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공공의료원인 경기도 파주병원에서 한 말기암 환자가 병상에 누워 있다.

“또 곡기를요? 그러다 엄니가 다시 펄펄 힘이 나서 일어나시면 그때는 큰딸이 언제까장이나 여기 곁에 남아서 뒷감당을 책임져주실라요? 그러다 아직 저렇게 기력이 허하신 양반한테 외려 해가 되시지 않을랑가 걱정이 되요마는….” 이청준의 소설 〈축제〉에서 ‘외동댁’은 늦은 밤 어머니의 곡기를 걱정하는 광주 큰시누이에게 원망스러운 듯 목청을 높인다. 노인의 아들 내외와 딸들은 며느리인 외동댁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그가 30대에 남편을 잃고 그 후로도 30년 가까이 어머니를 홀로 모셔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근 6년간 노인은 치매를 앓았다. 돌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돌아가신 줄만 알았던 87세 어머니가 극적으로 회생하자 장례를 모실 줄 알고 시골집에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은 이제 노인의 먹고 사는 문제가 난감하다. 방안에 말없이 누워 있는 어머니에게 한 번 더 곡기를 입에 넣어드리는 것이 해가 될지 득이 될지 모르겠으나, 시누이는 먹는 이야기를 꺼내면서 자식의 도리를 다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 갈등을 잘 이해하고 있는 노인의 아들은 침묵으로 자신의 입장을 정한다. 눈치를 보던 아들의 부인이 조용히 녹두 미음을 들고 와서 노인의 닫힌 입술 사이로 음식을 흘려 넣는다.

가족이 스스로 음식물을 섭취할 수 없는 노인의 먹고 사는 문제로 한바탕 시끄럽다. 미수(米壽)를 한 해 앞둔 어머니를 걱정하며 ‘윤리적’ 태도를 취하기에 급급하다. 하지만 이 상황이 노인에게도 마땅했을까. 명확하지 않다. 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을뿐더러 무엇이 그에게 최선의 돌봄인지에 대한 논의도 부재하다. 가족들이 윤리적이라 여기는 행위는 명시적 가치규범인 효(孝)와 각자의 처지를 반영한 타협의 결과물이다. 가족 사이의 도리가 강조되고, 며느리의 ‘나 홀로’ 돌봄은 간과되며, 노인의 목소리는 소외된다. 자녀들은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를 통한 가족의 오래된 질서를 돌보고 있다.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도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다.

ⓒ연합뉴스서울 중구 한 노인요양시설에서 어르신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무연고자 노인에게는 또 다른 차원의 돌봄이 제공된다. 2014년 한 종교재단이 운영하는 ‘ㄱ노인요양원’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서울 강북 지역에 위치한 이곳은 노숙자와 행려병자를 위한 사회복지시설이었다. 200명이 넘는 입소자 대부분이 80대와 90대였다. 요양원에서 특히 눈여겨본 곳은 가장 중증인 노인이 모여 있는 1층이었다. 중환자실을 연상케 하는 공간에 노인 10여 명이 눈을 감고 웅크린 채 침상에 누워 있었다. 간호부장은 이들이 이곳에서 평균 10년쯤 살다가 사망한다고 했다. 그는 1층 노인들이 각별한 돌봄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ㄱ노인요양원의 간호사와 요양보호사들은 “의지할 곳 없고 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어르신을 모시는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어르신이 먹고 사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간호부장이 가장 강조한 건 생명의 신성함이었다. 그에 따르면, 생명은 신의 영역이므로 인간이 함부로 그 가치를 매길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모든 생명은 지속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그는 약자를 향한 인간적 의무를 말했다. 갈 곳 없고 음식물을 스스로 섭취할 수 없는 노인 환자는 우리 사회에서 최약자이므로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환자가 굶어 죽게 놔두어서는 안 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수분·영양 공급은 의료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돌봄이라고 설명했다.

