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은 2009년부터 연말 부록으로 ‘행복한 책꽂이’를 펴내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독서 리더들의 면면은 바뀌었지만, 이들이 추천한 올해의 책을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미디어에서, SNS에서 요란스럽게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동굴 속 보석처럼 조용히 반짝이던 책들이 세상에 나온 기분이다.
 

조용히 나 자신과 마주 앉을 시간을 만들어주는 한 권의 시집도 있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기록도 있다. 물론 묵직한 인문학 서적도, 당장 펼쳐보고 싶은 역사 에세이도 있다. 올겨울, 이 반짝이는 것들을 품고 따뜻한 연말연시를 보내시기 바란다. 

 

독서 리더가 꼽은 올해의 책

독서 리더 33인(가나다순):권경원 권용선 김겨울 김다은 김민섭 김민식 김세정 김소영 김용언 김주원 김현 류영재 박원순 박해성 서정화 양승훈 오지혜 유종선 유진목 유희경 이강환 이기용 이슬아 이승문 이승한 정용실 정은영 정재웅 정홍수 조형근 천호선 최현숙 하명희

 

 

〈다뉴브〉는 근자에 내가 읽은 최고의 여행서다. 이 책을 소개하기는 쉽지 않다. 방대하고 깊은 역사적·인문학적 지식과 통찰, 미술·음악·문학 등 예술 전반에 걸친 놀라운 식견과 심미안이 여행의 시간과 공기, 피곤과 황홀을 아우르는 섬세한 표현의 문장에 담겨 있어 어느 한 곳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지은이 클라우디오 마그리스는 1939년 이탈리아 트리에스테(베네치아 공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 유고슬라비아, 이탈리아 등으로 여러 차례 소속이 바뀐 이곳은 그 자체로 중부 유럽의 혼종적 역사를 함축하기도 한다) 출생으로 중부 유럽 연구가이자 작가인데, 〈다뉴브〉를 비롯한 품격 높은 에세이는 중요한 문학상과 도서상을 수상했으며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도 수차례 거론된 바 있다.

지은이는 독일 남부 도나우에싱겐(푸르트방겐의 어느 집 수도꼭지라는 설도 있다)부터 흑해에 면한 루마니아의 항구도시 술리나까지 2888㎞의 강 길을 4년에 걸쳐 따라가며 이 책을 썼다. 책은 1986년 출간되었는데, 본문 앞에 첨부된 지도에는 서독과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소비에트연방 등 지금은 사라진 국명이 보인다. 그러나 다뉴브를 따라 중부 유럽

에 얽혀 있는 길고 복잡한 민족의 이동과 섞임, 성쇠를 동반한 경계의 변천사에서 보면 이 또한 흔한 역사의 한 장일 뿐이다. 마그리스는 헝가리 시인 요제프 어틸러가 어머니의 쿠마에인 피와 트란실바니아 태생 아버지의 로마인 피를 그 자신의 핏줄 속에서 뒤섞었듯, 그의 시가 다뉴브의 물결을 승자와 패자의 뒤섞임, 민족들의 혼합과 충돌 안에서 표현했다고 전해준다. 동시에 지은이는 다뉴브를 그 무심하고 유유한 시간의 흐름, 역사라는 우월적 지위에서만 바라보는 것을 경계하며, 그때그때 그 순간을 살았던 민족과 개인의 운명과 결단, 긴박한 호흡 안에서 보고 느끼려 노력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단 하나의 차원, 순수한 현재에 역사란 없다. 파시즘이나 시월혁명은, 그 사건이 일어나는 각각의 순간에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작은 시간의 파편 속에서는 단지 침을 삼키는 입, 손동작, 창가에 서서 바라보는 시선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순간의 섬세한 참여가 이 특별한 여행서를 ‘역사적 인간’이면서 동시에 ‘시적 인간’으로 우리를 재발견하게 해준다.

다뉴브가 끝난다고 알려져 있는 루마니아의 술리나에 정작 하구는 없고, 강은 보이지 않는다. “다뉴브 강은 어디서 끝날까? 이 끊임없는 흐름에 끝은 없다. 단지 현재로 무한히 존재하는 동사만이 있을 뿐이다. 강의 지류들은 제각기 흘러가고, 거만한 하나의 통일체에서 자유로이 흩어져 나온다. 조금 빠르고 조금 느릴 뿐 각기 원하는 때에 죽는다.”

기자명 정홍수 (문학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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