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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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나의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돌베개, 2023)는 빈곤가정의 청소년들이 성인이 되는 과정을 관찰하면서 그들이 마주한 문제를 밝힌다. 지은이는 이 책을 쓰기 위해 2016년부터 열예닐곱 살의 청소년 여섯 명을 대상으로 그들이 스무 살이 넘도록 심층 면담을 거듭했다(2018년에 특성화고 출신 청소년 두 명이 추가되어 총 여덟 명이 되었다). 지은이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빈곤층의 삶을 팔아 이용하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 스스로 책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다행히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빈곤계층의 청(소)년 문제를 푸는 데 필요한 문화기술지를 얻게 되었다.

빈곤계층 청소년의 가장 큰 문제는 의식주와 학자금 등 겉으로 드러난 복지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은 더 큰 어려움은 자아정체감의 위축이다. 청소년은 자라면서 육체가 커지는 것과 함께 자아도 성장하는데, 자아 성장에는 다양한 인간관계와 문화적 경험뿐 아니라 자신의 역량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이나 확신이 따라야 한다. 가난은 그 폭을 제한하고 한정 짓는다. 나도 의사가 되고 싶고 변호사가 되고 싶고 예술가가 되고 싶은데, 열악한 가정환경과 경제적 지원을 기대할 수 없어서 꿈을 포기해야 한다면 자아정체감이 생겨날 리 없다.

인터뷰를 해보면, 빈곤층 청소년은 돈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한다. “당장 현금을 만질 수 있고 일한 결과가 바로 나타나는 일에 비중을 둔다. 직업훈련을 해서 자격증을 따고 1~2년 대학에서 더 공부하면 더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 있지만, 아이들은 배달 일과 같이 바로 큰돈을 쥘 수 있는 일을 더 선호한다.” 어릴 때부터 재화가 부족해 어려움과 결핍을 경험했기에 이들은 언제든지 쓸 수 있는 수중의 현금에서 안정감을 얻는다. 그 외의 다른 데에는 기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심리적 위축과 현실의 급박성은 가난한 청소년의 장기적 인생 설계를 가로막는다. “청년 빈곤은 철저히 계층의 세습이자 빈곤 대물림의 불평등 구조하에 놓여 있다.” 청년 빈곤 문제는 빈곤계층 청소년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들이 청년이 된 다음에 해결책을 내는 것은 뒤늦다. 빈곤계층 청소년에게 정부 정책과 사회의 관심이 좀 더 일찍 투입되어야 한다.

가족의 가난과 나의 가난

안온의 〈일인칭 가난〉(마티, 2023)은 빈곤 가정의 당사자가 직접 가난을 이야기한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일률적인 ‘빈곤 계측 모델’은 없다고 주장한다. 가난의 일률적 계측은 기초생활수급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연락이 닿지 않는 딸의 남편이 고소득자여서,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 아들의 소득이 잡혀서 수급자가 되어야 할 사람이 수급을 받지 못하는 부조리를 낳는다. 더욱 희극적인 경우는, 자동차 소유가 100% 소득으로 인정되어 수급자에서 탈락하는 경우다. 기초생활수급자 가족의 이동권과 경제활동을 가로막는 이런 기준은 기초생활수급자를 계속해서 그 울타리에만 생존하도록 방치한다.

가난의 일률적인 계측 모델에 매달리는 것은 복지정책 담당자만이 아니다. 지은이의 부모는 2003년부터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었고, 지은이는 스물여섯 살이던 2019년까지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았다. 그는 교사가 되어 어머니를 가난에서 구하고 알코올의존자인 아버지의 치료비를 댈 수 있는 사범학교에 합격했으나, 작가가 되기 위해 국어국문학과를 택했다(어머니와의 타협으로 문예창작과 대신 택했다). 이럴 때 사회는 가난한 주제에 왜 현실적인 선택을 하지 않느냐고 추궁한다. 빈곤계층 청소년이 자진해서 꿈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도 사회적 압력이 있는 셈이다.

안온은 강지나와 달리 “나는 가난을 말할 때 가족을 맨 뒤에 배치한다. 불행한 가족과 가난을 세트 취급하는 클리셰가 지겹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은이 자신도 던진 바 있는 “왜 가족의 가난이 저의 가난이 될까요?”라는 질문은 지겹다고 피해 갈 게 아니다. 지은이가 D와 헤어진 것도 아들을 ‘투자’ 대상으로 여긴 그의 어머니의 반대 때문 아니었던가.

나재필의 〈나의 막노동 일지〉(아를, 2023)는 서울과 몇몇 지역 언론사를 거치면서 국장과 논설위원을 지내기도 했던 지은이가 수익사업과 광고 영업을 강요하는 사주와의 알력 끝에 조기 퇴직을 하고 속칭 ‘노가다’가 된 경험을 쓰고 있다. “무엇을 해도 먹고살 줄 알았는데 막상 세상 밖으로 내던져지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니,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그때 절망의 끝에서 가까스로 붙잡은 게 ‘막노동’이었다. 기자로 펜대를 굴리며 살았던 지난날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고민도 한몫했을지 모른다.”

지은이는 퇴직 후 단기 일용직 아르바이트, 식당 설거지 보조 등 여러 일을 전전했다. 그러다가 막노동으로 한 달에 500만~800만원을 벌 수 있다는 친지의 얘기를 듣고, 다음 날 당장 대기업 반도체 건설 현장에 이력서를 넣었다. 신체검사에 통과한 날, “나, 내일부터 노가다 시작해”라고 아내에게 일렀다. 27년간 기자로 살아온 쉰 살 넘은 남편의 입에서 막노동을 하겠다는 말을 들은 아내의 입이 떡 벌어졌다. 농담이겠거니 생각하는 듯했다. 이튿날 새벽, 아내가 작업장까지 차로 데려다주겠다는 것을 뿌리치고 집을 나섰다. 새벽 다섯 시 반, 영하 10℃였다. “막노동이란 내 인생과는 영영 상관없을 것 같은 세계였다.”

이 책은 재취업이 기본 사양이 된 고령화 시대에 새로운 인생을 찾아야 하는 중장년에게 용기를 주고, 막노동에 대한 그릇된 시선을 바로잡는다. “우리 사회가 바라보는 막노동에 대한 인식은 곱지 않았다. ‘밑바닥 인생’이라는 폄훼와 하대, 조롱과 멸시를 해왔다. 그건 잔인하고 못된 추문이었다.” 막노동 일터에서 만난 사람들은 유독 상처가 많기는 했지만, 그들 가운데 애초에 막노동꾼으로 태어난 사람도, 막노동꾼으로 계속 살고 싶다고 말하는 이도 없었다. 그들은 조그만 가게를 차리기 위해, 흩어진 가족이 다시 모여 살기 위해, 부모나 가족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자식의 학비를 대기 위해, 또는 사업이 망해 생겨난 빚을 갚기 위해 일을 한다. 그런데도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행동과 성질이 거칠고 불량한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노가다’를 풀이해놓았다. 우리 문화 속에 있는 육체노동에 대한 멸시가 이런 정의를 낳았다. “솔직히 나도 그런 일을 하지 않기 위해 공부했다. 심지어 자식들에게도 몸 쓰는 일을 시키지 않으려고 공부를 시켰다. 하지만 막노동을 경험하고 나서는 내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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