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크게 흥행한 일본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2016)의 한 장면.
세계적으로 크게 흥행한 일본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2016)의 한 장면.

※영화 〈너의 이름은〉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 일본 청소년 두 명이 있다. 17세 소녀 ‘미츠하’는 깊은 산골 이토모리에 사는 신관 집안의 무녀다. 다음 생에는 산골 말고 화려한 도쿄의 남자로 살고 싶다. 또 다른 소년 ‘타키’는 바로 그 도쿄에서 고교 시절을 만끽 중이다. 어느 날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다. 둘의 몸이 바뀐 것이다. 불규칙하게, 자는 동안 몸이 바뀐다. 처음에는 실수를 연발하다가 상황을 깨닫는다. 서로의 생활을 위해 규칙들을 정하고, 몸이 바뀐 날 생긴 일을 스마트폰에 남겨 준다. 이 이상한 현상을 극복하자며 협력도 약속한다. 몸이 바뀐 다른 성별의 청소년 둘이 벌이는 티격태격 에피소드들이 재미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君の名は, 2016)의 도입부 이야기다.

소소한 일상을 이어가던 영화는 갑자기 거대한 비극으로 반전한다. 어느 날 타키는 스마트폰에서 오늘 밤 혜성이 지나갈 거라는 미츠하의 메시지를 본다. 궁금증에 미츠하에게 전화를 걸지만 연결되지 않고, 이제 둘의 몸도 바뀌지 않는다. 타키는 이토모리를 찾아 나서지만 겨우 찾아낸 그곳에는 거대한 호수만 있다. 3년 전 혜성 파편이 떨어져 주민 500여 명이 죽은 대재난의 현장이다. 타키는 희생자 명부에서 미츠하의 이름을 발견한다. 그녀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2016년의 타키가 살아 있던 2013년의 미츠하와 연결되었고, 미츠하가 전화를 받지 않은 그날이 바로 이토모리에 혜성이 떨어진 날이었던 것이다!

절망한 타키는 기억을 더듬으며 산으로 올라간다. 거기서 미츠하가 만든 술을 마시고 쓰러져 있다가 황혼 무렵 둘이 다시 이어진다. 타키를 통해 혜성의 추락을 알게 된 미츠하는 그날로 돌아가 혜성이 떨어진다며 사람들을 대피시키려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다. 천신만고 끝에 성공해서 결국 재난을 막는다.

다시 시간이 흘러 2023년, 둘은 서로에 대한 기억을 잃은 채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출근길 엇갈리는 전철을 탄 둘의 눈이 마주친다. 타키가 먼저 내리고 미츠하도 다음 역에서 내린다. 무작정 뛰어가다 어느 계단에서 마주친 둘, 천천히 서로를 향해 걷는다. 그 사람일까, 머뭇머뭇 지나치는데 타키가 돌아서며 외친다. “나, 너를 어딘가에서….” 돌아선 미츠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나도!” 타키도 눈물을 흘린다. 둘이 동시에 말한다. “너의… 이름은…?” 화면이 푸른 하늘을 비추고 주제가가 흐르면서 막이 내린다.

영화는 공전의 성공을 거뒀다. 2020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크게 성공한 일본 애니메이션이 됐다. 아름답고 찬란한 영상미, 심장을 울리는 가사와 멜로디의 삽입곡들도 흥행에 큰 역할을 했다. 열띤 호응의 중심에는 공감을 자아낸 서사와 절실한 주제의식이 있다. 재난에 던져진 인간들이 필사의 노력으로 재난을 극복하고, 우여곡절 끝에 사랑을 이룬다는 이야기가 마음을 울렸다. 미츠하와 할머니를 이어주는 매듭끈 ‘무스비(結び)’는 미츠하와 타키를 이어주는 인연의 끈이기도 하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이어주는 연결의 끈이기도 하다. 영화는 재난 속에 서로 연결된 존재라는 감각을 일깨웠다.

