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조남진

김성학씨(72·사진)는 1971년 8월26일 강원도 속초항에서 울릉도 방면으로 나가는 오징어잡이 어선 해성호를 탔다. 당시 20세였던 김씨는 해성호 김종인 선장의 아들로, 원래 속초 시내의 한 ‘전파사(전자제품 수리 판매업체)’에서 직원으로 일했다. 해당 업체 주인이 전파사 운영을 그만두려고 하자, 김씨는 이를 넘겨받을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친에게 부탁해 오징어잡이 배에 오른 것이었다.

선원 23명을 실은 해성호는 속초항을 나온 다음 남쪽인 강릉 방면으로 향했다. 조류로 인해 배가 북쪽으로 이탈할 위험을 방지하고자 당시 속초 이북에서 출항하는 모든 어선은 이 항로를 이용했다. 강릉 앞바다에서 울릉도를 향해 직선으로 달린 뒤 조업에 들어간 해성호는 사흘 만에 오징어 만선을 달성했다. 해성호가 속초항으로 향하기 시작한 날은 출항한 지 사흘 만인 같은 해 8월29일. 그러나 이날 오후 해무가 짙게 끼었다. 해성호는 안개가 걷힐 때까지 바다 가운데 닻을 내리고 표박하기로 했다. 자정 무렵 안개를 뚫고 갑자기 검은 물체가 나타났다. 무장한 북한 고속정이었다. ‘속초 배’라고 소속을 밝히자 총구를 들이대며 무조건 따라오라고 했다.

이렇게 납치된 해성호는 다음 날(8월30일) 오전 8시경, 북한 강원도 장진항 부근의 한 작은 항만에 도착했다. 납북 과정에서 김종인 선장은 아들 성학에게 북에서 조사받을 때 부자 관계가 아닌 선원으로 행세하라고 당부했다. 이윽고 북한 해군 장교가 나타나 서울 말씨로 “수고했다”라며 환영했다. 이렇게 납북된 해성호 선원 23명은 금강산휴양소에 수감되어 3개월 동안 조사를 받았다. 금강산휴양소에는 해성호 등 그 무렵에 납북된 강원도 속초·고성 지역 어선 5척의 선원 120여 명이 함께 머물렀다.

당초 김성학씨는 잠시 조사받은 뒤 곧 송환될 줄 알았다. 그러나 북측은 조사를 마친 3개월 뒤 납북 어부들을 평양 근교의 석암초대소로 옮겼다. 석암초대소는 서해상에서 조업하다 끌려온 한국 어부들로 득시글거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북측은 납북 어부들을 상대로 북한 체제의 우월성 선전 교육을 집중적으로 실시했다. 담당 지도원은 수시로 “여러분을 남조선 고향으로 돌려보내줄 것이다”라고 강조하며 안심시켰다.

그러나 ‘선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숨겼다가 조사 과정에서 들통 난 김성학씨와 그의 부친은 심한 고초를 당했다. 더욱이 함경도 출신 실향민인 김종인 선장은 ‘월남한 배신자’라는 이유로 더 심한 박해를 감당해야 했다. 김성학씨는 억류되어 있는 동안 고의로 기물을 부수거나 저수지로 뛰어들겠다고 위협하는 식의 행위로 북한 당국의 골치를 썩였다. 말썽꾸러기처럼 굴면 북측이 ‘이용 가치가 낮다’고 평가해서 고향으로 빨리 보내줄 것이라고 순진하게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만 괴로울 뿐 소용없었다.

1972년 7월4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넌 무조건 간첩이어야 돼”

김성학씨는 북측이 ‘왜 이렇게 많은 한국 어선을 한꺼번에 납치했을까’ 의아해했다. 지금도 북측의 확실한 의도를 알기는 힘들다. 다만 그 무렵, 남북적십자회담이 시작되면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 박성철 부상이 번갈아 평양과 서울을 왕래하고 있었다. 김성학씨가 납북된 지 10개월여 만인 1972년 7월4일, ‘7·4 남북공동성명(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고위급 인사들이 만나 합의해 발표한 통일 관련 공동성명서)’이 발표됐다. 그로부터 두 달여 뒤인 1972년 9월7일, 북측은 동해안 군사분계선에서 납북 어부들의 신병을 한국 해군에 넘겼다.

