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신경식씨의 아들 신용보씨(사진)는 특허 도용으로 수혜를 입은 대기업들과 무역협회에 책임을 물었다. ⓒ시사IN 조남진
고 신경식씨의 아들 신용보씨(사진)는 특허 도용으로 수혜를 입은 대기업들과 무역협회에 책임을 물었다. ⓒ시사IN 조남진

경남 김해시에 사는 신용보씨는 박정희 정권을 상대로 2대에 걸쳐 무려 51년 동안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렇다고 신씨네가 군사독재에 맞섰던 민주화운동가 집안은 아니다. 그저 평범한 시민으로 특허기술 개발을 통해 나라 경제에 이바지한다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가던 중소 사업가 집안이었다. 대체 그들은 박정희 정권에 무슨 억울한 사연을 갖고 있기에 오랜 세월 신원을 위한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을까.

사건의 발단은 신용보씨의 부친 고 신경식씨(2015년 작고)가 1962년께 발명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섬유 가공기술 특허에서 비롯됐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 도일한 신경식씨는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후 도쿄에서 작은 회사를 설립해 운영하다가 1959년 귀국해 한국산업기술컨설턴트센타라는 대일 무역회사를 설립했다. 그는 일본 체류 시절부터 일본화복(기모노) 제품 소재의 홀치기 가공품에 들어가는 문양과 기술에 주목했다. 홀치기란 원단에 다양한 무늬를 넣기 위해 옷감을 잡아매는 기법으로 일본어의 ‘쥐어짜다’라는 뜻인 ‘시보리’라는 말로도 불렸다. 섬세한 공정과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라 단가가 비쌌다. 신경식씨는 1962년 일명 ‘횡인교결포’(속칭 요꼬비끼 시보리)라는 신기술을 개발했다. 그는 일본 군제산업주식회사의 문을 두드려 이것이 전에 없는 기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동시에 홀치기 제품 원단을 매월 1만 필씩 공급해달라는 제안도 받았다. 이 제안을 받아든 신씨는 뛸 듯이 기뻤다. 그도 그럴 것이 1960년대 초반 한국의 경제 사정은 수많은 국민이 헐벗고 굶주린 최빈국 수준이었다. 그는 홀치기 인력 양성을 통한 국민의 기술 습득과 외화 획득을 통한 농어민 소득 증대 두 가지를 명분으로 내걸고 가산을 털어넣었다. 1962년부터 2년 동안 고향인 경남은 물론 경북·전남 지역까지 농어촌 곳곳에 집단 교육장을 설치했다. 여기서 자신이 개발한 홀치기 가공 신기술을 교육해 약 8000명에 이르는 기술자를 양성했다. 내친김에 1965년 홀치기 신기술인 ‘횡인교결포’에 대해 상공부에 발명특허 등록과 의장등록까지 마쳤다.

1960년대 초 신경식씨가 발명한 홀치기 특허 기술 교육을 받고 있는 여성 교육생들. ⓒ신용보 제공
1960년대 초 신경식씨가 발명한 홀치기 특허 기술 교육을 받고 있는 여성 교육생들. ⓒ신용보 제공

 

문제는 이 무렵부터 발생했다. 신씨가 도입한 홀치기 제품 수출 사업이 짭짤한 재미를 본다는 소문이 퍼지자 수많은 기업체들이 신씨가 양성한 인력을 빼가기 시작했다. 1960년대만 해도 주력 수출 품목이 섬유류와 가발 등 경공업 제품에 머물던 시절이라 어지간한 국내 대기업은 신씨가 양성한 홀치기 기술 인력에 눈독을 들였다. 이렇게 신씨의 특허를 도용해 재미를 본 국내 업체는 총 26개였다. 이들 중 삼성물산, 코오롱, 미원, 동명목재, 조선견직(부산) 등 훗날 한국의 굴지의 재벌기업으로 성장한 곳도 여럿이다. 이들은 신씨의 특허가 걸림돌이 되자 집단으로 특허 무효 소송을 냈다. 홀치기 기법이 원래 일본에서 유래한 기술이라 신씨의 독창적 기술이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업체들과 신씨의 특허 분쟁은 5년간 지리한 공방을 이어갔다. 그사이 일본에 수출한 과실은 기술과 인력을 빼내간 26개 업체가 모조리 챙겼다. 1969년 마침내 대법원은 이 특허가 신경식씨의 고유 기술이라고 손을 들어주었다. 결정적 증거는 일본 세관에서 발행한, 횡인교결포 홀치기 기법이 일본에 없는 독창적 기술이라는 증서였다.

