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서울 덕수궁 앞에서 보수 기독교 단체 회원들이 동성애 반대 및 규탄 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종교’는 ‘신성하고 절대적이며 영적인, 특별한 숭배의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그 무엇과 인간 존재가 갖는 관계’이다. 대개 삶과 사후 운명에 대한 궁극적 관심과 관련되어 있고, 많은 문화권에서 이는 신 혹은 영혼에 대한 태도와 관계 측면에서 표현된다.

이런 정의만 놓고 보자면, ‘건강정치노트’라는 이 지면에 종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소재다. 종교가 믿음, 영성, 자기 수양의 실천에 국한된 내면의 신념 체계라면 이 자리에 등장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종교가 개인의 내면에만 머물러 있었던 적은 결코 없었다. 현실에서 종교는 신자들 개개인과 신앙 공동체의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치고, 또 이를 벗어나 사회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쳐왔다. 해방 운동이든 억압의 구조이든 말이다.

전 세계 인구 84%가 종교를 가지고 있다. 종교인 자신이든 전체 공동체든 사람들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종교는 중요한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성장하고 살아가며 일하고 나이 드는 매일의 환경이며, 생활환경을 결정짓는 힘이자 시스템”이라는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 정의에 종교는 충분히 부합한다.

지금까지의 연구들은 대개 종교적 참여, 특히 예배 참석이 더 나은 신체적·정신적 건강과 연관성이 있다고 보고해왔다.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기대수명이 길고 사망률이 낮으며, 자살이나 우울증 문제도 덜 경험하고 정신건강 수준이 높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연관성이 실제 ‘인과적 효과’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일수록 규칙적으로 예배에 참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원인-결과의 방향이 반대일 수도 있다. 이러한 방법론적 문제를 극복한 연구는 드물지만, 어쨌든 건강에 미치는 종교의 긍정적 영향은 충분히 납득할 법하다. 예배 참석이라는 활동을 통해 공동체와 연결되고 사회적 지지를 얻는 일은 꼭 종교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건강과 안녕에 도움이 된다.

종교의 또 다른 중요한 기여는 지역사회 종교기관들이 보건의료·돌봄 서비스를 직접 제공하거나 건강 증진 활동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공간이라는 점이다. 예컨대 공적 의료보장 체계가 확립되지 않고 인종 간 불평등이 심한 미국 사회에서 흑인 공동체 교회는 무료 진료소, 예방접종 클리닉을 운영한다. 무료급식을 제공하고, 건강 상담, 건강 증진, 사회복지 연계 활동도 수행해왔다. 가톨릭은 전 세계에서 5300여 개 병원을 운영하는 국제적으로 가장 큰 보건의료 제공자 중 하나이기도 하다.

종교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이들의 건강과 생명, 안전의 권리를 옹호하는 데에도 큰 기여를 했다. 서슬 퍼런 군사독재정권 시절, 종교는 힘없는 노동자와 가난한 이들의 지원군이자 울타리가 되어주었고, 세월호 참사 현장, 산재 노동자 추모의 현장을 함께 지켜주었다.

반면 종교의 도그마가 인간 존엄과 건강권을 직접 해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집단 자살이나 테러, 조직적 성착취 같은 사이비 종교의 극단적 폐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아와 전염병, 헛된 폭력으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십자군 전쟁, 무고한 여성들을 고문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마녀사냥, 남북 아메리카 선주민(先住民) 대량 학살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다.

현재진행형인 종교의 건강 억압

현대사만 보아도, 누구도 ‘사이비 종교’라 칭하지 않는 기성 종교들이 행한 생명과 건강의 억압들이 적지 않다.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 점령과 억압, 중동지역의 타래를 풀기 어려운 장기 내전, 미얀마의 로힝야 민족 탄압 등 심각한 인명 피해와 인권침해를 가져온 현대사의 비극적 사건들에는 어김없이 기성 종교가 개입되어 있었다.

최근 캐나다 건국 초기 가톨릭교회가 선주민 어린이를 납치해 기숙학교에 강제수용하고 학대한 사실이 밝혀졌다. 왼쪽은 6월30일 퀘벡주 한 가톨릭교회 앞에 추모의 의미로 놓인 아이들 신발. ⓒEPA

과거 세계 여러 곳에서 가톨릭 사제들이 저지른 아동 성범죄의 실상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편부모와 살고 있거나 집안이 가난한 아이들, 교회에 더욱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어린이들을 범행의 표적으로 삼았다. 사건이 알려진 이후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처벌은커녕 교단이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국가기관의 수사마저 방해하기도 했다. 성(聖)이 아니라 속(俗)의 기준으로 보아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최근에는 캐나다 건국 초기 가톨릭교회가 선주민 어린이들을 가정에서 ‘납치’하여 기숙학교에 강제수용하고, 집단적으로 학대하거나 사망에 이르게까지 했다는 사실들이 드러나기도 했다.

