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3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대학생 강제징집 및 프락치 강요 공작 사건 진실규명 결정 발표 기자회견’이 열렸다. ⓒ김흥구

1970~1980년대에 학생운동을 벌이던 대학생들을 강제로 군대에 끌고 가 고문·협박·회유를 통해 전향시킨 뒤 ‘프락치(밀정)’로 활용한 ‘대학생 강제징집 및 프락치 강요 공작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11월23일 제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정근식, 이하 진실화해위원회)는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녹화·선도공작 피해자 2921명의 명단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또 이미 알려진 것과 달리 강제징집은 1984년 끝난 것이 아니라 ‘선도공작’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노태우 정권 시기인 1989년 10월 입대자까지 실시된 것으로 밝혀졌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을 ‘국가 공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이라 결론 내리고, 피해 구제를 신청한 187명에 대해 중대한 인권침해를 당한 피해자로 인정해 국가가 피해 구제를 위한 적절한 조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대학생 강제징집 및 프락치 공작의 연원은 1971년 박정희 정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신 독재체제 선포를 앞둔 박정희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생 시위가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하고, 1971년 10월5일 학원질서 확립을 위한 특별명령을 내린다. 서울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서울대·고려대·연세대·성균관대·외국어대·경희대·서강대 등 7개 대학에 군병력을 투입해 학생 1889명을 무차별 연행했다. 이렇게 예비검속에 걸린 학생들 가운데 160여 명이 곧바로 군대에 끌려갔다. 군사정권이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자행한 대학생 강제징집의 효시였다. 이어 1974년 대통령긴급조치 9호를 선포한 박정희 정권은 학사행정 전반에 개입해 휴교령과 제적 등 강도 높은 징계 조치를 취한 뒤 유신 반대를 외치는 대학생들을 강제징집했다. 당시 병역법은 금고 6개월 이상의 형을 받은 자는 입영 대상에서 제외하도록 돼 있었지만, 긴급조치 9호 위반자에 대해서는 수형 생활 후 만기 출소자까지 모조리 강제징집했다.

2021년 2월24일 열린 ‘녹화·선도공작 의문사 사건 피해자 진실규명 신청 접수’ 기자회견. ⓒ연합뉴스

징병 절차 무시하고 최전방 배치  

1979년 10·26사건으로 박정희 유신체제가 무너진 후 등장한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 ‘5월 광주’를 유혈 진압하면서 정권 찬탈 음모를 노골화했다. 신군부는 대학가의 민주화운동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철저하게 압살했다. 그 과정에 보안사를 이용한 강제징집과 프락치 공작이 주요한 수단으로 등장했다. 신군부의 첫 강제징집은 5·18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뒤 실시됐다. 1980년 9월 ‘체육관 대통령’으로 취임한 전두환은 5·18 이후 체포된 다수 학생들을 기소유예나 공소취하, 공소기각 등으로 석방해 군에 징집했다. 그해 9월4일에는 계엄포고령 위반자 등 64명이 집단 징집됐다.

군사정권에 대한 학생운동의 저항이 거세지자 전두환이 직접 나섰다. 그는 1981년 4월2일 국방부 장관에게 ‘소요 관련 학생들은 전방부대에 입영 조치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5공화국 시기 강제징집은 국방부-내무부-병무청-법무부-문교부-대학 등이 총동원된 조직적 합작품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체포 등을 통해 입영 대상자의 신병을 확보했다. 또한 병무청에 군 입영 대상자 명단 및 입영 예정 시기를 통보하는 일까지 했다. 입영 대상자에게 입영 지원서를 받아 부대에 제출하고, 군부대까지 호송하는 것도 경찰의 역할이었다. 국민의 생명과 신체를 보호할 의무가 있는 경찰이 대학생 강제징집의 ‘행동대’ 노릇을 한 것이다. 현역 입영 대상자가 아닌데 강제징집된 후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다 의문의 죽임을 당한 이윤성씨 역시 학생운동을 하다 경찰 사복 체포조(백골단)에 잡혀 군에 끌려갔다.

1980년대 강제징집은 불법적·무차별적 인권유린 방식으로 이뤄졌다. 연령·신체 조건에 상관없이 징병 절차를 무시하고, 경찰 등 수사기관에서 연행한 후 강제로 징집해 무조건 최전방에 배치한 것이다. 성균관대 81학번 박경석씨는 키·몸무게·나이 모든 면에서 군 면제 해당자였다. 강제 입대 후 담당 군의관이 신체검사를 실시해 도저히 군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내리고 돌려보냈다. 서울 성북경찰서는 귀가한 박씨를 다시 체포한 뒤 부모를 불러냈다. 부모에게 자원입대서 사인을 받아 강제 입대시켰다. 강원대 81학번 최종만씨도 이미 병무청에서 실시하는 신체검사를 통해 군 면제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그 후 학내 시위에 가담한 혐의로 경찰에 끌려간 그는 1982년 강제징집되었다. 전방부대에서는 최씨가 입대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경찰이 찾아와 가족을 회유해 자원 입대서에 사인하게 한 뒤 이번에는 방위병으로 강제징집했다.

학생운동과 상관없는 엉뚱한 사람을 끌어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서울시립대 79학번 정 아무개씨는 입사 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종로3가를 걸어가던 도중, 근처에서 발생한 가두시위 참여자로 오인받아 경찰에 붙잡혀 강제징집되었다. 또 연세대 80학번 최 아무개씨는 학내 시위 도중 부상을 입은 학생을 발견해 교내 보건소로 이송해주다가 경찰에 붙잡혀 바로 강제징집됐다.

