말 죽었다. 만 55세였다. 흑룡강성(헤이룽장성)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필순은 1919년, 콜레라로 죽었다. 만 41세였다. 독살설이 있다. 몽골로 간 이태준은 의열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일본의 사주를 받은 러시아 백위군에 의해 1921년 처형당했다. 만 37세였다.

유상규는 의사로서의 직업적 위신과 민중에 대한 봉사를 양립시키려던 실력양성론의 정점에 선 인물이었다. 힘을 키워 봉사한다는 엘리트의 다짐이 가난한 식민지 민중과 종종 불화했다. 사실 유상규만큼 살기도 쉽지 않았다. 상당수 의사는 그저 범속하게 잘 살았다.

의사들은 여전히 이 땅의 최고 엘리트들이다. 민중과의 불화도 여전하다. 지금도 갈등이 폭발 중이다. 따지고 보면 복잡한 문제여서 의사들만 싸잡아 비난할 일도 아니다. 그때와 지금 상황이 같지도 않다. 다만 이런 상념이 드는 것이다. 엘리트인 채로 민중의 마음을 얻기가 이렇게 어렵다고. 다만 이런 소망도 드는 것이다. 스스로 민중이 되어 함께한 이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고.

기자명 조형근 (동네 사회학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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