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사관학교 충무관 앞 독립 유공자 흉상. 왼쪽부터 홍범도, 지청천, 이회영, 이범석, 김좌진. ⓒ연합뉴스
육군사관학교 충무관 앞 독립 유공자 흉상. 왼쪽부터 홍범도, 지청천, 이회영, 이범석, 김좌진. ⓒ연합뉴스

국방부는 당초 육군사관학교 충무관 앞 독립운동 유공자 5인의 흉상을 모두 독립기념관 수장고로 이전하려 했다. 추가로, 충무관 1층 로비에 있는 박승환 참령 동상도 이전 대상이다. 박 참령은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이 조선 마지막 군주인 순종의 조칙을 위조해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자 자결로 저항한 인물이다.

이에 대해 ‘독립운동 지우기’라는 여론이 일자, 홍범도 장군 흉상만 교외 이전할 방침이다. 주된 명분은 그의 ‘자유시 참변(1921년 6월28일) 개입’이다. 홍범도가 참변의 가해자들 편에 서서 독립운동을 궤멸시켰다는 것. 자유시 참변은 ‘좌익들이 민족주의 우익 독립군들을 학살한’ 사건으로 알려져왔다. 홍범도는 공산주의 사상을 관철하기 위해 동지들에게 총구를 돌린 철두철미한 ‘빨갱이’였을까? 그래서 ‘공산당 수괴’ 레닌을 만나 참변에 대해 보고한 대가로 모젤 권총을 받은 것일까?

최근 이철규 국민의힘 사무총장(의원)은 이를 입증할 만한 자료를 발견했다. 국내의 한 논문(2021년 발표)에 인용된 ‘우리 고려 노동 군중에게’라는 문건이다. 홍범도 등 간도 독립군 지도자 5명의 명의로 자유시 참변 직후에 발표된 이 문건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우리의 수적(讎賊:원수인 적)은 자못 일본 침략주의자뿐 아니라 동족 사이에도 있나니라. 자세히 말하면 관료 및 유산자이며 홍(紅)○와 같은 외홍내백(外紅內白:겉으로는 붉지만 속은 하얀)한 가면 공산당원들이로다.”

여기서 ‘외홍내백한 가면 공산당원들’은 참변의 피해자들을 지칭한다. 한마디로, ‘내부의 적’인 ‘가짜 공산당원’들을 응징한 것이 사건의 본질이라 말하는 문건이다. 골수 공산주의자가 아니면 쓸 수 없는 문장이다. 이철규 의원은 페이스북(9월3일)에 소감을 남겼다. “(홍범도는) 속까지 붉은 공산당원이 아니면 우리 민족까지도 적으로 돌렸습니다. 볼셰비키즘(볼셰비즘)을 신봉하고 동족을 향하여서도 공산주의자가 아니면 적으로 돌렸다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국군의 사표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이 문건은 실존한다. 홍범도 등의 명의로 발표된 것 역시 틀림없다. 그러나 이철규 의원의 주장과 기대를 완전히 뒤엎을 만한 당대의 다른 자료들이 존재한다.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보고서를 원동민족대회에 제출하면서 “배신자로 되고 경멸을 받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라고 토로했다. ⓒ연합뉴스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보고서를 원동민족대회에 제출하면서 “배신자로 되고 경멸을 받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라고 토로했다. ⓒ연합뉴스

상해파 대 이르쿠츠크파

조선인(한인)들은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국경 너머의 러시아 땅으로 이주해 살아왔다. 1920년대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의 극동 지역(한반도로부터는 북쪽과 북동, 북서쪽의 러시아 영토)에는 ‘한인 소사이어티’라고 할 만한 공간이 조성되어 있었다. 한인 무장단체도 여럿 구성되어 볼셰비키의 군대(적군)와 함께 7만여 일본군(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발발한 내전에서 왕당파 백군을 지원)을 상대하고 있었다.

이런 러시아 내 한인 무장 독립군 가운데 대다수가 ‘이르쿠츠크파’라 불리는 세력으로 형성된다. 참변의 가해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이다.

러시아 지역의 한인 무장 독립군 중 소수(니항 부대)는 ‘이동휘 세력’과 결합하면서 ‘상해파’로 불렸다. 이동휘는 대한제국 군인 출신으로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사회주의자다. 이 상해파가 바로 참변의 피해자들이다.

