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병상에 누워 있는 뱅상 랑베르(오른쪽)와 그의 어머니 비비안 랑베르. ⓒEPA
2013년 7월 병상에 누워 있는 뱅상 랑베르(오른쪽)와 그의 어머니 비비안 랑베르. ⓒEPA

3월10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새로운 조력사망법에 대한 계획을 밝혀 프랑스 사회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이 법안에는 스스로 판단이 가능한 18세 이상 성인이 중단기 사망선고를 받고 만성통증이 있는 불치병에 걸린 경우 ‘조력 사망’을 신청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최초 신청 이후 이틀간 재고 기간을 둔 뒤 의료진의 공동 합의를 거쳐 조력 사망을 승인하는 식이다. 의료진은 양심의 자유에 따라 조력 사망 절차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고, 환자는 절차 중 통증완화제 투여를 받을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 법안이 “새로운 권리나 자유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기준으로 의료 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죽을 권리’는 프랑스 사회에서 오랫동안 논의된 문제다. 개별 사례가 번번이 사회적 논란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2019년 연명치료 중단을 위해 ‘아사(영양분과 물을 공급하는 튜브 제거)’를 택해 논란이 된 뱅상 랑베르, 2020년 희귀 불치병을 앓고 장애인 권리 보장을 위해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다 스위스에서 조력 사망을 택한 알랭 코크, 2021년 스위스에서 조력 사망한 전 국무장관 폴레트 갱샤르, 현재까지 조력 사망 합법화를 요구하고 있는 가수 프랑수아즈 아르디 등이 있다.

프랑스에서는 그동안 조력 사망 관련 제도가 꾸준히 보완되어왔다. 2005년 제정된 레오네티(Leonetti)법으로 불치병 환자가 음식물 및 음료, 약 투여 등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었으며, 2016년 개정된 클레이-레오네티(Claeys-Leonetti)법에 따라 단기 사망선고를 받은 환자가 ‘심도 있고 지속적인 진정제’를 투여받을 수 있게 됐다. 이 조치는 환자를 인위적 코마 상태에 가까운 깊은 수면에 들게 해 죽음에 이를 수 있다.

이후 ‘죽을 권리’를 확대하는 법안이 수차례 논의되었다. 2018년 관련 법안을 검토한 프랑스 최고행정재판소 ‘콩세이데타(Conseil d’État)‘와 ’국가자문윤리위원회(CCNE)‘는 모든 환자가 고통완화치료를 받을 수 있게끔 보장할 필요성이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2021년 4월8일 국회는 안락사법 논의를 거쳤지만 3000건이 넘는 수정안 제출로 법안을 가결하지 못했다. 같은 날 라디오 프랑스앵포와의 인터뷰에서 클레이-레오네티법의 공동 발의자인 알랭 클레이는 “새 법안을 고려하기 전에 현재 시행 중인 법안이 죽음을 맞이한 국민에게 평등하게 적용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당시 국회 논의에 참여한 올리비에 베랑 전 보건장관은 코로나19 대응이 우선인 의료정책의 현황을 들며 “(조력사망법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선을 그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추진하는 조력사망법안은 5월 프랑스 국회에 상정될 예정이다.ⓒEPA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추진하는 조력사망법안은 5월 프랑스 국회에 상정될 예정이다.ⓒEPA

이듬해인 2022년 8월, 조력 사망을 다룬 영화에 출연한 95세 배우 린 르노와 국회의원 올리비에 팔로르니가 〈일요신문〉에 공동성명을 내면서 조력 사망 논의가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프랑스는 (적극적 안락사를 합법화하지 않음으로써) 큰 위선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말하는 이들은 중기 사망선고를 받은 불치병 환자의 경우도 클레이-레오네티법을 적용받을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9월2일 린 르노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면서 마크롱 대통령은 시민자문의회를 구성하고 전문가 및 국회의 의견을 취합해 조력 사망 정책 추진을 본격화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9월13일 프랑스 국가자문윤리위원회는 엄격한 조건하에 안락사 합법화가 가능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63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에는 고통완화치료법 강화 및 ‘심도 있고 지속적인 진정제’ 투여 용이화 등의 제안이 담겨 있다. 위원회는 해당 보고서에서 “프랑스에서 사람들이 악조건 속에 사망하고 있다. 프랑스 국민은 임종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프랑스식 공론화 모델 통해 결정

이후 본격적으로 ‘죽을 권리’에 대한 깊은 공론화 과정이 이어졌다. 이른바 ‘시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숙의하기 위해 2019년 도입된 ‘시민자문의회’가 이때 기능을 했다. 2022년 10월 무작위 추첨으로 185명의 시민자문의회가 구성됐고, 헌법 자문기관인 경제사회환경위원회(CESE)의 지휘 아래 4개월간 주말마다 파리에서 조력사망법에 대해 시민들이 논의했다. 이 숙의 민주주의 시스템은 한국에도 소개될 만큼 대내외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다. 다양한 직종과 연령으로 구성된 시민자문의회에서 ‘다양한 상황과 변화에 알맞은 임종 지원 제도가 도입되어야 하는가’ 하는 의제를 중심으로 전문가 교육, 현황 파악, 현장 방문 및 토론을 통해 조력 사망에 대한 의견을 취합했다.