종교의 건강 억압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특히 성소수자들에 대한 성적 편견, 성차별주의에서 비롯된 여성의 성·재생산 권리 제약에 기성 종교가 앞장서고 있다. 정도만 다를 뿐 이러한 차별과 편견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 주요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된다.

예컨대 에이즈가 20세기 말 처음 등장했을 때 기독교 논평가들은 이것이 동성애, 간음, 혼외 성관계라는 ‘죄악’에 대한 신의 형벌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이러한 편견은 미국 정부의 연구개발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브라질에서는 HIV 감염 예방을 위한 콘돔 사용 캠페인 과정에서 공중보건과 가톨릭교회가 충돌하는 일이 벌어졌다. 콘돔 사용이 ‘문란한 성생활’을 장려한다며 가톨릭교회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성적 편견을 앞세워 차별금지법 제정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해온 세력이 보수 기독교 집단이다. 이들은 퀴어 퍼레이드가 열리는 현장이면 달려가 북을 치고 부채춤을 추면서, 때로는 공공연한 폭력을 사용하면서 행사를 방해했다. 성소수자 차별을 금지하는 인권조례나 차별금지법을 발의하는 단체장과 의원들에게 집요한 항의를 퍼붓고 있다. 극성맞은 신자 한두 명의 예외적 일탈이라고 보기 어려운 수준이다.

필자도 오랫동안 여러 매체에 글을 써왔지만 몇 줄 ‘악플’이면 모를까, A4 용지 네 쪽이 넘는 항의 이메일을 받은 것은 유일하게 성소수자 건강권을 옹호하는 글을 썼을 때였다. 여러 해가 지났음에도 그 이메일 내용이 생생히 기억난다. 너무나 절절한 신앙심 고백과 그에 못지않게 너무나 디테일한 성행위 묘사가 부조리극의 한 장면처럼 한 통의 이메일 안에 서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성소수자들이 얼마나 성적으로 문란한 존재들인지, 동성애가 왜 죄악인지 설명하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상세한 묘사를 하고 있었는데, ‘음란마귀’에 사로잡힌 것은 정작 항의 이메일 발신자가 아닐까 하는 무엄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종교의 이름으로 이토록 다른 이를 악마화하고 단죄하는 데 열정을 쏟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류 폭력 감소의 역사를 탐구한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호모포비아에 기반한 폭력은 인간 폭력의 카탈로그에서 매우 신비로운 위치를 점한다고 지적했다. 왜냐하면 가해자가 이런 폭력을 통해 얻을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사회 불평등 분야의 석학 예란 테르보른 교수는 저서 〈불평등의 킬링필드〉에서 사디스트가 아닌 다음에야 정체성에 기반한 실존적 평등화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썼다. 제로섬 게임인 소득불평등과 달리, 동성애자 등 사회적 소수자들의 실존적 평등화는 기득권층의 유리한 삶의 기회 자체에 변화를 가져오지 않기 때문이다.

쉽게 설명하면, 동성애가 누군가에게는 문화적으로 꺼림칙한 것일 수 있지만 도시의 부유한 신자유주의 엘리트들에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뿐더러 계몽된 자신을 뽐낼 기회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기득권층에게 실존적 평등주의는 ‘비용이 들지 않는 평등주의’의 선물이며, 이를 통해 좀 더 논쟁적이고 근본적인 불평등 이슈에 대한 침묵이라는 혜택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서구 맥락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인지, 한국에서는 해외 명문대 경제학 박사 출신 (구)민정당 계열 국회의원도, 장관까지 지낸 카리스마 넘치는 민주당 계열 국회의원도 유독 동성애 이슈 앞에서는 하느님의 순한 양으로 돌변한다.

동성애 반대가 종교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주장은 사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성서에는 아내를 손님에게 내어주고 자식의 목숨을 제물로 바치는 엽기적 사례 같은 잔혹한 폭력의 스토리가 넘쳐나지만 이것을 오늘날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도덕적 상징이나 비유로 해석될 뿐이다. 오늘날 자신들의 혐오와 편견을 정당화하고 싶을 때에만 오래된 성서의 문구를 글자 그대로 가져오는 사람들이 있다.

때로는 성서에 구체적 언급이 없는 내용도 후대에 해석이 덧붙는다. 예컨대 기독교 성경에서 ‘낙태’에 대한 언급은 딱 한 번 등장한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하게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낼 것이니라.” 이 구절은 어디를 봐도 태아 존중이나 낙태 금지와 거리가 멀다.