자유시 참변은 좌익이 우익 민족주의자를 학살한 사건이 아니다. 양측 모두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사회주의 색채가 짙은 사람들이었다. 레닌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면서 제국주의로 전화했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식민지 민중의 독립운동은 반(反)자본주의 투쟁과 다르지 않은 것이 된다. 당시 제국주의의 (반)식민지였던 동아시아 독립운동가들에게 소비에트 러시아는 좌우를 막론하고 무기와 자금 지원을 기대할 만한 유일한 국가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레닌 정부에 특사를 보내 체결한 합의(‘국가로 승인’ ‘무기 공급’ ‘자금 지원’ 등)를 대일 독립전쟁 전략의 근간 중 하나로 삼았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들이 선을 댈 수 있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권력 체계는 대단히 복잡했다. 모스크바의 레닌이 이끄는 러시아 공산당 및 정부는 권력의 진앙지다. 1919년 3월, 각국 공산당들의 국제연대 조직으로 설립된 코민테른도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러시아 공산당은 명목상 코민테른의 하부 조직이었지만, 실세였다. 그러나 한인 독립군들에게 가장 밀접한 권력은, 그들의 활동 공간인 러시아 원동 지역에서 ‘공식 정부’ 노릇을 하던 ‘원동공화국(극동공화국)’. 소비에트 러시아가 적백 내전 및 일본군의 개입이라는 정세를 타개하기 위해 급조한 명목상의 국가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는 대립하고 있었다. 운동의 주도권을 차지하려면, 러시아 측의 여러 권력 가운데 더 센 쪽을 골라 잡아야 했다. 홍범도 등 간도의 독립군 부대들과 러시아 내 한인 무장단체들이 집결한 1921년 초반의 자유시(스보보드니)는 이런 공간이었다.

그들이 자유시에 집결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간도와 (러시아) 연해주 지역 한인 무장 부대를 통합하여 단일한 독립군단을 조직하”는 것이었다(〈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 사변〉, 윤상원 전북대 사학과 교수). 즉, 군권(軍權) 통합이다.

이 ‘단일한 독립군단’에서 어느 파가 주도권을 쥐느냐는 다른 문제였다. 초기엔 상해파가 승리했다. 원동공화국 정부를 견인해 창설한 ‘대한의용군’ 중심으로 한인 무장단체들을 통합하는 구상이었다. 홍범도 등 간도 독립군들도 합류했다. 그런데 이르쿠츠크파가 판을 뒤집는다. 마침 모스크바 측이 이른바 ‘동양 혁명 사업’을 ‘코민테른 원동 비서부’에 독점시켰다. 그 수장이 러시아 혁명가 출신인 슈미야츠키다. 이르쿠츠크파는 슈미야츠키와 손잡고 ‘고려혁명군정의회(총사령관에 칼란다리시빌리라는 러시아인 임명)’를 만들어 군권 통합을 추진한다. ‘대한의용군(상해파) 중심의 통합’ 대 ‘고려혁명군정의회(이르쿠츠크파) 중심의 통합’이 격돌하는 구도였다.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묘역을 찾은 시민들. ⓒ연합뉴스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묘역을 찾은 시민들. ⓒ연합뉴스

그러나 공산당의 위계상 원동공화국보다는 코민테른 원동 비서부가 몇 배 더 강하다. 어느 쪽이 신속한 통합 및 독립전쟁 수행에 유리할까? 홍범도 등 간도 독립군들은 거취를 대한의용군에서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쪽으로 옮긴다. 앞의 논문에서 윤상원 교수는 이를 “‘무장부대 통합’이라는 명분과 ‘소련 및 코민테른의 권위’에 대한 인정, 그리고 ‘무기 및 식량의 원활한 공급’이라는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고려 때문이었다”라고 분석한다.

대한의용군 측은 고려혁명군 쪽으로 통합하는 데 순순히 응하지 않았다. ‘상해파 독립군들을 흩어놓은 편제’ ‘러시아인이 총사령관’ ‘고려혁명군 지휘부의 한인 전향자(백군→적군)’ 등을 문제 삼았다. 이렇게 실랑이가 오가는 가운데 슈미야츠키 측은 군권 통합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기로 결정한다. 이 부문에서 국내 최고 권위자인 반병률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슈미야츠키 측이 심지어 폭력적 아나키스트 및 일본 스파이들이 대한의용군에 가담해 있다고 의심하면서 무력 행사 쪽으로 기울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반 교수가 ‘러시아 국립사회정치사 문서보관소(이하 보관소)’의 문건들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무력 진압은 1921년 6월28일 오후 3시부터 4시간여 동안 자행되었다. (임시)고려혁명군 총사령관인 칼란다리시빌리가 동원한 코자크 기병대 500여 명과 원동공화국 인민혁명군 1000여 명이 장갑차까지 동원해 대한의용군 측을 공격했다.

‘보관소’ 문건들에 근거한 반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이 공격의 논의·결정 권한은 슈미야츠키와 칼란다리시빌리 등에 집중되어 있었다. 병사들과 무기도 극비리에 동원되었다. 간도 독립군들은 논의나 정보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되었다. 한인 무장 부대들은 시신을 수습할 때에 이르러서야 참변 현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날 사망자 수는 37~100명, 익사자와 행방불명자를 합쳐 400~600명 등 다양하게 추정되고 있다.

간도 독립군 지도자 5인의 수수께끼

이로부터 2개월여 뒤인 1921년 9월 초, 간도지방 독립단 11단체는 슈미야츠키 측과 이르쿠츠크파를 맹렬히 질타하는 성토문을 발표했다.

그 직후부터 1921년 11월 초까지, 이르쿠츠크파와 슈미야츠키 쪽에선 ‘대한의용군 무력 진압은 정당했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잇따라 발표한다. 놀랍게도 이 성명서들엔 홍범도, 허재욱(허근), 최진동, 안무, 이청천(지청천) 등 간도 ‘독립군 지도자 5명’의 명의가 어김없이 들어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철규 의원이 제시한 ‘우리 고려 노동 군중에게’다.

