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UTERS7월1일 홍콩 반환기념일 행진 중인 시위대에 경찰이 최루탄을 쏘자 노부부가 이를 지켜보고 있다.

동갑내기인 웡(黃) 씨랑 알고 지낸 지 10년쯤 된다. 홍콩 야우마테이에서 야식 디저트를 파는 가게 주인이다. 엄지손가락만 한 찹쌀경단에 설탕과 흑임자를 반반 섞어 소를 넣은 후, 생강과 흑설탕으로 맛을 낸 국물에 담근다. 속을 편하게 해주는 달콤하고 보드라운 맛이라 과식을 한 날 이 집에 종종 간다. 이제는 얼굴이 익어서 안부 이상의 수다를 떠는 사이다.

2019년 7월 송환법 반대 시위 날 헬멧을 쓰고 갔더니 ‘너 기자였냐’며 놀랐다. 사실 여행작가인데 이런 취재는 부업(?)이라고 말하는 게 더 이상해서 그냥 웃고 말았다. 갑자기 웡 씨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곁에 있는 어르신을 소개했다. 자신의 아버지라고 했다. 아버지의 얼굴에도 수심이 깊었다. 시위 여파로 장사가 안되어 그러나 싶었는데, 실은 열여덟 살 먹은 아들 때문이었다. 아이가 학교를 안 가고 시위만 쫓아다녀서 용돈을 끊었더니 그길로 집을 나가 드문드문 연락만 되는 모양이었다.

웡 씨의 아버지가 말했다. “우리 홍콩 사람들은 참 기구해. 나는 어릴 때 영국 물러가라고 그리 싸웠는데, 내 손주가 유니언잭(영국 국기)을 들고 설칠 줄은 몰랐지.” “1967년 반영 시위 때 거리에 있으셨어요?” “그때는 내가 손주 나이였지. 지금이랑 반대였어. 많은 홍콩 사람들은 영국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조국의 품에 안겨야 한다고 생각했지.”

웡 씨의 아버지는 잠시 그 시절을 회상하는 듯하더니, 노래 한 소절을 부르기 시작했다. ‘똥퐁홍, 타이옝씽(東方紅, 太陽升).’ 문화혁명 당시 중국의 국가였던 ‘동방홍’의 광둥어 가사였다. 원래 중국 국가인 ‘의용군 행진곡’은 작사자가 반당분자로 몰려 숙청된 탓에 그 시기에는 ‘동방홍’이 중국의 국가였다.

“딱 이 노래 같지 뭐. 언제는 ‘동방홍’이 국가라며 추켜세우다 갑자기 못 부르게 했잖아. 요즘은 축구장에서 의용군 행진곡이 나올 때 홍콩 사람들이 야유한다고 뭐라고 하질 않나. 그렇게 의용군 행진곡이 귀중한 노래면 자기들이나 꿋꿋이 잘 지키라고!”

웡 씨는 아버지에게 화가 나 있었다. “아버지는 자식이 그렇게 중국이 싫다는데도 왜 중국이 우리 조국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아버지가 답했다. “사실 난 지금도 모르겠어. 나 젊을 때는 중국이 되고 싶어서 난리를 쳐도 안 됐는데, 지금은 또 중국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난리고….”

홍콩에서 가장 슬픈 말

이야기를 듣다 내가 불쑥 끼어들어 초를 치고 말았다. “그런데… 이런 말 하면 그렇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홍콩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을 거 같아요.” 아차 싶었지만 웡 씨 부자는 동의하는 듯 고개를 떨궜고, 꽤 긴 침묵이 흘렀다.

웡 씨가 말하길, 젊은 시절 그의 아버지는 야우마테이에서 꽤 유명한 반영 운동권이었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는 날에는 억수 같은 비를 뚫고 빅토리아항 건너편에서 반환식 광경을 보았다. 내가 말했다. “가장 빛나던 시절의 화양연화를 어찌 잊겠어. 자기 나름으로는 희생하며 실천했다고 믿는 기억이잖아. 설사 그 신념이 틀렸다 해도 그거 인정 못할 거야.”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바깥이 어수선해지더니 구호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옷을 입은 청년들이었다. 몽콕에서 싸우던 이들이 이곳으로 밀려온 모양이었다. 웡 씨 아버지가 지나가는 청년들을 보면서 한숨 쉬듯 한마디 했다. “나는 왜 쟤들이랑 반대편에 있는 걸까?” 홍콩 시위를 취재하면서 들은 것 중에 가장 슬픈 말이었다.

기자명 환타 (여행작가·<환타지 없는 여행>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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