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일로 동화책과 그림책을 꾸준히 읽고 검토하는 편이다. 쏟아져 나오는 새 책들이 감탄스럽기는 하지만, 때때로 힘에 부치기도 한다. 계속 낯선 동네를 헤매고, 모르는 사람들과 새로운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 일 같다. 그럴 때는 종종 오랜 친구처럼 편안히 마주할 수 있는 책으로 되돌아간다. 긴장한 채 뭔가 탐색할 필요 없이 펄럭펄럭 책장을 넘기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그득해지는 책들.
〈난 곰인 채로 있고 싶은데〉가 그런 책 중 하나이다. 20여 년 전 처음 보았을 때는 충격적이었고 도발적이었던 이 책이 이제 편안해지고 마음 그득해지다니. 여기까지 오는 데 나 개인적으로는 오랜 시간과 많은 생각이, 그림책 동네에서는 다양한 변화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림책 동네뿐이랴. 사회 전체에서 일어난 급격한 변화도 이 책의 의미를 더 크고 깊게 만들었다.
나뭇잎은 색색으로 물들고, 하늘에는 기러기가 날고, 강물은 유유히 흐르는 아름다운 숲에 곰 한 마리가 서 있다. 평화로운 광경이다. 곰이라면 으레 그래야 하니, 이 곰도 동굴 속에서 겨울잠에 든다. 그동안 위쪽 땅에는 공장이 들어서고, 봄이 되어 깨어난 곰은 철조망 둘러쳐진 공장 마당 한복판에 서 있게 된다. 빨리 가서 일하라고 다그치던 감독은 “죄송합니다만, 저는 곰인데요”라는 곰의 해명에 외친다. “곰이라고? 웃기지 마, 이 더러운 게으름뱅이야!” 인사과장과 전무와 부사장을 거쳐 사장에게까지 끌려간 곰의 ‘나는 곰’이라는 자기주장은 전혀 먹히지 않는다.
나도 이 곰 신세가 아닐까?
검증을 위해 찾은 동물원과 서커스단의 곰들도 그를 부인한다. 진짜 곰은 철창 안에서 사는 법이라나. 춤추고 재주부리지 않는 곰은 진짜 곰이 아니란다. 하릴없이 공장으로 끌려온 곰은 면도하고 작업복을 입은 채 다른 작업자들과 함께 일렬로 서서 기계를 조작한다. 그러다 다시 찾아온 겨울잠의 계절. 자꾸만 눈을 감는 곰을 본 감독은 노발대발, 그를 해고한다. 괴나리봇짐 둘러메고 눈발 날리는 길을 걷던 곰은 모텔에 들어가 방을 잡으려는데, 주인이 말한다. “우리는 공장 일꾼에게는 방을 내주지 않습니다. 더구나 곰한테는요!”
이 이야기는 카프카의 〈변신〉을,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를 떠올리게 한다. 곰은 곰으로서 정체성을 잃고 전혀 다른 존재가 된 채 영문 모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단추 하나만 누르는 의미 없는 작업으로 숱한 날을 보내야 한다. ‘나는 곰인데요!’가 완강히 튕겨져 나와 곰이기를 포기한 차에, ‘너는 곰!’이라는 경멸 섞인 단언이 떨어지니 종잡을 수가 없다. 책을 보면서 어쩌면 나도 이 곰 신세가 아닐까,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원래 무엇이었고, 어떻게 살고 싶었던 존재일까. 지금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그래도 작가는 곰을 다시 곰으로 되돌려 보낸다. 인간의 옷과 신발을 훌훌 떨군 채 동굴로 들어가 겨울잠에 빠지는 곰. 아, 다행이다. 그럭저럭 나이 먹어가며 뒤를 돌아보고 앞을 내다보는 존재들에게 이런 동굴 속 겨울잠 같은 시간이 주어지기를 바란다. 어른들에게 권하고 싶은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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