반병률 교수도 ‘보관소’에서 이 성명서들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무엇보다 앞뒤가 맞지 않았다. “(지도자 5명 중 하나인) 허재욱의 병사 37명이 참변 현장에서 사망했다. 그런 허재욱이 어떻게 ‘동족 내부의 적’ 운운하며 무력 진압이 정당했다고 주장하는 가해자 측 성명서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을까.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는 상대방에게 정치적 적개심을 가졌겠지만, 홍범도 등 간도 독립군 출신들은 정치운동엔 관심 없는 사람들이었다.” 허재욱은 대한제국군 장교 출신으로 청산리 전투에 참여한 홍범도의 전우다.

참변으로부터 3개월여 뒤인 1921년 10월, 기묘한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슈미야츠키 측과 이르쿠츠크파는 무력 진압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모스크바(러시아 공산당과 코민테른 본부)로 허재욱과 이병채(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참모 출신)를 파견했다. 그런데 정작 두 사람이 코민테른에 제출한 〈자유시 참변에 대한 보고서〉는 무력 진압을 옹호하는 내용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귀 의회정부가 총사령관(칼란다리시빌리)을 보내어 풍파를 야기하려 자유시에서 한국 군대를 포위·공격했다”라며 참변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르쿠츠크파가 파견한 사람들이 도리어 이르쿠츠크파를 공격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할 수 있는가. 반 교수는 2021년 이 수수께끼의 실마리를 다시 ‘보관소’에서 찾아냈다(주미희씨의 2022년 논문 〈자유시 참변 1주년 논쟁에 대한 고찰〉에 이 내용이 담겨 있다).

하나는 1921년 12월14일 홍범도, 최진동, 허재욱, 이청천 등 간도 독립군 지도자 28명의 ‘자유시 참변 관련 협상에 관한 전권 위임장’이다. 모스크바의 러시아 공산당 및 코민테른과 진상 규명 및 책임자 처벌 관련 협상을 하겠다는 것. 협상의 전권을 위임받은 사람은 상해파 핵심 인물인 김동한이다. 홍범도 등 지도자들은 피해자인 상해파를 자신의 ‘스피커’로 선택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1922년 2월, 원동민족대회(코민테른 주도로 열린 동아시아 각국 공산당 및 민족 혁명 단체의 연석회의) 참석차 모스크바로 간 홍범도와 최진동(봉오동 전투를 함께 전개한 홍범도의 전우)이 제출한 〈조선유격운동에 대한 보고서〉다.

홍범도, 최진동 명의의 의 첫 페이지.  ⓒ러시아 국립 사회·정치사 문서 보관소 제공
홍범도, 최진동 명의의 〈조선유격운동에 대한 보고서〉의 첫 페이지. ⓒ러시아 국립 사회·정치사 문서 보관소 제공

이 보고서는 슈미야츠키와 이르쿠츠크파 간부들을 “4천년 조선의 역사 안에서 전례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살인자로 규정하면서 이들의 조속한 퇴진을 촉구했다. 보고서엔 자신들의 명의로 발표된 ‘우리 고려 노동 군중에게’ 등 여러 성명서에 대한 반박이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부끄러운 성명서에 서명할 수 없었으며, 그들(이르쿠츠크파와 슈미야츠키 측)이 최후통첩을 했지만 서명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들’은 동의 없이 임의로 우리들의 이름을 넣었다.”

해당 성명서들에 들어간 홍범도 등 간도 독립군 지도자 5인의 서명이 위조되었다는 이야기다. 그 사실 자체가 5인에겐 치명적 치욕이었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 반공통일연맹 최고위원을 지낸 지청천(이청천) 장군도 그 5인 중 하나다.

이런 심정이던 홍범도가 1921년 11월 말(28~30일)에 주로 상해파 대한의용군 소속 인사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자유시 참변 재판에 재판위원으로 참여한 맥락은 무엇일까? 공산주의 국가에서 가장 무서운 죄목이며 사형선고가 유력한 ‘반혁명’ 혐의로 다수가 기소된 이 재판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징역 2년 3명, 징역 1년 5명, 1년간 집행유예 24명, 방면 뒤 군대 종사 17명.’

홍범도는 1922년 2월 모스크바에서 만난 레닌과 자유시 참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나눴을까. 방금 〈조선유격운동에 대한 보고서〉로 가해자들을 규탄한 홍범도가 레닌에게 ‘대한의용군은 죄의 대가를 치른 것’이라 말하니, 레닌이 ‘참 잘했다’며 권총을 선물한 것일까? 홍범도 등은 이 보고서에 “작은 패배와 승리의 기쁨을 나누었던 동지들에게 배신자로 되고 경멸을 받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라고 토로했다.

홍범도는 이 보고서로부터 100년 뒤, 그가 일생을 바쳤던 독립된 한국의 합법 정부로부터 ‘배신자로 되고 경멸을 받’는 일을 당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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