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취리히의 한 김나지움 입시 대비 학원. 2025년도 시험 대비반을 광고하고 있다. ⓒ김진경
스위스 취리히의 한 김나지움 입시 대비 학원. 2025년도 시험 대비반을 광고하고 있다. ⓒ김진경

내가 김나지움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건 어려서 읽은 아인슈타인 전기에서였다고 기억한다. 소년 아인슈타인이 김나지움에 진학하는 대목에서 학교 이름이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 스위스에 와서 아이를 낳고 다른 부모들과 어울리면서 다시 대화에 김나지움이 등장했다. 이번에는 더 현실적인 내용이었다. 6학년 때 치르는 김나지움 시험이 그렇게 어렵다더라, 그래서 요샌 다 사교육을 시킨다더라, 그런 얘기들을 두세 살짜리 아이들 노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눴다. 나처럼 이주민이던 그들은 스위스 교육 시스템이 너무 경쟁적이라며 농반진반 그때가 오기 전에 스위스를 뜨겠다고도 했다. 나는 아직도 스위스를 뜨지 않았고 6학년 딸이 지난 3월 초 김나지움 입시를 치렀다.

김나지움은 유럽의 독일어권 국가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후 장기적으로 학업 계열을 목표로 하는, 즉 대학에 진학하려는 아이들이 가는 인문계 중고교다. 줄여서 ‘기미(Gymi)’라고 부른다. 기미는 장기(6년제)와 단기(4년제)로 나뉜다. 스위스 내 칸톤(주)마다 조금씩 다른데, 칸톤 취리히에서는 입학 기회가 총 세 번 주어진다. 6학년 2학기에 치르는 시험에 통과하면 장기 기미에 진학할 수 있다. 일반 중학교 2학년 때와 3학년 때 다시 한 번씩 시험을 볼 수 있는데 이를 통과하면 단기 기미에 간다. 모든 학생이 기미 시험에 응시하는 것은 아니다. 원하는 아이들만 시험을 보고, 응시자 중 절반 정도가 합격한다. 6학년 1학기의 내신성적(독일어, 수학)과 입학시험(문법+작문, 수학) 성적을 50%씩 반영한다. 합산 점수가 6점 만점에 4.75점 이상이면 합격이다. 취리히에서는 전체 초등학교 6학년 중 약 15%만이 장기 기미에 진학한다. 나머지는 일반 중학교에 가서 직업 계열을 택하거나 단기 기미 진학을 준비하기도 한다. 시험 합격이 끝이 아니다. 기미 첫 학기를 수습 기간(Probezeit)이라고 부른다. 이때의 성적에 따라 최초 입학생 중 약 30%는 입학이 취소되고 일반 중학교로 가야 한다. 수습 기간까지 합격한 뒤에도 학업 부담을 이기지 못해 약 10%가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해 기미를 떠난다. 즉 취리히에서 초등학교 졸업생 15%가 장기 기미에 가지만 그중 40%는 이 과정을 마치지 못한다.

이처럼 진로가 학업 계열과 직업 계열로 뚜렷이 양분되는 교육 시스템을 ‘듀얼(이중) 트랙’이라고 한다. 유럽 독일어권의 오랜 전통이다. ‘마이스터’라 불리는 수준 높은 전문직을 양성한다는 자부심이 크고 다른 나라에서 이를 벤치마킹하려는 시도도 많았다. 반면 도제식 직업 교육이 복잡한 현대사회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다거나 학업과 직업의 계열 구분이 너무 이른 시기에 이뤄진다는 지적도 만만찮았다. 기미 진학 시험을 치르는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이 진로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하기엔 미성숙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듀얼 트랙에 대한 더 무거운 비판은 따로 있다. 이 시스템이 기존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체계적으로 심화시킨다는 점이다. 교육과 소득수준이 높은 부모의 자녀들은 학업 계열을 택해 기미에 진학하는 비율이 높고, 반대의 경우 자연스럽게 직업 계열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자녀의 진로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스위스 사회 안에서도 논란이 많다. 올해 기미 입시를 앞두고 스위스 일간 〈NZZ〉는 그간 정부가 공개해온 진학률 데이터를 종합해 자체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른 기미 진학률 차이가 별것 아니라거나 장기 기미 진학에 실패하더라도 나중에 원하면 학업을 다 따라잡을 수 있다는 생각은 기미에 관련된 큰 ‘오해’들이다. 예를 들어보자. 칸톤 취리히 내에서 지난해 기미 진학률이 가장 높은 동네는 우이티콘이다. 초등학생 중 37%가 장기 기미에 입학했다. 이 동네 거주민의 84%는 소득이 취리히 평균 이상이다. 반대로 기미 진학률이 가장 낮은 동네는 디에티콘으로 4%에 불과했다. 이 동네 주민의 75%는 저소득층에 해당한다. 5㎞밖에 떨어지지 않은 두 동네에서 37%와 4%라는 수치 차이가 나는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요인은 부모의 경제력이라는 게 〈NZZ〉의 결론이다. 이 두 동네만이 아니다. 취리히 동네별 집값과 기미 진학률은 대략 일치한다.