협잡 취급을 받게 된 대법원 판결

기술과 인력을 빼앗긴 채 투자금 회수조차 불투명해 망연자실해 있던 신씨에게는 구세주 같은 판결이었다. 그는 특허권을 침해한 26개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 대법원 확정판결에 따라 이 민사소송도 신씨의 승리로 돌아갔다. 1972년 5월18일 서울 민사지방법원은 26개 회사로 하여금 신씨에게 손해배상금 총 5억22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로써 신씨는 그간의 역경을 딛고 재기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법치국가라면 그 누구도 그의 희망을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경식씨가 승소했던 1972년 대한민국은 더 이상 법치국가가 아니었다. 유신헌법을 통한 철권통치를 꿈꾸던 박정희 대통령은 첫 철퇴를 신경식씨에게 날렸다. 신씨가 손배소에서 승소한 직후인 1972년 5월30일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제5차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법원 판결에 대로하며 법무부와 상공부, 중앙정보부에 이를 뒤집도록 직접 지시를 내렸다. “홀치기 제품에 대하여 특허권을 부여함으로써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은 협잡이 통할 수 있는 법이 있기 때문이고, 특허를 준 상공부도 잘못이 있다. 상공부는 즉시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고, 법무부 장관은 이를 조사해서 보고하라.”

박정희는 대법원 판결을 부정하고 법무부 장관에게 재조사를 지시했다. ⓒ신용보 제공
박정희는 대법원 판결을 부정하고 법무부 장관에게 재조사를 지시했다. ⓒ신용보 제공

박 대통령의 특별 지시를 받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요원들을 5월31일 서울 제기동에 있던 신경식씨 자택으로 급파했다. 이들은 방송사 기자를 사칭해 신씨를 불러낸 뒤 곧장 남산 중정 지하실로 연행했다. 무수한 폭행과 협박·고문에 시달리던 신씨는 죽음의 공포 앞에 무너졌다. 그들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중정의 핵심 임무는 격노한 박정희의 심기 관리를 위해 신경식씨로부터 홀치기 공법 관련 특허 포기 및 민사 손해배상 승소액을 모두 포기한다는 각서를 받아내는 것이었다. 중정에 끌려간 지 닷새 만인 6월5일 신씨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앞으로 소 취하 각서와 특허권 포기 각서를 제출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신씨 외에도 그에게 홀치기 공법 특허를 내준 상공부 특허국 심판 공무원들도 함께 연행됐다. 중앙정보부는 이들을 강도 높게 조사한 뒤 모두 공직에서 추방시켰다. 이후락 정보부장은 신씨의 홀치기 특허를 승인해준 상공부 공무원 4명의 이름을 적시해 해임하라고 상공부 장관에게 직접 지시 공문을 내려보냈다. 인사 조치 결과를 정보부장이 정해준 기한 안에 보고하라는 지시까지 담았다. 이에 상공부는 중정의 지시대로 멀쩡한 특허국 심판관 4명을 해임하고 이후락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중정은 신씨의 재산을 강탈한 것도 모자라 범죄자로 만들어 영원히 재기 불능 상태에 빠뜨리기 위해 더한 불법을 일삼았다. 6월4일 중정은 이미 사법적으로 최종 승소한 홀치기 특허 소지자 신경식을 구속하도록 검찰에 조치했다. 중정의 조사 보고서를 받은 검찰은 별도 조사도 없이 서울형사지법에 신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이날 영장 담당 당직판사는 임대화 판사였다. 임 판사는 밤에 집으로 영장을 들고 찾아온 검사를 돌려보냈다. 청구 내용을 양심상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자 중정과 검찰은 이튿날 다시 영장을 청구해 다른 판사로 하여금 기어이 신씨를 구속하도록 했다.

이 사건으로 양심적인 판단을 한 임대화 판사는 박정희 정권에 밉보여 그해 법관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당시 판사 재임용권을 대법원장에서 대통령이 갖도록 바꾼 유신헌법에 따라 박 대통령이 직접 인사 보복을 한 것이다. 법원에서 부당하게 쫓겨난 임대화 판사는 이후 8년간 야인 생활을 하다가 10·26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뒤인 1980년대에야 다시 판사로 복직할 수 있었다.

신경식씨는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다 징역 1년에 집행유예 1년6개월을 받고 풀려났다.  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신씨는 한동안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살아야 했다. 대통령이 직접 콕 찍어 철퇴를 내렸으니 마치 무슨 대역죄를 저지른 사람인 양 취급당하는 것이 기막혔다. 신씨 가족은 억울하고 분해서 견딜 수 없었다. 홀치기 사업을 처음 도입하고 인력을 양성하고 기술을 개발해 특허 제품을 만드느라 가산을 탕진했다. 이 일이 애국은커녕 그렇게 큰 죄가 된다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대통령은 대법원의 판결을 부정하고 법무부 장관에게 특허권자를 조사해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중앙정보부는 특허권자를 납치·폭행·고문하고 강압으로 소 취하서와 특허 포기 각서를 받아냈다. 검찰은 허위 공문서 작성이란 죄명으로 특허권자를 기소하여 유죄판결을 받게 만들었다. 아무리 정경유착이 심한 군사독재 체제라고 하지만 국가기관이 멀쩡한 국민의 재산권을 강탈해 대기업들에게 넘겨준 일은 부당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피해자는 어디 하소연할 곳을 찾지 못해 벙어리 냉가슴 앓듯 살아야 했다.

