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히로시마 G7 종료 직후 기자회견에서 미·중 관계가 곧 해빙될 것이라고 말했다.ⓒ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히로시마 G7 종료 직후 기자회견에서 미·중 관계가 곧 해빙될 것이라고 말했다.ⓒ연합뉴스

“미국·중국 관계가 아주 조만간 해빙(thaw very shortly)되기 시작할 것으로 믿는다.” 지난 5월21일 일본 히로시마 G7 정상회의 종료 직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한 말이다. 며칠 뒤(5월25~26일)로 예정되어 있던 미·중 최고위급 관료들의 회동을 염두에 둔 것 같다. 그러나 지난 수개월 동안 양국 갈등의 심화 과정을 보면, 이 발언은 생뚱맞기 짝이 없다.

미국은 지난해 10월 최첨단 반도체 및 제조 장비의 대(對)중국 수출을 금지하면서 SMIC, YMTC, 하이실리콘 등 중국 거대 반도체 업체들의 생산능력을 마비시켰다. 한 달 뒤인 11월, 인도네시아 발리 G20 정상회의에서 만난 바이든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주석은 긴장 완화를 암시하는, 비교적 훈훈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런 와중에도 미국은 착실하게 중국의 목을 죄어 들어가고 있었다. 네덜란드와 일본 내 주요 반도체 제조 장비업체들의 대중국 수출 통제 관련 협의를 두 나라 정부와 추진한 끝에 지난 1월 말에 성사시켰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중국의 정찰 풍선이 미국 영공을 침범했던 지난 2월부터 미·중 대화가 동결되었다는 평가는 정확하지 않다. 대화의 물꼬를 튼 것은 최근(5월10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이뤄진 제이크 설리번 미국 국가안보보좌관과 왕이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의 회동이었다. 이 자리에서 고위급 외교 접촉 재개가 합의된 것으로 보인다.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장은 5월25~26일, 미국 방문 중에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과 캐서린 타이 무역대표부 대표를 각각 만났다.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과의 해빙을 진지하게 추구하고 있을까? 대중국 매파인 미국기업연구소(AEI:American Enterprise Institute) 대니엘 플렛카 수석연구원은 “그렇다”라며 분개한다. 그는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5월25일) 기고문에서, 바이든 행정부가 대중 비둘기파들의 주장에 굴복해 미국의 초당적 합의인 대중 강경 노선을 해체하는 중이라고 성토했다. 그 근거는 고위급 접촉 재개 및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의 브루킹스 연구소 연설(4월27일)이다.

설리번 보좌관은 ‘수출 통제로 중국의 첨단기술 개발 시도를 무력화해야 한다’라는 주장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플렛카가 ‘설리번 연설’에서 주목한 대목은 이렇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중국과의 디커플링(decoupling)이 아니라 디리스킹(de-risking)과 다변화(diversifying)이다.”

‘디커플링’은 트럼프 시대에 유행했던 용어다. 중국의 공급망을 미국 및 세계로부터 분리시키겠다는 의미다. ‘디리스킹’은, 미국 경제가 중국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우 발생 가능한 위험(리스크)을 방지하겠다는 뜻이다. 예컨대 미국이 향후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는 반도체나 재생에너지 장치 등의 비중이 지나치게 커지면, 중국이 정치적 목적으로 해당 제품의 공급을 끊어 미국 경제를 마비시킬 위험이 있다. ‘디커플링’이 중국 경제를 고립시켜 주저앉히겠다는 공격적 의도를 표현하는 반면 ‘디리스킹’은 ‘발생 가능한 피해를 차단한다’는 방어적 의미다. 이 같은 표현의 변화에서, 플렛카는 바이든 행정부의 대중 정책 온건화를 애써 읽어냈다.

과연 그럴까? 사실, 표현만 바뀌었을 뿐 중국의 첨단기술 개발을 저지하겠다는 바이든 행정부의 의지는 확고하다. 다만 디리스크가 디커플링에 비해 훨씬 점잖은 용어다. 다른 나라들을 대중국 연합전선에 끌어들이려면 ‘중국을 공격하자(디커플링)’보다는 ‘중국으로부터 받을 피해를 미리 제거하자(디리스킹)’ 쪽의 대의명분이 훨씬 크다.