납북된 지 1년1주일 만에 돌아온 선원들은 꿈에 그리던 가족들부터 만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을 맞은 것은 대공 수사관들이었다. 어부들은 속초시청 3층에 마련된 조사실에 감금됐다. 납북 경위나 북에서 겪은 고초 등에 대한 객관적 조사를 받을 줄 알았다. 하지만 공안당국은 모든 납북 어부를 ‘자진 월북’으로 못 박으면서 강도 높은 취조를 벌였다. ‘북에서 무슨 공작교육을 받았고 어떤 지령을 받고 돌아왔는지’ 모두 털어놓으라며 윽박질렀다. 납북 어부들에게 적용된 혐의는 반공법·국가보안법·수산업법 위반 등이었다. 일부 어부들은 그중 한두 개의 죄목으로 처벌받았다. 김성학씨는 국가보안법상 잠입탈출죄를 적용받아 구속 기소됐다. 재판 끝에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으로 풀려났다. 하지만 부친인 김종인 선장은 징역 2년 형을 마치고 나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김성학씨가 석방된 뒤 그와 가족에 대한 극심한 사찰이 뒤따랐다. 어디를 가든 신고해야 했고, 감시와 미행이 붙었다. 그 와중에도 김씨는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방위 제대 무렵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에서 김성학씨를 찾아와 ‘HID 요원(북파공작원)’으로 일할 것을 제의했다. 김씨가 망설이자 회유와 협박을 병행했다. “너는 평생 사찰을 받고 살아야 할 운명인데 우리랑 같이 일하면 사찰을 면제해주고 적잖은 돈도 벌게 해주겠다.” 결국 김씨는 HID에 끌려가듯 입대해 성공적으로 북파공작원 교육훈련을 마쳤다. 교육훈련 종료 이후엔 정보사의 배치를 받아 2년 동안 모범적으로 근무한 뒤 사회로 복귀했다. 하지만 정보사의 약속과 달리 김씨에 대한 사찰은 멈추지 않았다. 정보사 퇴직 후 김씨가 어렵사리 취직해 다니던 회사에 경찰 정보과 형사들이 들이닥쳐 사장에게 그의 신분을 알리는 바람에 해고당하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김성학씨는 1980년대 초에 결혼을 하고 ‘보통 사람’으로서의 일상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처가의 도움으로 경기도 하남시에 둥지를 틀고 대우전자 지역 대리점을 차려 악착같이 일했다. 그 덕분에 경제적으로 이럭저럭 자리를 잡고 첫딸도 낳았다. 그렇게 살아가던 중인 1985년 12월2일, 또다시 가혹한 운명의 시련을 맞았다. 당시 경기도경찰청 대공분실에 근무하던 고문 기술자 이근안이 김씨를 ‘훌륭한 먹잇감’으로 점찍은 것이다. 이날 그는 이근안의 부하들에게 납치되었다. 감금된 장소는 인천에 설치되어 있었던 경기도경 대공분실 지하였다. 이근안은 김성학씨에게 다짜고짜 간첩 행위를 자백하라고 강요했다. 이유도 근거도 없었다. “넌 무조건 간첩이어야 돼.” 이 말 한마디를 끝으로 구타와 고문이 뒤따랐다.