스위스의 한 초등학교에서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EPA
스위스의 한 초등학교에서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EPA

김나지움 위해 과목별 개인 과외도

경제력이 기미 진학률과 상관관계를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입시 대비 사교육이다. 초등학교 대부분이 자체 입시 대비반을 운영하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본다. 기미 입시에는 학교에서 다루지 않은 내용도 많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내 딸도 6학년 1학기에 처음으로 입시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 학원의 기미 시험 대비 과정은 총 6개월로 일주일에 한 번 90분씩 수업이 있었다. 6개월치 비용은 3190스위스프랑(약 475만원)이었다. 학원 중에는 6000스위스프랑이 넘는 곳들도 있는데, 일부는 인기가 좋아 2년치 코스까지 마감됐다고 했다. 과목별 개인 과외 교사를 두는 경우도 흔하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교육심리학을 가르치는 마르그리트 슈탐 교수는 이런 상황이 “시스템 내부의 또 다른 시스템”이라고 비판했다(스위스 일간 〈타게스 안차이거〉 인터뷰). 타고난 지적 능력이나 호기심이 크지 않은데도 부모의 부추김이나 사교육의 도움으로 기미에 진학하는 것은 “성적 도핑”이며 “기회 평등의 아킬레스건”이라는 것이다. 슈탐 교수의 날 선 비판은 온라인에서 뜨거운 반응을 불러왔다. 이 인터뷰 기사에 댓글 수백 개가 달렸는데 그중 ‘좋아요’ 반응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은 이런 내용이다. “자멸하는 스위스. 결국 교육 잘 받은 외국인을 싸게 데려와서 멍청한 현지인을 대체한다. 자국민을 멍청하고 통치하기 쉬운 상태로 유지하는 게 (교육제도의) 유일한 목표이고, 외국인들은 (투표권이 없으므로) 말이 없다. 이런 식으로 오래된 엘리트들은 스스로를 지키고 돈과 권력을 유지한다.”

진짜 재능을 선별하지 못하는 사회는 자멸이라는 말이 어울리기도 한다. 기미 시험 당일 오후에 동네에서 딸 친구의 엄마인 F를 만났다. F는 중학교 화학 교사다. F의 딸도 이번에 기미 입시를 치렀다. 올해 시험문제 수준이 어땠느니, 시험이 끝나 속이 후련하다느니 하는 말을 주고받다가, F가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S 얘기를 꺼냈다. S는 콩고민주공화국 출신 난민 가정의 아이다. 셋이나 딸린 동생들을 바쁜 부모 대신 돌보면서도 학교 성적이 좋다는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F가 말했다. “기미 원서 제출하기 전에 길에서 S를 만났는데 ‘기미 지원은 했냐’고 물었거든. 그런데 언제가 마감인지, 어떻게 제출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어. 부모도 독일어를 몰라서 도와주기 어렵다고 하고, 집에 컴퓨터도 없대. 인터넷 접수를 받는데 그럼 어떡해. 우리 집에 오라고 해서 내가 대신 내줬지. 그게 다가 아니야. 오늘 시험장에 데려다줄 사람이 없다는 거야. 엄마는 새벽 4시에 빵집에 출근하고, 아빠도 6시면 나가야 한대. 그래서 내가 데려다줬어.”