물론 재난과 사랑을 연결하는 영화는 흔하다. 〈너의 이름은〉이 달랐던 건 영화가 3·11 참사에 대한 은유이자 애도로 읽혔기 때문이다. 2011년 3월11일, 일본 도호쿠 지방을 강타한 대지진과 쓰나미, 원전 폭발사고로 1만8000명 이상이 죽거나 실종됐고, 6000명 이상이 다쳤다. 쓰나미가 마을을 덮치고 원전이 폭발하는 모습이 실시간 중계될 때의 충격은 초현실적이었다. 희생자를 구하고 이재민을 도우려는 자원봉사자들이 일본 전역과 세계로부터 도착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아라하마에서 사망자 수습작업이 펼쳐지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아라하마에서 사망자 수습작업이 펼쳐지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너의 이름은〉 그리고 세월호

그리고 현실의 시간이 시작됐다. 관료들은 매뉴얼에 없다며 지원을 거부하고, 사고의 주범 도쿄전력은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했다. 일본 정부는 무능했다. 원전 체제는 별 탈 없이 부활했고, 책임자들에 대한 형사처벌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피해자들을 따돌리는 이지메 현상이 일어나 충격을 던지기도 했다. 오직 개인들의 자발적이고 작은 노력만 돋보였다. 영화는 이 파렴치한 세상에서 힘 약한 개인들이 서로 돕고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그 키워드가 바로 ‘너의 이름’이고 ‘무스비’였다. 너의 이름이 구체적인 타인을 의미한다면 무스비는 그들을 이어주는 인연이다. 기억해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개인들 사이의 연결이라고.

〈너의 이름은〉은 일종의 사회현상이었다. 일본 최대의 영화 사이트 에이가(映画)닷컴에는 수많은 감상평이 올라왔다. 3·11 참사와의 연관성을 떠올린 것이 대다수였다. “지진재해가 생각나서 마음이 무거웠지만 좋았다. … 시공을 넘어서 서로 돕는다는 느낌이 좋았다.” “동일본대지진 후 잠시 동안은 많은 사람이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가본 적도 없는 지역의 날씨에도 일희일비하고, 비가 오면 피해 지역이 추울 텐데 하면서 가슴 아파했다. 그런 생각을 이 영화가 되살려주었다. 혹시 그 대참사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대신 다른 곳에서 참사가 일어나-인용자) 그 지역에서 희생당한 누군가가 자신의 아내가 되었을지 모르고 동료가 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의 이름은〉 등 재난과 사랑을 연결하는 애니메이션을 만든 신카이 마코토 감독.
〈너의 이름은〉 등 재난과 사랑을 연결하는 애니메이션을 만든 신카이 마코토 감독.

 

한국인이라면 여기서 자연스레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를 떠올리게 된다. 희생자들의 고통에 공감하면서 나는 그저 운이 좋아 살아남았을 뿐이라는, 연결됨의 감각 말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도 2017년 2월9일 SBS에 출연해,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세월호 사고가 났다며 관련성을 언급한 바 있다.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서 대기하라”는 안내 방송 탓에 큰 희생이 초래됐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그래서일까? 미츠하의 친구 사야카의 대피 방송을 제지한 주민센터 측은 모두 침착하게 대기하라는 방송을 내보낸다. 방송을 들은 사람들은 “집에 가만히 있으래” 하면서 머문다. 맥락을 알고 보면 더욱 힘든 장면이다.

좋은 영화에도 논란은 따르는 법. 〈너의 이름은〉에도 이런저런 비판이 제기됐다. 한국 영화 〈시월애〉(2000) 등 여러 영화들에 대한 표절 의혹도 나왔다. 유사한 설정이지만 표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많은 것 같다. 훨씬 진지한 문제 제기도 있다. 한국과 일본의 청년 문화를 비교연구해온 일본의 사회학자 후쿠시마 미노리는 ‘사회성의 부재’라는 키워드로 영화의 수용 과정을 짚는다. 대지진을 두고 자연재해로서의 비극성만 부각할 뿐, 인재로서의 비극성, 사회문제로서의 비판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로를 향한 개인들의 마음, 그 연결도 어떤 절대적이며 운명적인 인연이라는 측면이 강조될 뿐(개인 사이의 무스비!), 차이와 다름 사이에서 갈등하고 부딪치면서 성장하는 ‘사회’라는 문제 설정이 누락되어 있다는 것이다(후쿠시마 미노리, ‘〈너의 이름은〉에서 일본 청년세대의 사회성 부재를 읽는다’).