1981년 5월19일, 납북 255일 만에 귀환하는 제2남진호. ⓒ속초문화원 제공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고문이 대공분실에서 72일 동안 지속됐다. 이근안 일당은 시나리오를 미리 만들어놓고 있었다. 김씨에게 시나리오대로 “간첩과 접선해서 공작금을 받고 국가 기밀도 넘겨주었다”라는 내용으로 자술하라고 요구했다. 부인하면 온갖 고문 기술을 동원해 김씨를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밥 굶기기, 잠 안 재우기, 거꾸로 매단 채 고춧가루 물을 코에 붓기, 전기 고문 등의 순서로 고문이 이어졌다. 정보사의 HID 교육으로 단련된 강인한 김씨의 체력도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6차례에 걸친 전기 고문 끝에 뼈와 가죽만 남은 상태에서 김씨는 결국 이근안이 날조한 간첩사건을 인정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신음 중이던 그날 밤, 김성학씨를 감시하던 경찰관 한 명이 조용히 다가와서 말했다. “너는 HID 출신이니 그곳에서 난수표 취급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내일 수사관들이 ‘난수표를 만들어보라’고 다시 고문할 계획이다. 난수표까지 거짓으로 만들어주는 일은 절대 하지 마라.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죽는다. 밖에 나가면 여기 ‘사장(이근안)’ 이하 ‘직원(수사관)’들을 모두 고소해라. 좋은 세상 오면 반드시 고소해라.”

그 경관의 이름은 김용세였다. 김성학씨에겐 김용세씨의 목소리가 하늘이 보낸 천사의 소리로 들렸다. 김용세 경관은 김성학씨에게 ‘머릿속에 새겨두라’며 이근안과 경기도경 대공분실 고문 경찰관 9명의 이름을 또박또박 불러주었다. “사장 이근안, 부하 이우세, 경무현, 김병익, 황원복, 채제복, 윤여경, 김재곤….” 김성학씨는 이근안과 그 부하들의 이름을 몇 날 며칠 동안 외우고 또 외웠다.

고문 72일 만인 1986년 2월 이근안이 조작한 대로 김성학씨는 간첩 혐의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1심 재판 도중 그는 이근안과 고문 경찰관들의 명단을 면회 온 아내에게 몰래 넘겼다. 김성학 부부는 이근안 일당에 대해 불법체포, 독직 가혹행위, 허위공문서 작성, 권리행사방해 등의 혐의로 고소장을 냈다. 경기도경 대공수사팀을 지휘해 김성학씨를 기소했던 수원지검 손진영 검사도 함께 명단에 넣었다.

그런데 김성학씨의 이 고소 사건을 배당받은 검사가 의외의 인물이었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 일당의 날조 수사에 따라 김씨의 간첩 혐의 등을 가리던 재판에서 ‘공판 검사(수사 검사가 피의자를 조사해서 공소장을 법원으로 보내는 반면, 공판 검사의 역할은 이 기소장을 기반으로 법정에서 피의자의 혐의를 입증하는 것)’를 맡은 손우태씨였다. 김성학씨의 처지에선 자신에 대한 터무니없는 모함(간첩 혐의 등)을 법정에서 ‘진실’이라고 우기던 검사가, 이번엔 그 모함을 ‘거짓’으로 입증해야 하는 일을 맡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김성학씨는 손우태씨에 대한 검사 기피 신청을 세 차례나 냈지만 묵살됐다.

적절한 사과, 합당한 피해 배상 없었다

성남지청에 자수했던 고문 기술자 이근안이 1999년 10월28일, 서울지검에 도착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씨가 우려했던 대로 손우태 검사는 김성학 부부가 고소한 손진영 검사를 제대로 된 조사 한번 없이 무혐의 처리했다. 이근안 등 경기도경 대공수사관들(모두 16명)의 고문과 간첩조작 등 불법 인권유린 행위에 대해서도 기소를 유예해버렸다. 그 이유도 황당했다. “대공 계통 근무 경관들이 국가에 과잉 충성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간첩 오인 사건이다.” 이러한 ‘봐주기 수사’에 격분한 김성학씨는 항고, 재항고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조치는 모두 취해봤다. 그러나 검찰은 계속 이근안 등의 범죄를 감쌌다.