기독교가 이른바 ‘낙태 전쟁’에 뛰어든 것은 사실 생명 존중의 교리 때문이라기보다 20세기 후반 미국에서 시작된 신보수주의 동맹의 선거연합 전술과 관계가 있다. 1970년대 후반 미국에서 출현한 일군의 젊은 보수주의자들, 자칭 ‘뉴라이트(New Right)’는 이전까지 공화당의 전통적 이슈였던 세금과 인플레이션 문제가 아니라 학교 기도, 낙태라는 사회적 이슈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들은 공립학교의 기도 강요를 막고 낙태를 허용하자는 사회적 움직임에 반대하며 미국 남부와 중서부 지역, 북부 산업지대 도시 노동자 등 보수적인 민주당 지지자들을 끌어들였다. 이들은 공화당에 새로운 다수파를 만들어냈다.  이 흐름이 본격화되기 이전의 통계를 보면 국가 간섭을 싫어하는 전형적 자유주의자인 정통 공화당 지지자들은 오히려 민주당 지지자들보다 낙태 찬성 비율이 높았다. 심지어 보수주의자들조차도 낙태를 ‘법’으로 금지하는 것에는 반대가 더 많았다.

기독교가 ‘낙태 전쟁’에 뛰어든 것은 20세기 후반 미국에서 시작된 신보수주의 동맹의 선거연합 전술과 관계가 있다. ⓒ시사IN 신선영

‘낙태’라는 정치적 땔감

하지만 낙태라는 ‘정치적 땔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면서 이들은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나갔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설교를 통해 복음주의 기독교가 급성장하면서 이 문제는 경제나 외교보다도 더 중요한 정치적 이슈가 되었다. 국가가 나서서 인구통제를 명분으로 공공연하게 임신중지 시술을 시행하던 시절에 입을 다물고 있던 한국 기독교가 갑자기 태아 생명권의 수호자로 나선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사실 동성애나 낙태 이슈가 인기를 끌기 전에는 ‘빨갱이, 종북’이 한국 보수 기독교의 중요한 땔감이었다. 이슈의 이행기 동안 ‘동성애자=종북 세력’이라는 전대미문의 혼종 구호가 등장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러한 ‘종교발’ 혐오와 차별 공세가 실제 시민들의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실존 자체를 부정당하고 죄인 취급을 받으며, 때로는 학대나 다름없는 ‘전환 치료’를 강요받는 상황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건강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신의 기적이다. 필수보건의료서비스에 해당하는 ‘안전한 임신중지’ 기회를 가로막는 것은 낙태를 줄이는 데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며 여성들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에 부정적 영향만 미칠 뿐이다.

형법의 낙태죄 폐지나 차별금지법 제정 논의 과정에서 정부는 줄곧 ‘사회적 합의’를 강조해왔다. 하지만 이는 일부 종교 세력의 건강권 침해로부터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의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와 다름이 없다. 지난해 5월 국가인권위원회 의뢰로 이루어진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88.5%는 이미 차별금지법 제정에 찬성하고 있었다. 올해 5월 한국갤럽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 중 현재 믿는 종교가 없다는 사람의 비중이 60%에 달한다. 종교가 있다는 사람은 절반에도 못 미치는 40% 수준이며, 이 중 개신교, 불교, 천주교가 각각 17%, 16%, 6%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일부 기독교 분파의 주장이 정치적으로 과잉 대표되면서 시민의 존엄과 건강권을 해치는 이 상황은 종교가 얼마나 중요한, 때로는 ‘파괴적인’ 건강 결정요인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2017년 6월 서울광장에서 열린 ‘2017 생명대행진 코리아’ 집회에 등장한 팻말. ⓒ연합뉴스

얼마 전 전통 무가(巫歌)를 재해석한 밴드 ‘추다혜차지스’의 공연을 관람했다. 붉은 조명 아래, 역병의 나쁜 기운은 물러나고 좋은 일만 생기라는 절절하고 단순한 읊조림이 묘한 위로가 되는 신기한 순간을 경험했다. 그런 노랫가락이 실제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몰아내는 데 아무 효과는 없겠지만 마음을 건드리는 그 순간의 위안만은 실재였다. 바이러스와 세균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시절, 옛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초월적 존재에 간절히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게 바로 이런 것이겠구나 싶었다.

건강하기 위한 ‘도구’로 종교를 선택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종교의 유일한 효과가 건강 개선인 것도 아니다. 초월적 존재의 이름을 빌려 동료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건강과 생명을 해치는 행위가 그들이 믿는 종교의 본령이 아님 또한 분명하다.

종교를 믿는 사람의 비율이 줄어들고 있다지만, 앞으로도 오랫동안 종교는 사람들에게 소중한 삶의 의미가 될 것이다. 종교는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내면으로 돌아가야 한다. 국가는 인권보장 의무의 담지자로서 해로운 종교 세력으로부터 사람들의 건강권을 보호하는 데 적극 나서야 한다. 종교가 정치를 과잉 대표하고, 정치가 종교를 적극적으로 호명하는 곳에서 어김없이 인류의 평화가 위협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기자명 김명희 (시민건강연구소 상임연구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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