삶의 질과 관련 없는 비위관 삽입

정작 내 눈길을 끈 건 이들이 ‘식사’하는 모습이었다. 1층 노인들은 입을 통해서 먹지 않았다. ‘콧줄’이라 불리는 비위관 삽입(L튜브:Levin tube insertion)을 통해서 수분과 영양을 공급받았다. 비위관 삽입은 음식물을 삼킬 수 없는 환자의 코를 통해 식도를 지나 위까지 삽입하는 관(管)으로 음식물이나 약물을 투여하는 의료적 시술을 뜻한다. 이는 서구에서 신경계 질환을 앓고 있는 노인 환자를 대상으로 1980년부터 빠른 속도로 확대됐다. 한국에서는 2008년 도입된 장기요양보험제도와 더불어 늘어난 요양병원과 요양원에서 일상적 시술로 자리 잡았다.

중요한 건 비위관 삽입이 어디까지나 ‘의료적 시술’이라는 점이다. 이 시술이 상당 기간 진행된 알츠하이머-치매, 신경질환과 연하곤란(삼킴 장애)을 겪고 있는 와상(臥牀) 환자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의학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근거는 미비하다. 의료인은 환자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비위관 삽입을 결정해야 한다. 환자의 상태와 삶의 질을 ‘충분하게’ 향상시키지 않고 수명만 연장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무의미한 연명의료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비위관 삽입에 대해 입소자들이 자발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노숙 생활을 하다가 아픈 몸으로 길에서 발견되고, 응급실을 거쳐 요양원으로 들어온 노인들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있었다. 이들이 이 의료행위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고 의사를 밝히면서 자기결정권을 주장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이들의 뜻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줄 가족이나 지인도 없는 상황이다.

온갖 윤리적 수사로 뒤덮인 그 돌봄의 대상은 노인들의 생명 그 자체다. 간호사와 요양보호사는 정해진 시간에 콧줄을 통해서 노인들에게 수분과 영양을 공급하고, 기저귀를 관리하며, 욕창을 예방한다. 숨 쉬고 먹는 콧구멍을 가진 존재로 전락한 노인들은 10여 년간의 조용한 와상 생활 끝에 ‘자연사’한다. 이렇게 간호사와 요양보호사는 무연고 노인들의 생명을 존중하고 있다. 이 ‘생명 존중’이 곧 요양원의 운영 원리이고 질서다.

ㄱ노인요양원 간호부장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도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요양원에 입소할 수 있는데, 그때 여기 노인들처럼 음식물을 섭취하지 못해서 비위관 삽입을 하게 된다면 어떨 것 같으세요?” 간호부장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저는 절대 싫어요. 저는 이러한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나이가 좀 더 들면 사전의료의향서를 꼼꼼하게 써놓을 생각이에요. 가족들에게도 내 생각을 명확하게 이야기해놓아야죠.”

비슷한 시기 서울 강남 지역의 ‘ㄴ구립요양원’도 살펴봤다. 최소 5년은 대기해야 입소가 가능하다는 이 요양원은 지역 내에서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다. 원장은 입소자들의 수분·영양 공급에 특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는 콧줄이라 불리는 비위관 삽입은 노인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어르신들이 입으로 음식물을 섭취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좋은 돌봄이라고 말했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힘이 들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입소자들의 식사 수발을 든다고 했다. 이 요양원은 비위관 삽입을 하고 있는 노인은 애초 입소 과정에서 제외하고 있었다.

간호사들은 이곳을 노인들이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는 “생의 마지막 집”이라고 표현했다. 원장과 간호사들은 좋은 죽음을 “잠자듯, 고통 없이 죽는 것” 또는 “노화에 의해서 자연스레 죽는 것”으로 정의했다. 자연사가 좋은 죽음이라는 의미였다. 이 관점에서 콧구멍으로 수분과 영양을 공급하는 일은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 된다. 보호자들도 비위관 삽입에 부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역시 콧줄이 노인의 생명을 무의미하게 연장하는 의료라고 규정했다. 고통스러운 생애 말기를 연장하는 것은 보호자로서 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더욱이 생애 말기 돌봄 경험은 보호자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이들은 노부모를 돌볼 때 무엇을 참고하고, 믿고, 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문제를 ‘알아서’ 해왔다. 친족 자원을 동원하고, 사보험의 도움을 받고, 소문과 인터넷 정보를 참고하면서 노부모를 집에서, 응급실에서, 대학병원에서, 요양병원에서, 이제는 요양원에서 돌보고 있었다. 보호자들은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집이 아닌 요양원에 모셨다는 것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따갑게 느껴진다고 고백했다.

