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은 어디로 갔을까?〉 루스 브라운 지음, 이상희 옮김 주니어RHK 펴냄

아주 오래전 책이라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는데, 어쩌다 이 책을 꺼내들게 되었다. 해바라기 씨앗 열 개가 자라는 과정에서 쥐와 비둘기와 달팽이에게 먹히고, 강아지와 고양이와 야구공 때문에 줄기가 꺾이고, 꽃 피우기 직전 진딧물 떼에 스러진다. 남은 단 하나의 꽃. ‘생명의 탄생과 성장이라는 대자연의 신비’를 담은 자연 관찰 테마에 숫자 세기라는 덤까지 얹힌 쓸모 있는 책으로 칭찬을 받았다. 루스 브라운의 세밀하면서도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그림은 말할 것도 없다. 마침내 활짝 펼쳐진 해바라기 꽃의 눈부신 노란색이라니! 십수 년 전에는 그 정도였다. 온갖 난관에도 꿋꿋이 살아남아 화려하게 꽃을 피우는 한 송이 해바라기의 승리가 대견한 정도였다.

지금 다시 보니, 해바라기가 꽃피우는 장면보다 다른 장면이 더 뭉클하다. 먹히고 꺾이고 공격당하는 씨앗과 줄기와 꽃송이에 가슴이 저릿하고, 먹는 개미와 생쥐와 진딧물까지 애잔하다. 나이 먹었다는 증거일까. 삶과 죽음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명 순환의 고리가 읽힌다. 먹히는 해바라기에게는 그것이 죽음이겠지만, 먹는 동물에게 그것은 있는 힘을 다해 살아가는 순간이다. 커다란 씨앗을 이고 가는 개미가 대견해 보이고, 끈적한 점액질을 뿜으며 떡잎을 삼키는 달팽이도 귀여워 보인다.

불쑥 솟은 더듬이에 박힌 눈이 게슴츠레한 게, 정말 맛있다는 표정이다. 하나씩 하나씩 빈자리가 생기지만 땅속에서 넓고 깊게 뻗어가는 잔뿌리는 그 자리를 메운다. 장면이 넘어갈수록 더 무성해지는 뿌리의 하얀 색깔이 힘차게 눈으로 뛰어 들어오고, 그 사이를 항상 구불구불 기어 다니는 지렁이들의 움직임이 간질간질 느껴진다. 씨앗들이 여러 생명 속으로 들어가 삶을 이어가게 해주니 슬퍼할 일도 아까워할 일도 없지 않겠는가. 화려하게 꽃피운 해바라기만큼이나 개미와 생쥐와 달팽이도 화려하게 삶을 피워내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도 아마 다른 자리에서는 또 다른 생명에게 자신을 내줄 것이다. 새와 멧돼지에게, 나아가 딱정벌레와 곰팡이에게 남김없이. 해바라기 꽃봉오리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진딧물을 바로 옆에서 야금야금 갉아먹는 무당벌레 장면이 그 재생과 순환의 원리를 한눈에 보여준다.

다시 읽은 책에서 느끼는 새로운 감상

이 메시지가 심각하게 근원적이어서 읽다 보면 어린이책이라는 느낌이 저만치 물러난다. 다시 읽은 책에서 얻은 새로운 감상이다. 어느 순간, 그 느낌이 찬란하게 꽃잎을 벌린 해바라기처럼 일순 피어오른다. 해바라기 씨앗을 심는 어린 아이의 손끝에서. 아이는 봉지에 든 해바라기 씨앗을 손바닥에 털어낸다. 통통한 손가락으로 땅에 밀어 넣는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아이의 손바닥에 다시 씨앗 열 개가 얹히지만, 이번에 그 원천은 플라스틱 봉지가 아니라 시들어 고개 숙인 해바라기 꽃이다.

아이의 얼굴에 어리는 찬탄의 표정을 통해 작가는 말하는 듯하다. 이 모든 삶과 죽음의 엄정한 현장을 기꺼이 받아들이자. 이 모든 것은 아름답다. 어린 해바라기 줄기를 놀다 꺾어버린 강아지와 고양이가 미안하다, 놀랍다 말하는 듯 고개 숙이거나 혀를 내미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도 덤으로 따라온다. 

기자명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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