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그림
ⓒ이지영 그림

스핑크스는 단 하나의 수수께끼로 사람들을 벌벌 떨게 했지만, 모차르트는 더 많은 수수께끼를 낸다. ‘모차르트는 천재였는가’ ‘모차르트는 혁명가였는가’ ‘모차르트는 독살당했는가’ ‘모차르트는 가난했는가’. 스핑크스는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는 사람을 잡아먹었지만 모차르트는 누구도 해치지 않는다. 그의 일생이 빚어낸 수수께끼들은 그의 음악을 더욱 풍요롭고 깊이 있게 해준다. 이채훈의 〈모차르트 평전〉(혜다, 2023)은 그동안 제출된 답안들을 복기하고 종합하면서 새로운 답안을 작성하는 재미를 준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는 스물세 살 때인 1743년에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궁정 악단에 입단하여, 1763년부터 세상을 떠나던 1787년까지 부악장으로 근무했다. 1747년에 안나 마리아와 결혼하여 일곱 자녀를 낳았으나 네 번째로 낳은 딸과 마지막으로 태어난 아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만 유아기를 넘기고 살아남았다. 모차르트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의 바이올린 소리를 들었고, 세 살 때부터는 다섯 살 위의 누나 마리아 안나 발푸르기아가 연습하는 하프시코드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모차르트는 다섯 살 때부터 작곡을 했다. 그는 한 번 들은 연주를 악보로 고스란히 옮길 줄 알았고, 배우지 않고도 바이올린을 켰다. 이것은 타고난 재능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재능만 가졌지 아무것도 이룩하지 못한 사람도 많다. 천재는 그 재능으로 보통 사람은 흉내도 내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방대한 작품을 낳는다. 동양에서는 느리고 적게 작업하는 것이 천재의 표상인 것처럼 되어 있지만,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한 작품을 수십 년이나 매만진 끝에 새똥처럼 찔끔찔끔 작품을 내놓는 사람은 천재가 아니다. 필리프 브르노의 〈천재와 광기〉(동문선, 1998)를 보면 된다. 모차르트는 천재였다.

모차르트가 여섯 살이 되자 레오폴드는 온 가족을 데리고 뮌헨과 빈으로 장기 연주 여행을 다녔고, 모차르트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는 아들만 데리고 3년 반(1763~1767) 동안 유럽 순회 연주를 시작했다(일명 ‘그랜드 투어’). 당시의 교통수단은 마차였다. 길은 울퉁불퉁하고 의자는 딱딱했으며, 냉난방이 되지 않아 승객은 추위와 더위를 그대로 견뎌야 했다. 첫 번째 빈 여행 중에 가족들은 돌아가며 병치레를 했는데, 나이가 어린 모차르트가 가장 자주 앓았다. 이때 모차르트는 연쇄상구균 감염에 의한 류머티즘열(rheumatic fever)을 심하게 앓았다. 또 그랜드 투어에서 돌아와 두 번째로 떠난 빈 여행에서 열두 살 난 모차르트는 천연두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얼굴에 마마 자국을 얻었다. 155㎝의 작은 키와 얼굴에 난 마마 자국은 모차르트에게 외모에 대한 열등감을 심어주었고, 이 때문에 많은 돈을 벌고서도 과시적 소비를 하느라 늘 빚에 쪼들렸다.

“누나가 작곡을 그렇게 잘하다니”

잘츠부르크의 베네딕트 대학에서 철학 학사학위를 받은 레오폴드는 모차르트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음악은 물론 일반교양까지 자신이 직접 가르쳤다. 자녀에게 정규교육을 시키지 않은 것이나 어린 자녀들을 장기 연주 여행으로 내몬 그는 오늘날 기준으로는 아동학대나 아동 착취를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재능이 전통적인 음악 교육(반복 훈련)으로 일그러지지 않았고, 연주 여행을 통해 여러 지역과 여러 나라의 음악 문화를 일찍부터 흡수한 것이 모차르트에게 더없는 공부가 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난네를’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모차르트의 누나는 열두 살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연주자로 가족 음악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아버지는 딸을 직업 연주자로 키우지 않았다. 스무 살이 된 모차르트가 이탈리아에서 누나에게 보낸 편지에 “누나가 작곡을 그렇게 잘하다니 정말 놀랐어. 한마디로 참 아름다운 작품이야”라고 쓴 것을 보면 난네를은 작곡에도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머니가 사망한 후(1778), 혼자 있는 아버지를 모시다가 혼기를 놓쳤다. 그녀는 세른세 살이 되던 1784년에야 아이가 다섯이나 딸린 열다섯 살 연상의 홀아비와 결혼했다. 남편은 세 번째 결혼이었다.

잘츠부르크는 가톨릭 대주교가 통치하는 봉건 제후국이었다. 1772년에 잘츠부르크 대주교가 된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는,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드를 아들을 내세워 오스트리아 음악계를 휘젓고 다니는 불한당으로 보았다. 레오폴드는 아들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다른 궁정을 찾아가거나 헨델과 하이든의 성공 사례처럼 아예 외국에서 새 출발을 할 수도 있었지만 고지식하게 잘츠부르크 궁정악단의 단장이 되기만을 원했다(아들은 콜로레도와 힘을 겨루기 위한 레오폴드의 판돈이었다). 잘츠부르크 궁정악단에 청춘을 묻은 레오폴드로서는 궁정악단 단장이 되는 것이 금의환향이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모차르트가 자유음악가가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대주교 모두와 반목해야 했다. 가까스로 그가 대주교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1781년 6월8일은 음악사 최초로 자유음악가가 탄생한 날이 되었다”. 빈에 정착한 모차르트는 독일어 오페라를 고집하면서 이탈리아를 떠받드는 빈 음악계에서 고립되었다.

이채훈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일반인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정치의식이 높았다”. 모차르트는 두 번째 빈 여행 때 유명한 의사이자 최면술의 창시자인 프란츠 안톤 메스머 박사(‘최면을 걸다’란 뜻인 영어 단어 ‘mesmerize’가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의 집에서 장 자크 루소의 사상과 프리메이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모차르트는 뒤늦은 1784년에 프리메이슨에 가입하게 되지만 열여섯 살에 이미 프리메이슨을 주제로 한 가곡 〈우정에 대하여〉를 쓴 바 있다. 그는 프리메이슨의 전속 작곡가인 양, 여러 가곡과 오페라에 프리메이슨의 메시지와 암호를 삽입해놓았다. “모차르트는 정치가도 혁명가도 아니었지만 체제에 순응하며 귀족 사회가 요구하는 음악만 기계처럼 만든 살리에리 등 평범한 음악가들과 구분된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중세 신분사회의 벽, 그 어둠 속에서 모차르트는 개인의 평등, 존엄의 꿈”을 잃지 않았다. 그는 대다수 오페라에 자신의 희망을 담았고 그 때문에 빈 귀족들의 견제를 받았다.

서른다섯 살이라는 모차르트의 때 이른 죽음은 어린 시절 무리한 여행으로 얻은 지병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며, 류머티즘열이 사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살리에리에 의한 독살설은 푸슈킨의 단막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로 유럽 전체에 퍼져 나갔다. 푸슈킨의 희곡과 서사시를 모은 〈푸슈킨 선집〉(민음사, 2011)에서 이 작품을 볼 수 있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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