대학가 시위가 이어지면서 1982년 9월만 해도 학생운동 출신 강제징집자가 600여 명에 이르렀다. 보안사는 그해 11월 심사과를 통해 ‘녹화사업 기본계획’을 세운 다음 학생들의 사상개조와 프락치 공작에 나섰다. ‘녹화사업’은 보안사령부가 강제징집자들로 하여금 학원·노동·종교 등 사회 각 분야의 민주화운동 세력 안에서 프락치 활동을 하도록 강요했던 사건이다. 강제징집과 마찬가지로 프락치 공작도 전두환의 지시에서 출발했다. 당시 보안사 대공처장이던 최경조는 “보안사 간부 초청 청와대 만찬에서 운동권 출신 입대자들이 ‘불온 낙서’를 한다는 얘기가 나오자 전두환 대통령이 ‘야 최경조, 너 인마 뭐 하는 거야’라며 질책했다. 그래서 그런 계획을 세웠다”라고 밝힌 바 있다.

녹화 공작은 보안사가 경기도 과천과 서울 퇴계로 진양상가에 사무실을 두고 진두지휘했다. 가혹 행위와 고문이 수반된 프락치 만들기 공작이었다. 계급과 상명하복으로 상징되는 군 위계질서 틀 안에서 녹화사업 대상자들은 부당한 요구에 대한 자기방어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피의자로 간주돼 양심에 반하는 진술을 강요받았고, 하루에 반성문을 수십 장씩 작성해야 했다. 특히 학내 동아리(서클) 활동 등에 대한 조사를 받으면서 동료 선후배들의 활동과 발언 내용을 다 보고하게 해 도의적 죄책감과 심한 자괴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프락치 공작 피해자 정 아무개씨는 자신이 겪은 녹화사업 경험담을 이렇게 증언했다. “보안사 대공과에는 과천분실과 진양분실이 있는데, 프락치를 만드는 곳이었다. 과천분실에서 처음 만난 권 부장이라는 사람이 진양분실에 나타나 나에게 구체적 지시를 했다. 전국복학생협의회와 총학생회 대표자회의 회의록을 빼내 오라는 것이었다. 매일 휴가증을 끊어줘 들고 나갔다.” 그는 처음에는 양심에 꺼려져 프락치 활동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동시상영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종일 다방에서 소일하다가 신문에 난 학생운동 관련 기사를 보고 마치 서클 선배를 직접 만나서 들은 이야기처럼 각색해 보고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들통 났다. 각색이라는 게 걸려서 권 부장에게 곡괭이 자루로 맞았다. 권 부장은 곡괭이 자루를 오금에 끼워놓고 무릎 꿇린 다음 그를 올라타 짓밟았다. 고문과 협박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그는 제대할 때까지 프락치 활동을 해야 했다. 그 악몽이 평생 트라우마로 남았다.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 추진위원회’의 조종주 사무처장. 그는 군사정권 시절 신체검사도 없이 군에 징집되었다고 말했다. ⓒ시사IN 조남진

프락치 활동 의심받는 김순호 경찰국장

4·19혁명 이후 학생운동 역사는 강제징집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녹화사업 피해자 중 이후 민주화와 사회변혁 운동을 계속한 이들도 많다. 일부는 노선을 달리했다. 국민의힘 심재철 전 의원과 차명진 전 의원도 1980년 강제징집 피해자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뒤 정치적 노선을 바꾸었다.

일부 강제징집 녹화사업 피해자는 사회에 나와서도 계속 프락치 활동을 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논란이 크게 일었던 김순호 행정안전부 경찰국장이 그런 경우다. 성균관대 82학번인 김순호 국장은 학생운동 관련해 강제징집된 후 제대해 동료들과 노동운동에 투신한다. 1988년 ‘인천부천노동자회(인부노회)’에서 지도부로 활동하던 그는 1989년 경찰의 수사로 당시 대부분의 동료들이 체포 구속될 때 잠적했다. 인부노회 사건 직후 김씨는 곧바로 경찰에 경장으로 특채됐다. 경찰이 인부노회 사건을 터트린 때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대공 분야가 극도로 위축된 시점과 맞물린다. 옛 동료들은 ‘경찰이 반전을 위해 인부노회 사건을 기획했고, 그 중심에 김순호씨가 자리했다’고 오랫동안 믿고 있다. 이에 대해 김순호씨는 ‘인부노회 사건 때 자신은 프락치 역할을 하지 않았고, 경찰에 특채된 것도 당시 소련 붕괴 등 사회주의권 변화를 보고 기존 노선과 가치관이 바뀌어서였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피해자 단체(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 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하는 조종주씨는 “그것은 구차한 변명이다. 오히려 녹화 공작 생활로 인해 겪은 좌절이 그를 계속 그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라고 말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위법한 공권력에 의해 수많은 피해자들이 불법 구금과 불법 조사, 사찰 강요와 폭력 등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라며 “정권 유지를 목적으로 전향을 강요하고, 프락치 임무를 부여한 국가는 사과와 함께 피해 회복 조치를 취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또 장기적으로 ‘강제징집 및 프락치 강요 공작’의 개인별 피해 사실을 명확히 규명할 수 있는 조사 기구를 설치하고,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 및 배·보상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권고했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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