지난해 4월2일 시민자문의회는 최종 보고서에서 “의사와 환자 간 충분한 논의 시간을 통해 환자의 선택과 의지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라며 구성원의 76%가 조력 사망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이날 국가의료인위원회의 장마르셀 무르그 부대표는 “시민자문의회는 시작에 불과하다. 법안은 결국 국회가 통과시키기 때문이다. 의료진도 사회 구성원이므로 (시민자문의회와) 다른 의견을 낼 수 있지만 현재 법을 보완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의한다”라고 답했다.

국가자문윤리위원회의 지적과 마찬가지로 시민자문의회도 고통완화치료법과 ‘심도 있고 지속적인 진정제’를 투여하기 용이하도록 제도를 손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존엄 사망 과정에서 환자의 고통을 줄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는다. 지난해 3월 ‘임종 및 고통완화치료 국가기관(CNSPFV)’이 낸 보고서에 따르면 일반의들을 대상으로 한 진정제 투여 교육이 이뤄지지 않았고, 진정제 처방도 2021년에야 가능하게 됐다. 사라 도쉬 CNSPFV 대표는 “법적으로 지표 공개가 의무화되지 않아서 얼마나 많은 환자가 심도 있고 지속적으로 진정제를 투여받았는지 알 수 없다”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3월25일 소생술 전문의 프랑수아 페리고 역시 언론 인터뷰에서 “의료체계상 완화치료에 대한 문화와 능력이 부족하다”라며 의료진의 교육 부족을 지적했다.

1월23일 파리 국회의사당 근처에서 열린 안락사 찬성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안락사를 지지하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있다.ⓒAFP PHOTO
1월23일 파리 국회의사당 근처에서 열린 안락사 찬성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안락사를 지지하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있다.ⓒAFP PHOTO

다만 조력 사망 확대에 반발하는 목소리도 여전히 있다. 특히 의료진의 반발이 크다. 여기에는 ‘의료 행위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이 깔려 있다. 조력 사망은 결국 의료인의 판단과 도움 아래서 이뤄져야 하지만, 그 행위의 목표는 삶이 아니라 결국 죽음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4월3일 고통 완화치료 담당 의사 알렉시 부르노는 라디오 인터뷰에서 “의료진의 사명은 무엇보다 아픈 사람들을 돕는 것이기에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은 의료 행위라고 여길 수 없다”라고 말했다. 프랑스 고통완화치료협회(SFAP) 대표 의사인 클레르 푸르카드 역시 2023년 12월10일 마크롱 대통령의 조력사망법안 계획 발표 이후 언론 인터뷰에서 “사망시키는 것은 치료가 아니며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어긋나는 행위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푸르카드는 올해 3월 언론 인터뷰에서 “안락사를 합법화한 국가들도 처음에는 조건을 내걸었지만 임시적일 뿐이었다. 오늘날 프랑스에선 매일 500여 명이 고통 완화치료를 받지 못한 채 사망하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 (조력 사망 확대보다) 더 위급한 조치는 고통 완화치료를 더 늘려서 환자들의 마지막을 함께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반대로 조력 사망 합법화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마크롱 정부의 이번 법안이 여전히 미진하다며 우려하기도 한다. 장뤼크 로메로 존엄사권리협회(ADMD) 명예회장은 마크롱 정부의 법안 내용 중 조력 사망 신청 승인을 하기 위해선 의료진이 공동 합의를 이뤄내야 한다는 점에 대해 “(환자 입장에서) 의료진의 합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다른 의료기관을 찾아가고, 그곳에서도 합의가 되지 않을 경우 결국 법정까지 가야 하는데, 이런 제약이 염려된다”라고 지적했다. 의료진에게 의존하지 않고 환자 자신의 결정을 더 중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사망시키는 것은 치료가 아니다”

찬반 논란이 여전하지만 이번 조력사망법안 추진은 프랑스 사회에 큰 변화를 만들어낼 것으로 보인다. 3월10일 마크롱 대통령의 법안 추진 발표 직후 프랑스 주요 언론들은 각계각층의 반응을 소개하느라 분주했다. 존엄사권리협회(ADMD) 회장인 조나탕 드니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오랜 기간 기다려온 결정이라서 기쁘다. 다만 (마크롱 대통령의) 중기 사망선고 개념이 (6개월인지 12개월인지) 불확실하다”라며 개념을 구체화해달라고 요구했다. 국가자문윤리위원회 위원이자 브장송 중앙병원 의사인 레지 오브리도 라디오 인터뷰에서 “현 상황에 대해 만장일치를 얻긴 어려울 것”이라면서 마크롱 대통령이 고통완화치료에 10년간 10억 유로(약 1조4500억원)를 더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한 점에 대해 긍정적 의견을 보였다. 루게릭병 환자 로이크 레지부아 씨 역시 “불치병 환자들은 마크롱 대통령이 조력사망법안을 상정하기를 수개월 동안 기다려왔다. 우리가 원하는 건 건강한 임종을 맞이하는 것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지난해 4월 시민자문의회의 최종 보고서 제출 직후 프랑스여론연구소(Ifop)가 실시한 여론조사(성인 1010명 대상)에 따르면, 응답자의 70%가 적극적인 조력 사망에 관해 긍정적이라고 답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수많은 논의를 이끌어왔던 조력사망법안은 4월 국무회의를 거쳐 5월 프랑스 국회에 상정될 예정이다.

기자명 파리∙이유경 통신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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