지난 5월21일 종료된 G7에서 주요국 정상들은 중국의 군사적·경제적 위협을 강력하게 비난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며 ‘중국과의 디리스킹’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특히 바이든 대통령은 설리번 연설의 관련 대목과 정확히 일치하는 말을 했다. “우리는 중국과의 디커플링을 바라지 않는다. 대중 관계를 디리스킹하고 다면화하기를 기대할 뿐이다.”

그러나 바이든 행정부에게 디리스킹은 디커플링의 순화된 표현에 불과하다. 앞으로 시행될 조치들을 보면 그렇다. 미국 온라인 매체 '악시오스'(5월25일)에 따르면, 바이든 행정부는 반도체, 인공지능, 양자 컴퓨팅 등 첨단산업 부문에서 미국 기업의 대중국 투자를 제한하는 행정명령을 준비 중이다. 미국 단독이 아니라 다른 G7 국가들과 스크럼을 짤 것이다.

지난 1월 미국과 반도체 제조 장비의 대중 수출 제한에 합의한 일본 정부는 7월까지 입법 절차를 완료할 예정이다. 〈파이낸셜타임스〉(5월23일)에 따르면, 일본의 대중국 장비 수출 통제 범위는 미국의 그것보다 훨씬 넓다. 미국은 지난해 10월 최첨단 반도체(18나노급보다 정밀한 제품)와 그 제조 장비의 대중 수출을 제한했다. 그러나 일본은 최첨단 제품은 물론 자동차, 가전제품 등에 사용되는 '레거시 반도체(28나노급 이상의, 저렴하고 비교적 단순한 구조의 제품)' 장비까지 수출 통제 리스트에 포괄할 것으로 예측된다. 오는 여름이 지나면 중국 내 자동차 및 가전제품 업체들이 반도체 품귀 현상을 겪게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중국은 미국산 장비 및 기술을 도입하기 어렵게 되면서 한국과 일본으로 수입선을 뚫고 싶었을 터이다. 일본이 먼저 노선을 정해버렸다. 한국에 대한 중국의 압박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미국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왼쪽 세 번째)은 지난 5월10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왕이 중국 중앙정치국 위원(오른쪽 네 번째)과 회동을 가졌다.ⓒXinhua
미국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왼쪽 세 번째)은 지난 5월10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왕이 중국 중앙정치국 위원(오른쪽 네 번째)과 회동을 가졌다.ⓒXinhua

중국의 보복이 겨냥할 곳

중국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라는 피라미드에서 비교적 아래층에 속한다. 미국에 적극적으로 보복할 수단이 많지 않다. 지난 수개월 동안 시진핑 정부의 보복 조치는 중국 현지에서 영업 중인 미국 컨설팅 업체 등을 ‘국가안보’란 명분으로 압수수색하고 폐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랬던 중국이 지난 5월21일, 바이든 대통령의 “해빙” 발언이 나온 지 불과 몇 시간 뒤에 칼을 빼 들었다. 미국 반도체 업체인 마이크론 제품의 중국 내 사용을 사실상 금지한 것이다. 마이크론의 주요 고객인 레노버, 샤오미 등 가전회사들이 자사 제품에 마이크론 반도체를 장착하지 못하게 되었다. 글로벌 공급망에서 ‘최대 수요처’라는 중국만의 무기를 휘두른 것이다. 중국이 마이크론을 대체할 반도체 공급업체로 꼽은 곳은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의 마이크론 대체 수요를 채워주지 말라’고 한국 정부에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석열 정부는 과연, 디리스킹이란 슬로건 아래 디커플링을 추진하는 미국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을까? 이는 일본의 대중 장비 수출이 끊어질 것이 유력한 올해 하반기에 벌어질 임박한 위기다.

미국 템플 대학 일본 캠퍼스의 폴 네이도 교수는 외교 전문지 〈디플로맷〉 기고문(5월24일)에서, 바이든 행정부의 대중 정책을 담은 ‘설리번 연설’을 이렇게 평가했다. “미국이 경제적 일방주의로 나아가는 한 단계다. 미국은 원하는 것을 할 것이며, 국제협력도 환영하지만, 이는 파트너 국가들이 미국의 의도에 순응할 때만 그럴 것이라고 털어놓는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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