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와서 몸이 되다〉(창비, 2023)는 44년 동안의 시작 활동을 중간 결산한 고형렬 시인의 작품집이다. 단독 시집 열여섯 권과 장시집 두 권에서 고루 뽑은 시를 수록한 시선집에는 시인의 첫 시집 〈대청봉 수박밭〉(청사, 1985)의 표제작 ‘대청봉 수박밭’이 당연히 실려 있다. 이 시는 “눈이 펑펑 소청봉에 내리면 이 여름밤/ 나와 함께 가야 돼. 상상을 알고 있지/ 저 큰 산이 대청봉이지/ 큼직큼직한 꿈 같은 수박”으로 시작한다. 설악산에는 여름에도 눈이 내리는가. 대청봉에 수박밭이 있는가. 전혀 사실일 수 없는 두 진술이 거짓말로 들리지 않는 것은 “상상을 알고 있지”라는 구절 때문이다. 상상은 가능성을 열망하고 창조를 부른다. 눈이 펑펑 내리는 어느 겨울날, 대청봉 정상에 오른 시인은 너른 쑥돌에 앉아 모자와 구두를 벗어놓고 대청봉 수박밭에서 난다는 수박 타령을 하다가, 뜬금없이 여기가 “백두산”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꿈 같은 수박” “기막힌 수박”은 통일의 비유다.

ⓒ이지영 그림

자크 랑시에르는 '문학의 정치'는 작가의 정치의식이나 작품의 메시지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감각의 분배 체계를 교란하고 재배열하는 문학의 미학적 효과에 있다고 말한다. 문학의 전복성은 ‘아프다’ ‘못 견디겠다’ ‘뒤집자’라는 메시지가 아니라 일상적 감각을 재배열하고 창안하는 데서 생긴다. 감각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갖는 본래적이고 균질적인 것이라고 여기기 쉽지만 실제로 이데올로기나 체제와 연관되어 있으며, 체화된 많은 감각은 훈육의 결과이기도 하다. 인간이 생존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감각인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 역시 그러하다. ‘나인 투 파이브(9 to 5)’는 자본주의 체제가 월급 생활자들에게 폭압적으로 이식한 시간 감각이고, 북한을 금지된 땅이자 흡수 대상으로 믿게 된 공간 감각은 냉전과 반공주의의 결과물이다.

‘백두산 안 간다’는 원산에서 어물점을 차리고 있는 매제가 금년 경칩날과 지난 말복에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오는 가을엔 백두산 가자고” 조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는 “지금은 사업이 바빠 못 가겠다, 그렇게 잘라서 말했다.” 이후에 평양에서 포목점을 하는 숙부에게서 똑같은 전화가 또 왔다. 나는 코웃음을 치면서 또다시 거절했다. “인젠 언제 가면 못 갈까.” 재배열되고 창안된 고형렬의 시간과 공간은 국가보안법을 우회하고 관통함으로써 시인 자신과 독자를 지키고, 즉흥적인 메시지가 넘기 힘든 검열을 넘어 그 시대의 가장 강력한 정치의식을 지켜냈다.

제 숲을 갈아 치운 사람들이 사는 도시

〈체 게바라 만세〉(달아실, 2023)는 실천문학사에서 2014년 초간된 박정대의 일곱 번째 시집을 복간한 것이다. 시인은 이 시집에서도 “어딘지도 모를 아주 먼 곳을 향해”(‘감정의 고독’) 떠나고 또 떠난다. “간밤에 파미르 고원”(‘혁명의 달 두루마리 결사’)을 넘었고, 지금은 남프랑스 “루르마랭의 중앙광장/ 가비 카페 노천 테이블에 앉아”(‘루르마랭’) 있다.