부모가 독일어를 못하고 집에 컴퓨터도 없는 난민 출신 S는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이웃인 F의 호의가 없었더라면 기미에 지원조차 못했을 것이다. “S의 처지를 생각해서 원서 접수나 시험장 가는 길을 돕는 정도는 학교에서 해야 하지 않아? 그게 공립학교의 최소한의 의무 아니야?” 내 말에 F가 동의하며 덧붙였다. “우리 아이들은 다 가지고 있지. 관심 많은 부모, 물질적 지원. 이런 환경이라면 붙고 떨어지는 건 자기들 몫이야. 하지만 S는 다르잖아. 겨우 6학년인 아이가 매일 동생들을 돌봄교실 끝나고 집에 데려와 저녁까지 해먹이면서도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데, 이런 아이가 기미에 가서 계속 공부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다. 그리고 그 책임은 동네 이웃인 F가 아니라 학교와 교육 시스템이 져야 하는 것이다. S는 안타깝게도 0.2점 차이로 기미에 불합격했다. 관심과 지원을 받은 나의 딸과 F의 딸은 합격했다. 이 시스템은 공정한가? 효율적인가?

사교육의 장막을 걷어내고 S처럼 잠재력을 가진 학생을 선별할 방법은 없을까? 칸톤 취리히는 2008년부터 2년간 관련 실험을 한 적이 있다. 기미 입시를 보는 아이들에게 ‘AKF 테스트’라는, 언어가 포함되지 않은 일종의 지능 테스트를 함께 치르도록 해 두 점수를 비교해본 것이다. 전문가들은 기미 시험 성적은 낮아도 AKF 점수가 높은 (독일어가 모국어가 아닌) 이민 가정 아이들이 많을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다. 기미 시험 성적이 낮은 아이들은 AKF 점수도 낮았다. 실험 내용을 분석한 취리히 대학 우르스 모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지능은 불변의 요소가 아니라 태어나는 순간부터 길러진다.” 즉 재능을 갖고 태어났더라도 어릴 때부터 놓인 주변 환경이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경제력이 큰 부모는 입시 사교육비만 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녀가 어릴 때부터 더 많은 책과 장난감을 사주고 발달 과정에 걸맞은 교육을 시킬 수 있다. 결국 지능 점수를 반영하려던 계획은 취소됐다. 오히려 이 실험은 숨어 있던 다른 과제를 드러냈다. AKF 점수가 최상위권에 속하는데도 기미 시험 성적이 낮은 학생의 71%가 남학생이었던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남학생이 같은 나이의 여학생보다 덜 성숙하다는 점, 남학생의 언어능력이 낮아 기미 입시에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점 등을 이유로 꼽는다. 칸톤 취리히 교육청은 “남학생들의 잠재력을 초등학교 초기에 파악하는 게 중요한 과제”라고 실험 보고서 결론에서 밝혔다.

경쟁은 덜하지만 불평등은 더 굳어져

스위스의 듀얼 트랙 중 학업 계열이 직업 계열보다 더 우선이라는 게 아니다. 직업교육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도 아니다. 직업교육은 중요하지만 그 나름의 문제가 있다. 그것까지 다루기엔 지면이 부족하다. 여기서는 학업과 직업 계열이 나뉘는 지점에 무엇이 영향을 미치는지, 과연 일부의 주장대로 학생 개인의 선택에 달린 것인지, 기회의 평등이란 정확히 무엇이고 경쟁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묻고 싶다. 교육 불평등 연구자인 최성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얼마 전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한국 교육 시스템의 문제에 대해 말하며 유럽과 몇 가지 비교를 했다. 그는 독일 사례를 들어, 일찌감치 중학교 때부터 ‘대학 트랙’과 ‘직업 트랙’으로 나뉘는 시스템은 그 안에서 경쟁이 덜한 반면 불평등은 더 고착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유럽 같은 경우 엘리트층의 뿌리가 굉장히 깊다. 계급이란 말이 딱 어울릴 정도다. 계급 상승은 언감생심이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그런 게 사회적 긴장을 완화하는 부분이 있다. 한국은 그런 게 굉장히 약하다 보니 오히려 더 스트레스를 받고 경쟁은 더 심해지는 측면이 있다.” 그의 시각에 동의한다. 나는, 취리히 호수의 평화는 계급을 극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계급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유지된다고 본다.

기자명 취리히·김진경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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