1965년 5월 자신이 양성한 홀치기 기술자들과 함께한 신경식씨(맨 오른쪽).ⓒ신용보 제공
1965년 5월 자신이 양성한 홀치기 기술자들과 함께한 신경식씨(맨 오른쪽).ⓒ신용보 제공

유신정권 차원의 초법적 공작

평생 억울함을 떨치지 못한 신경식씨는 2006년 제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진실화해위)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1기 진실화해위에서도 기대했던 답이 오지 않았다. 중앙정보부가 저지른 불법행위들을 입증할 증거가 없어서 진실규명이 곤란하다고 각하한 것이다. 마지막 기대를 걸었던 신경식씨는 절망했다. 그는 평생 소원해온 박정희 정권의 횡포로 인한 억울한 피해와 불명예의 한을 풀지 못한 채 2015년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눈감기 전 신경식씨는 아들 신용보씨를 머리맡에 불러 앉혔다. “차마 눈을 못 감겠구나. 아비가 떠난 뒤라도 대를 이어 네가 이 문제를 해결해다오.” 신용보씨는 아버지의 유언을 깊이 새겼다. 그는 이때부터 박정희와 중앙정보부의 책임이 담긴 문서를 찾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당시 박정희의 직접 지시가 담긴 회의 자료와 홀치기 공법에 관한 각종 국내외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다. 2020년 제2기 진실화해위가 꾸려지자 신용보씨는 대를 이어 다시 진상규명 신청서를 제출했다. 새로운 자료들을 첨부해 제출하자 이번에는 진실화해위가 적극 움직였다. 국가정보원에 이 사건 관련 중앙정보부 내부 문건을 공개해달라고 요청해서 받아낸 것이다. 신경식씨의 홀치기 특허 강탈을 둘러싼 유신정권 차원의 모든 초법적 공작 내용은 국정원이 보관하고 있던 중앙정보부의 공작 기록이 공개됨으로써 백일하에 드러났다. 중정은 당시 신씨의 권리 포기 각서를 받기 위해 조직적으로 불법 관여해 특허권 포기와 소 취하를 받아낸 것이다. 특허권 수사 권한을 갖지 않은 중정이 불법 수사에 개입해 검찰에 인계하고, 기소를 통해 유죄판결을 받게 했으며, 그로 인해 피해자에 대한 재판은 불법 수사로 오염됐던 사실이 밝혀졌다.

지난 2월15일 진실화해위는 앞서 1기 진실화해위가 2007년 이 사건을 각하 결정한 데 대해 고인과 유족에게 사과했다. 이어 이 사건에 대해 51년 만에 “대통령과 중앙정보부, 상공부 등 국가기관이 조직적으로 개입해 직물 특수염색 기법인 일명 ‘홀치기’ 발명자 고 신경식의 특허권 관련 소 취하를 강요해 사인의 재산권을 탈취한 사건”이라고 진실규명을 결정했다. 또 국가는 건실한 발명가의 재산권을 강압적으로 탈취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침해를 사과하고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피해회복을 위한 실질적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이어서 해당 사안에 대해 아무 권한이 없는 중앙정보부가 개입해 불법 체포, 불법 수사를 하고 강요행위 등을 범한 사실도 드러났으므로 국가는 재심을 통해 고 신경식의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아울러 섬유 수출 기업들도 사익을 위해 대통령에게 청탁해 국가 공권력 남용을 부추겨 피해자의 재산권과 인권을 침해했기 때문에 해당 기업들과 그 연합체 또는 법적 승계자들은 공식 사과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해당 기업에는 삼성물산, 코오롱, 미원, 동명목재, 조선견직(부산) 등 굵직한 대기업이 포함돼 있다.

진실화해위에서 받은 진실규명 결정문을 들고 〈시사IN〉을 찾은 신용보씨는 이렇게 말했다. “지하에 계신 아버지께서 편히 눈을 감으실 수 있게 해드려 그나마 다행이다. 과거 정경유착으로 남의 재산을 강탈해 부를 쌓은 기업들, 그리고 그들의 연합체인 무역협회는 반드시 사과하고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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