“집시의 피”('톰 웨이츠를 듣는 좌파적 저녁')가 흐르는 박정대의 시는 번번이 낭만주의라는 열쇳말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시인의 가상(假想) 여행은 낭만주의보다는 자신을 무한히 변용하고 개방하는 능력과 연관된다. 빌헬름 슈미트의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책세상, 2017)의 한 대목을 보자. “쾌락을 기르는 것은 영리한 일이다. 왜냐하면 쾌락은 자신을 넘어서도록 촉진하고, 일관성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뒤집어 해체하고 새롭게 조립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지나치게 경직된 형식들을 다시금 유동하게 하고 파괴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쾌락의 경험에 기대면 된다. 쾌락의 향유는 닫혀 있는 자기를 열고, 자기는 해체되고 새롭게 형성되며, 그런 방식을 통해 무한히 풍요로워진다.”

빌헬름 슈미트는 레비나스의 용어를 빌려와 쾌락은 “자기 특유의 진동”을 도모한다고 말한다. 자기 특유의 진동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코나투스(conatus: 개체들이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는 힘/노력)의 증대’와 동의어이다. 박정대의 가상은 “인간의 감정은 변형이 가능한 하나의 물질”('아랍말처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능동적인 변용을 보여준다.

최계선의 〈롱고롱고 숲〉(아이북, 2023)은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이다. 이번 시집을 여는 첫 번째 시에서 시인은 “자연의 순례자”(‘숲에서 숲속으로’)가 되기를 서원한다. 이 서원에는 인류사적인 고해가 녹아 있다. ‘태양의 숲’에 따르면, 마을과 도시를 만들기 전에 인간은 숲속에서 살았다. “숲의 한쪽 구석에서 겨우 부싯돌”이나 켜던 사람들이 숲을 밀고 도시를 만들었다. “나무에 기생해 사는 사람들이/ 제 숲을 갈아 치운” 것으로 이 역사를 묘사한 시인은 거기에 “도끼 문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도시와 도시인을 “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공중보행자들의 유령도시”(‘공중보행자’)라고 일컫는 시인은, 현대의 도시 문명을 기원전 8~7세기부터 카파도키아 고원에 조성된 지하도시 데린쿠유에 빗댄다. 튀르키예어로 ‘깊은 우물’을 뜻하는 데린쿠유는 깊이 85m까지 내려가는 지하 8층으로 이루어진 지하 도시다. 2만명이 살았던 이 지하 도시에는 곡물창고·식당·학교·예배당·농장·마구간·감옥까지 없는 게 없었지만 햇빛이 없었다. 데린쿠유는 “침입자로부터는 안전하였으나 햇빛을 보지 못하여 25세의 평균수명으로 500년간 이어진 지하 세계의 문명”이었다. 데린쿠유가 침입자로부터 안전을 추구한 끝에 25세라는 짧은 평균수명밖에 누리지 못했듯, 도끼 문명이 풍요와 안락을 추구한 결과 “인류는/ 이제 곧 한 방에 훅 날아갈/ 절명 위기에 처했다/ 개체수 부족 때문이 아니라/ 과잉포화/ 탐욕/ 무지 때문이다”(‘멸종의 역피라미드’)

‘데린쿠유’의 마지막 연이다. “이쯤에서 햇살 한 올 풀어야겠지?/ 태양을 가슴에 얹고 냇물 곁에 누워/ 물잠자리 하늘도 쳐다보고/ 그을려 허물 벗겨진 어깨 껍질/ 구름에 겹쳐보기도 하고” 시인이 데린쿠유에 내린 처방이 ‘햇살’이었다면, 우리에게 내린 처방은 숲이다. “샘으로 가는 이 길은/ 사람이 낸 게 아니다/ 샘을 찾은 것도/ 내가 아니다// 숲의 주인들이 오가며 들르던/ 옹달샘/ 숲길을/ 나는 따라갈 뿐이다”(‘따라간다’) 이 시집의 많은 시편이 숲에 바쳐져 있지만, 시인이 숲만 편애할 리 없다. “태평양 끝자락에서/ 반바지에 슬리퍼 끌고 다니면서/ 어슬렁거리는 게/ 축제지/ 그렇지 않겠어?”(‘랭보와 헤어지던 여름’) 숲은 개발에 병들고, 기후온난화는 섬을 삼킬 것이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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