이 착하고 아름다운 영화에서까지 흠결을 찾아내는 사회학자라는 인간들은 어떻게든 삐딱한 시선으로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부류가 아닐까?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일본 사회의 역사적 맥락에서 〈너의 이름은〉이라는 제목이 지닌 의미와 무게 때문이다.

동명의 라디오 드라마를 원작으로 한 영화 〈너의 이름은(제3부)〉(1954년) 포스터.
동명의 라디오 드라마를 원작으로 한 영화 〈너의 이름은(제3부)〉(1954년) 포스터.

 

신카이 마코토보다 훨씬 전에 또 다른 〈너의 이름은〉이 있었다. 1952년부터 1954년까지 총 98회 방영된 NHK 라디오 드라마 〈너의 이름은〉이 바로 그것이다. 극작가 기쿠타 가즈오의 대표작으로, 서로 이름도 모르는 채 만날 듯 만나지 못하던 연인이 끝내 만나 사랑을 이룬다는 청춘 이야기의 전형을 확립한 드라마다. 방송일인 목요일 밤에는 “목욕탕 여탕에서 사람이 사라진다”라고 할 정도로 기록적인 인기를 끌었다. 방영 중에 1, 2, 3부로 영화화되어 1953년과 1954년의 박스오피스 1위를 휩쓸었다. 1954년 일본에서 개봉한 영화들이 〈7인의 사무라이〉 〈고지라〉 〈로마의 휴일〉 같은 대작이었음을 상기해보면 〈너의 이름은〉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 하루키와 마치코가 처음 만난 스키야바시 다리에 서 있는 광경은 1950년대를 상징하는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다. 2016년 〈너의 이름은〉의 엔딩인 계단 신은 스키야바시 다리 신에 바치는 오마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착한 마음을 넘어 구조의 문제 직시하기

〈너의 이름은〉은 라디오 드라마로 1962년, 1966년, 1976년에 리바이벌됐고, 1991년에 ‘NHK 연속 테레비소설’로 제작된 다음 2006년에 앙코르 방영됐다. 2020년에는 NHK 아침드라마 〈옐(エール, 응원가(yell))〉 속의 극중극으로 다시 방영됐다.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을 접할 때, 저 수많은 〈너의 이름은〉이 환기되는 것은 거의 자동적 프로세스인 셈이다.

원조 〈너의 이름은〉은 어떤 이야기일까? 드라마는 1945년 5월24일, 도쿄에 미국 공군의 소이탄이 무차별로 투하된 대공습의 날에 시작된다. 긴자의 다리 스키야바시 일대에서 화염을 피해 도망치던 주인공 하루키와 마치코는 우연히 서로의 생명을 지켜주게 된다. 다음 날 아침 스키야바시 다리 위에서 헤어지며 하루키가 말한다. “만약 반년이 지나도 살아 있다면… 지금부터 반년째의 밤, 11월24일이네, 다시 한번 여기서 만나지 않을래, 너…?” 마치코가 대답한다. “그래, 만나… 서로의 생명의 강이 아직 흐르고 있다는 걸 축하하기 위해서 말이야.” 하루키가 묻는다. “너의 이름은…?” 왠지 대답하지 않는 쪽이 로맨틱한 것 같아 마치코는 대답하지 않고 돌아선다.

