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교씨는 세월호 참사로 아버지 정원재씨를 여의었다. 지금은 형과 함께 아버지의 조경회사를 이끌어가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정준교씨는 세월호 참사로 아버지 정원재씨를 여의었다. 지금은 형과 함께 아버지의 조경회사를 이끌어가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정원재씨의 아들 정준교씨(42)는 형과 함께 아버지의 조경회사를 운영 중이다. 아버지는 세월호에 오르기 직전까지 일 얘기만 하셨다고, 그는 말했다. 세월호가 침몰한 2014년 4월16일은 아버지의 60번째 생일이었다.

“아버지 생신이 4월16일이에요. 그래서 그날 맞춰서 친구들과 회갑 여행을 떠나신 거예요. 여객선 터미널에서 배웅할 때 떡도 맞춰서 드렸어요. 저희는 조경업을 하는데 4월이 제일 바쁠 때예요. 그래서 아버지가 그 전날까지도 안 가신다는 것을 그냥 가시라고 설득해서 보냈거든요. 솔직히 좀 떠밀려 가신 감도 있어요. 그게 항상 죄책감으로 남아 있어요.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소식을 듣고 저와 아내가 먼저 팽목항으로 달려갔어요. 팽목항에 낮 12시쯤 도착했는데 구조됐다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르더라고요. 오후 3시쯤 됐을 때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 밤 배를 타고 사고 해역에 도착했는데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선수 부분이 물 밖으로 나와 있는데, 조그만 배들이 그 주위를 계속 돌기만 했고, 지휘선으로 보이는 배들은 그냥 보고만 있는 거예요. 방관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저라도 물에 뛰어들어야 구조대도 물에 들어올 것 같아서 정말 물속에 뛰어들려고까지 했어요. 아버지는 7일째 되던 날 친구분들과 함께 진도 팽목항으로 올라오셨어요. 그런데 시신이 너무 깨끗해서 만져도 될 정도였어요. 어딘가에서 분명히 살아 계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저는 단원고 희생자 부모들만큼 열심히 활동하지는 못했어요. 제가 아이를 낳고 나서야 그분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겠더라고요. 자식이 내 인생의 전부인데 그분들은 자식을 잃었으니 생활할 수가 없었겠지요. 그분들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 열심히 싸웠지만 언론에서는 보상금에 포커스를 맞춰 선동했어요. 보상금 더 받으려고 저런다고…. 그 무렵 저희에게 아이가 생겼어요. 그런데 예정일이 4월16일이었어요. 일주일 정도 늦게 나오긴 했지만 4월16일과 뭔가 겹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렇게 태어난 저희 아이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416으로 시작해요. 아이가 태어난 뒤로 일도 좀 풀리기 시작했어요. 선물 같은 아이 덕분에 가족들도 많이 치유된 것 같아요.

세월호 10년이 되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안전에 대한 의식이 굉장히 많이 올라간 것 같아요. 특히 안전불감증은 많이 사라진 것 같아요. 국민들은 안전! 안전! 안전! 하는데, 위에 계시는 분들은 그냥 구호만 외치는 것 같아요. 국민들한테는 지키라고만 말하고, 정부에 계시는 분들은 안전에 대한 시스템을 만들거나 지키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5월 광주가 40년 넘게 진실을 찾고 있는 것을 보면, 세월호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에요. 정치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면 진실에 다가가는 것도 좀 더 빨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마지막으로 유가족들에게 좀 더 좋은 환경이 제공될 수 있게 노력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세월호로 인해 알게 모르게 피해 보신 분들, 10년 동안 잊히지 않게 힘써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기자명 조남진 기자 다른기사 보기 chanmoo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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