ⓒ연합뉴스7월1일 요양보호사의 날을 맞아 고용안정 등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요양원에서 맞이하는 가장 좋은 죽음

요양보호사들은 식사 수발을 ‘전쟁’으로 표현했다. 그 말은 틀리지 않아 보였다. 넓은 거실에서 요양보호사 2명이 10명이 넘는 노인을 챙겼다. 다수의 입소자는 음식에 관심이 없거나 스스로 식사를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촘촘한 업무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한 시간 안에 식사 수발을 마쳐야 했다. 좀처럼 음식에 관심이 없는 노인을 달래는 것도, 밥 한술 먹고 한참을 우물거리는 노인을 무한정 기다리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요양보호사들은 반찬을 으깨고 물에 밥을 말아 목 넘김이 수월하도록 유동식을 만들었다. 거기에 살포시 약을 올려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은 부드럽고 신속하게 노인들의 입속으로 수분과 영양을 공급했다. 이 요양원에서 노인은 집중적인 의료적 처치가 필요한 환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노인들은 인지 및 신체적 불편을 겪고 있었고, 그 불편은 의료 전문가에 의해서 치매·당뇨병·식이장애·우울증 등으로 진단됐다.

‘인공적인’ 비위관 삽입을 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생애 말기 돌봄을 받고 있는 이 요양원의 입소자들은 어떻게 임종할까. 생긴 지 5년이 넘은 이 시설 안에서 사망한 노인은 단 2명이었다. 밤에 자다가 자연스럽게 돌아가셨다고 했다. 요양원에서 좋은 죽음으로 여기는 바로 그 자연사다. 이들 외에 임종한 노인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나머지는 모두 시설 밖인 병원에서 임종했다. 간호사들은 입소 노인에게서 임종 증세를 발견하면 곧바로 보호자에게 연락을 취해 응급실로 가기를 요청했다. 간호부장은 이곳이 노인들의 여생을 보내는 마지막 집이지만 임종 장소는 아니라고 했다. 요양원은 병원도 호스피스도 아니라는 이유였다. 임종은 의사가 있는 병원이나 집에서 해야 한다고 했다. 의사가 없는 요양원에서 노인이 임종했을 때 보호자가 의혹이라도 제기한다면 요양원으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다.

보호자에게는 이러한 상황이 큰 스트레스였다. 한 보호자는 현재 본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근심이 “임종이 임박했다는 연락을 받고 부모님을 응급실에 모셨는데 부모님의 몸 상태가 좋아져서 다시 시설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면 어렵게 입소한, 평판 좋은 요양원에서 짐을 빼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미셸 푸코는 강연집 〈비판이란 무엇인가〉(동녘, 2016)에서 윤리는 특정 시대의 제도·담론·지식·기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생애 말기에 이르러 유독 강조되는 ‘윤리’ 역시 마찬가지다. 연명의료결정법처럼 각 개인에게 부여되는 가치 체계는 개개인이 갖고 있는 ‘일상적 윤리’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

문제는 이러한 윤리가 당사자인 노인을 끊임없이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령화사회가 필연적으로 직면하게 된 문제를 윤리의 이름으로 가족, 특히 여성(요양보호사·간호사·딸·며느리 등) 책임으로 전가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존엄하지 못한 돌봄의 경험은 결국 존엄하지 못한 죽음으로 이어진다. 생애 말기 돌봄을 담당하는 주체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지 않으면서 의료적·생물학적 돌봄만을 최선인 양 여긴다. 대부분 병원에서 죽고 있기 때문에 그 ‘나머지’ 죽음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노화와 죽음에 대한 터부와 혐오는 그 위에서 싹튼다.

기자명 송병기 (서울대학교병원 의생명연구원·인류학)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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