반년 후 둘은 만나지 못한다. 그 사이 8월15일의 패전이 있었고, 운명이 이들을 갈라놓는다. 1년 반 만에 겨우 만나지만 마치코는 다음 날 결혼할 예정이다. 공습에 부모를 잃은 마치코에게 숙부가 엘리트 관료 하마구치와의 결혼을 강권한 탓이다. 질투하는 남편과 학대하는 시어머니 아래서 마치코는 불행하다. 하루키와 마치코는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사랑이 깊어진다. 남편의 아이를 임신한 채 마치코는 마침내 이혼 동의를 얻어내고, 하루키와 함께하리라는 암시와 더불어 드라마는 끝난다. 1945년 5월24일부터 1953년 9월까지 8년 반 동안의 사랑 이야기가 이렇게 끝난다. 전쟁 전과는 다른 새로운 연인관계와 개인주의, 핵가족 상을 제시해 큰 공감을 얻었다고 평가된다.

당초의 시나리오에서는 하루키와 마치코의 비중이 크지 않았다고 한다. 청취자들은 비중이 더 큰 퇴역군인, 미군 상대 직업여성 팡팡, 전쟁 ‘미망인’처럼 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들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보여주는 하루키와 마치코의 이야기에 열광했다. 결국 드라마의 방향이 바뀌었다.

1945년 5월25일, 도쿄를 폭격 중인 미 공군 B-29 폭격기.ⓒWikimedia
1945년 5월25일, 도쿄를 폭격 중인 미 공군 B-29 폭격기.ⓒWikimedia

 

망각과 망각의 불가능성은 이 드라마의 중요한 주제다. 드라마는 시작할 때마다 “망각이란 잊어버리는 것/ 잊지 못하고 망각을 맹세하는 마음의 서글픔이여”라는 대사를 반복했다. 전쟁과 관련된 많은 기억들이 망각되고 억압됐다. 그래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다. 폭탄이 쏟아지는 도쿄, 불길에 죽어간 사람들이었다. 도쿄 대공습으로 약 20만명이 죽거나 실종됐다. 원폭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낳은 재앙이었다.

패전국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맺어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1952년 4월에 발효됐다. 드라마는 바로 그달에 시작됐다. 점령군의 통제를 벗어난 첫 번째 드라마가 도쿄 대공습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한 것이다. 일본의 문화연구자 스즈키 다카네는 ‘망각의 기억-기쿠타 가즈오, 〈너의 이름은〉에서의 도쿄‘에서 말한다. 도쿄와 대도시에 대한 공습을 잘 모르던 농촌 지역 대다수 일본인들이, 이 드라마를 통해 대공습을 간접 체험하고 피해자 정체성을 공유하게 됐다고. 드라마는 대공습의 원인이나 전쟁 책임 따위는 전혀 다루지 않는다. 공습과 전쟁은 ‘자연재해’처럼 묘사되고, 모두가 힘없고 슬픈 피해자로 그려진다. 대공습의 피해 기억이 전쟁 책임에 대한 망각과 결합된다(鈴木貴宇, ’忘却の記憶 - 菊田一夫, 『君の名は』における 東京’). 일본 현대사에서 계속 리바이벌되어온 〈너의 이름은〉을 둘러싼 의미망이다.

두 개의 〈너의 이름은〉은 물론 다른 이야기다. 하늘에서 폭탄이 떨어지고 혜성이 떨어진다고 해도 많은 면이 다르다. 원인과 책임이 있는 인간의 비극을 자연재해로 묘사하는 것, 직면해야 할 정치사회적 문제를 선한 개인 간의 연결이라는 방식으로 우회하는 건 같다. 한국 사회는 얼마나 다를까? “잊지 않겠다”라고 다짐하지만, 생명과 안전을 경시하는 파렴치한 세상을 변혁하기 위한 고통을 우리는 얼마나 감내해왔을까? 착한 마음을 넘어 구조의 문제를 얼마나 직시했을까? 마침 3·11에서 4·16으로 향하는 시기다.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자문해본다.

기자명 조형근 (동네 사회학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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