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에서 따뜻함을 말하면 어떤 색깔들이 떠오른다. 자작자작 타오르는 모닥불의 주황색, 화사한 봄의 노랑이나 연두색. 그런데 “따뜻해”라고 말하는 이 책은 흑백이다. 표지에서는 커다랗고 시커먼 암탉 머리가 아래쪽을 향해 있고, 부리에 조그만 아이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아이 품에는 제 몸 반만 한 알이 달려 있다. 아이가 그걸 안고 있는 품새가 아니라서 ‘달려 있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색깔이며 상황이 따뜻함과는 거리가 있으니 오히려 흥미가 인다.

따뜻하지 않아 따뜻하고 싶은 아이

책장을 펼치면 검은 배경에 거친 흰색 줄이 죽죽 그어져 있다. “엄마랑 장에 갔어요. 사람들이 아주 많아요.” 그제야 오고 가는 사람들의 다리와 발을 형상화한 것임을 깨닫는다. 이 두껍고 거칠고 시커멓고 커다란 발에 불안해진다. 다음 페이지에는 “엄마가 장을 보는 동안”이지만, 불안감은 더해진다. 군화 같은 엄마의 신발과 딱딱한 걸음, 장바구니를 움켜쥔 손 때문이다. 다음 장, 제 몸만 한 신발에 포위당한 듯 쭈그려 앉은 아이 앞에는 옴짝달싹할 수 없이 좁은 상자에 갇힌 검은 닭이 있다. 어쩌자는 것일까.

이 의문에 답이라도 하듯, 그다음부터는 주변의 다리와 발이 사라지고 아이와 닭이 전면에 나선다. 닭의 품에서 굴러 나온 달걀을 아이가 안아들자(“달걀이 참 따뜻해요!”) 닭이 아이를 번쩍 물어 올려 품에 넣는다.
알을 주고 싶지 않은 아이는 달아나고, 어미닭 품 안의 병아리들은 아이를 쫓아간다. 그들이 벌이는 뱅글뱅글 숨바꼭질 장면이 마치 포근히 눈 내리는 밤의 흥겨운 놀이 같다.

그러다 아이의 알에서 병아리가 까꿍! 깨어난다. 놀라고 기뻐하는 아이와 병아리들. 아, 따뜻하다. 앞 상황의 거칠고 불안한 느낌과 완전히 대비되는 따뜻함과 기쁨이 솟는 장면이다. 검은 암탉이 아이와 병아리들을 등에 태우고 하늘을 훨훨 나는 자유도 뒤따라 나온다.

이 기쁨과 자유는 엄마가 부르는 순간 깨진다. 아이는 하늘에서 떨어진다. 엄마 손에 잡힌 채 집으로 향하는 아이. 팔이 빠질 듯하고 발은 대롱대롱 허공에서 휘적이는 듯하다. 다음 순간 아이는 엄마 손을 뿌리치고 뒤돌아 뛰어가지만, “검은 닭도 병아리도 보이지 않는다”. 이야기는 그렇게 끝난다. 아무것도 없다는 까만 글씨만 떠 있는 허공을 망연히 올려다보는 아이의 뒷모습으로. 마음이 엔다.

그러니까 이 책은 따뜻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따뜻하지 않아서 따뜻하고 싶은 아이의 절절한 심정을 전해준다. 현실에서, 엄마 곁에서도, 따뜻하지 않은 아이는 달걀이 따뜻해서, 암탉의 품이 따뜻해서, 병아리들과의 놀이가 따뜻해서 현실을 뿌리치고 판타지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한번 잠겼다 빠져나온 판타지는 고스란히 다시 펼쳐지지 않는다. 아이는 텅 빈 하늘을 대면해야 한다.

어쩌랴, 우리는 그렇게 담금질당하며 자란다. 커다랗고 시커먼 발들 뒤에서 또 다른 따뜻한 달걀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만 버리지 않으면 된다. 작가는 그려넣지 않았지만, 빈 하늘 어딘가에서 암탉과 병아리들을 우리가 볼 수 있으면 될 것이다.

기자명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