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그림
ⓒ이지영 그림

연예인에게 열광하듯이 정치인을 따르는 사람을 ‘정치 팬덤’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이 현상은 ‘노사모’가 결성되면서 처음 시작되었다지만, 대중의 정치인 숭배는 그제야 생겨난 게 아니다. 대중의 갈채와 환호를 받아온 영웅은 언제나 있었다. 1980년대의 김영삼·김종필만 해도 열렬 지지자를 몰고 다녔다. 하지만 3김 시대의 지지지와 오늘의 정치 팬덤은 성격이 다르다. 사회학자 조은혜는 〈‘팬덤 정치’라는 낙인〉(오월의봄, 2023)에서 그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김대중·김영삼·김종필’을 묶어 이른바 ‘3김 시대’로 칭했던 ‘보스 정치’ 시절만 해도 시민들의 주된 정치활동은 선거투표나 청원서 서명, 정당 등에 소속되어 집회나 토론회에 참석하는 것 정도였다. 당시 정치인 혹은 정당 중심으로 결성된 수직적 형태의 정치적 사조직만 있었고, 시민들은 동원 대상에 가까웠다. 그러나 2000년에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결성되면서 시민들의 정치인 지지 문화가 질적·양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노사모는 시민 동원 형태의 정당 혹은 정치인 주도 조직화라는 이전의 지배적 형태의 정치 문화와 구분된다.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정치참여를 시도하며 정치인을 매개로 다른 지지자들과 교류하고 연대하는 최초의 시민 결사체였던 것이다.”

철학자 박구용은 〈문파, 새로운 주권자의 이상한 출현〉(메디치, 2018)에서 노사모나 ‘문파’와 같은 정치 팬덤을 단순한 ‘시민의 결사체’가 아닌 ‘새로운 주권자’라고 부른다. “그들은 여론조사와 투표의 수동적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런 방식으로 무릎을 꿇고 대상화되기보다는 욕을 먹고 손가락질 당해도 민주주의 국가의 당당한 주권자로서 행세하겠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 유권자가 아니라 주권자로 인정받기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 문파는 카뮈의 명제를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실천한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정치 팬덤을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민주주의 내부의 적’이라고까지 비난하는 정치학자와 논객이 허다한 터에, 박구용의 주장은 현재 나와 있는 정치 팬덤에 대한 가장 강력한 옹호다. 정치 팬덤은 이상적 민주주의 혹은 민주주의의 이상을 거부한다. 민주주의에 고향(그리스?)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시민이 투표 행위를 통해 그들의 권리를 정치가(행정부와 의회)에게 유보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대의) 민주주의의 이상이라고 말한다. 그럴 때 내전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 5년에 한 번씩만 일어난다. 그런데 정치 팬덤은 투표와 상관없이 일상 정치를 지속하기 때문에, 1년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내전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 팬덤은 정치판에 초대받지 않은 말썽꾼도 싸움꾼도 아니다. 그들의 행동 지침은 일찍이 장 자크 루소가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선거일 하루만 자유인이고, 나머지 기간에는 노예가 된다”라는 말을 극복하려는 데서 나왔다.

박구용이 ‘시민 행동주의’라고 부르는 정치 팬덤 운동을 정치학자 박상훈은 ‘직접 민주주의’라고 고쳐 부른다. 정치 팬덤은 직접 민주주의를 ‘진짜 민주주의’ ‘좋은 민주주의’라고 여기면서 대의 민주주의를 직접 민주주의로 바꾸는 것을 진보적이고 개혁적이라고 착각한다고 말한다. 박상훈은 〈혐오하는 민주주의-팬덤 정치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후마니타스, 2023)에서 직접 민주주의는 순수하지만 단순하며 선동에 취약하기 때문에 현대 민주주의는 혼합 민주주의를 지향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바로 정당이 있는 이유다. 그런데 정치 팬덤은 정당 밖에서 정당의 주권자(주인) 노릇을 한다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기본권(천부인권)과 주권은 다른 원리로 작동한다. 기본권은 시민 개개인이 갖는 침해할 수 없는 권리인 반면(국가라고 해도 개개인의 기본권 앞에서는 공권력을 멈추어야 한다), 통치권의 기초를 세우는 주권은 집합적 권리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집합적 권리는 주로 선거를 통해 생겨나며(정당 내 선거에서부터 대통령 선거까지), 주권자는 공적 결정(투표)의 구속을 받는다. 박상훈의 책 242~245쪽에 설명되어 있듯이, 정치 팬덤은 선거를 통하지도, 공적 결정의 구속도 무시한다는 점에서 주권자일 수 없다.

‘정치 팬덤’과 ‘팬덤 정치’의 차이

박상훈은 현실에서 ‘정치 팬덤’과 ‘팬덤 정치’의 구분은 무의미하다고 한 조은혜와 달리 두 개념을 엄밀하게 나눈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열렬한 정치 팬덤을 가졌지만, 김대중은 정당과 의회정치를 존중했고 노무현은 서구식 다당제와 연합정치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팬덤 정치가로 유형화할 수 없다. 팬덤 정치가는 강력한 정치 팬덤을 등에 업고 국회 개혁과 직접 민주주의를 앞세운 박근혜(그는 국민서명운동에 참여한 최초의 현직 대통령이었다)와, 대의제를 간접 민주주의로 폄훼하고 직접 민주주의를 강조하면서 ‘문빠’로 통칭되는 지지자 집단에 의존해 대통령직을 수행한 문재인이었다. “다만 문재인의 말과 행동이 거친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 역시 전형적인 팬덤 정치가와는 달랐다고 할 수는 있겠다.”

정치 팬덤은 기존 정치·정당·의회·언론·지식인을 신뢰하지 않고 정치가를 믿지 못한다(팬덤 정치는 이런 불신을 활용한다). 불신으로 무장한 정치 팬덤은 정치 냉소주의자와 비교할 게 아니다. 둘은 전혀 다르다. 정치학자 조기숙은 〈포퓰리즘의 정치학-안철수와 로스 페로의 부상과 추락〉(인간사랑, 2016)에서 정치 냉소주의자는 누가 당선되든 정치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비정직성에 뿌리박힌 정치를 버리고 고독, 내면으로의 침잠”을 한다. 이들은 선거일이 되면 극장이나 산으로 간다. 반면 정치 불신자는 정치에서의 무조건적 신뢰는 오히려 위험하기 때문에 “지식, 관찰, 논증에 기초”하려 하며 “정치인을 감시하고 견제”하려고 한다. 포퓰리스트가 한껏 속이기 쉬운 사람은 정치 냉소주의자다.

조은혜는 ‘정치 팬덤’이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채색되었을 뿐 아니라 오남용되었다면서, ‘인물 중심 정치’와 ‘인물 지지 정치’를 구별하자고 말한다. “‘인물 중심 정치’에서 시민에게 지지받는 정치인이 강조된다면, ‘인물 지지 정치’에서는 정치인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시민이 주요하게 부각된다. 시민들은 과거와 달리 주권자 의식이 강하며, 사명감과 책임감을 바탕으로 정치인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다양한 방법을 활용해 사회에 참여한다.” 정치 팬덤은 정치인의 야망을 이루어주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희망을 대리할 사람을 키우고 감시하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