1986년 여름, 김성학씨는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이근안 일당이 고문으로 그의 혐의를 날조한 상황이 워낙 터무니없어서 전두환 정권의 법원에서도 차마 그를 가둘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씨의 몸은 고문 후유증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아내는 생업을 이어가야 했으므로 노모가 간병을 맡았다. 그가 고문을 받으며 묶여 있던 224일 동안 생계 터전이던 대우전자 대리점이 문을 닫았다. 고문으로 인해 노동능력도 상실했다. 자신을 고문하고 때렸던 자들, 이들을 감싼 검찰에 대한 분노와 원한으로 세상을 살아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김씨는 죽기로 결심했다. 설악산에 들어가 북파공작원 교육 당시 배운 대로 파낸 굴속에서 음독하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위로 이뤄진 설악산에선 굴을 파고 들어갈 만한 공간을 찾지 못해 발길을 돌렸다.

1988년 집권한 노태우 정부 들어 김성학씨는 무너지려는 마음을 추스르며 다시금 힘을 냈다. 이근안에게 당한 고문과 간첩조작 사실을 A4 용지 145장에 적어 법원에 ‘재정신청(검찰이 어떤 사건에 대해 기소하지 않는 경우, 고소·고발인이 검찰의 이런 결정이 타당한지 직접 법원에 문의하는 절차. 법원이 재정신청을 받아들이면, 검찰은 해당 사건에 대해 반드시 기소해야 함)’을 냈다. 법원은 김씨의 재정신청을 받아들였다. 검찰은 김씨 사건 피의자들을 기소해야 하는 처지로 몰렸지만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이 사건은 지금 처리 안 됩니다. 좀 더 기다리셔야 합니다’라며 김씨를 달랠 뿐이었다.

이 무렵, 고문 기술자 이근안의 만행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근안이 1985년 민청련 의장인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을 고문한 사실이 알려지면서였다. 이근안은 1988년 12월 김근태 고문 사건이 쟁점화하자 잠적했다. 검찰, 경찰, 안전기획부(지금의 국가정보원) 등 공안기관에서 이근안을 잡지 않고 보호해준다는 말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공안기관의 ‘이근안 봐주기’는 결국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 이후에야 막을 내렸다. 검찰이 드디어 이근안에 대한 본격 수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김근태 고문 사건에 대해서는 이근안의 공소시효가 이미 만료된 상태였다. 반면 ‘김성학 사건’은 그가 재정신청을 낸 시점이 기준이 된 덕분에 공소시효가 살아남아 있었다. 이근안에 대한 법적 처벌이 가능한 유일한 사건이었던 셈이다.

검찰은 이근안이 가한 고문의 실제 정황을 확인하기 위해 김성학씨를 조사하면서 김근태 당시 의원을 참고인으로 불렀다. 1988년 잠적한 이근안은 10년10개월 만인 1999년 10월 홀연히 나타나 검찰에 자수했다. 법원은 ‘김성학 고문 사건’과 관련, 고문 경관들 가운데 이른바 단순 가담자에게는 집행유예, 이근안에겐 7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경기도 여주교도소에서 2006년 11월 만기출소한 이근안은 현재 목사 행세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고문 피해자 김성학씨에 대한 국가의 적절한 사과나 합당한 피해 배상은 없었다. 그는 지금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며 국가폭력의 상처로부터 치유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2010년엔 국가를 상대로 고문 피해 배상 민사소송을 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 시절의 법원은 시효 만료를 이유로 김성학씨의 배상 소송을 기각했다. 간첩사건 무죄 확정판결을 받은 1988년으로부터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는 것이다. 김성학씨는 최근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에 동료 납북귀환 어부들과 함께 자신들이 당한 납북 어부 간첩조작 사건에 대한 진상을 규명해달라는 내용의 진정서를 제출했다. 부당한 국가폭력에 맞서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 대한 법적 처벌에 기여한 납북 어부 김성학씨의 싸움은 납북 사건 발생 이후 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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