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8일 홍콩 행정장관 선거에 단독 출마해 당선된 존 리 전 정무부총리. ⓒEPA

2022년 ‘국경없는 기자회(RSF)’ 세계 언론자유지수에 따르면 홍콩은 180개국 중 148위를 기록했다. 2002년 첫 보고서 발표 당시 18위였다. 그때가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지 5년째 되던 해인데 그 후 130위나 하락했다. 홍콩에서는 언론자유를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에 두 체제 공존)’의 지표라고 본다. 지난해 중국 정부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왔던 일간지 〈빈과일보〉와 온라인 매체 〈입장신문〉이 차례로 폐간하면서 홍콩 언론 생태계는 매우 취약해졌다. 7월이면 홍콩 국가보안법이 시행된 지 2년이 된다.

지난 5월8일 경찰 출신 존 리(리자차오) 전 정무부총리가 홍콩 행정장관으로 당선되었다. 5월15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언론자유는 홍콩의 신분증과 같습니다. 이미 주머니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쟁취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만약 그 ‘신분증’이 일국양제 아래의 언론자유라고 한다면, 700만 홍콩인은 이미 신분증을 분실한 것과 다름없다.

영국 식민지에서 중국으로 반환된 후로 홍콩 정부가 경찰 출신을 행정 및 사법 요직에 임명하는 일은 ‘존 리’ 말고는 거의 없었다. 베이징 정부가 경찰 출신인 존 리 전 정무부총리를 낙점했다는 것은 정치적 ‘상식’을 깨트린 것이다. 리 당선자는 2012년 렁춘잉 당시 행정장관을 통해 보안국 부국장으로 임명되었고, 2017년 보안국장으로 승진해 ‘2인자’ 자리인 정무부총리에 올랐다. 올해 행정장관직 단독 후보로 나와 당선되었다. 모두 경찰 신분의 한계를 허문 인사였다. 세 차례에 걸친 ‘규칙 깨기’의 배경에는 영국 식민지가 남긴 규범을 깨트리려는 베이징 당국의 의도가 담겨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리 당선자는 와얀칼리지(Wah Yan College)를 졸업했다. 그 후 홍콩 종합대학교에 합격했지만 ‘가정상의 이유로’ 학업을 포기했다. 1977년, 20세 나이로 경찰학교에 입학했고, 그의 인생은 바뀌게 된다.

1977년은 홍콩 경찰 역사에서 상징적인 해다. 그 전까지 홍콩 경찰은 부패의 상징이었다. 도박을 비롯해 각계각층의 경제권을 쥐고 있었다. 1973년 홍콩 정부가 뇌물수수 방지령을 발동했고, 영국인 경찰 간부 피터 고드버에게 재산 공개를 요구하자 영국으로 도주한 사건이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이듬해 반부패 수사기구 ‘염정공서(廉政公署·ICAC)’가 설립된다. 그 이후 많은 비리 경찰이 해고되면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1977년 경찰 100여 명이 염정공서 본부로 난입해 직원을 구타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당시 영국 식민정부는 이 사건을 ‘경렴충돌(경찰과 염정공서의 충돌 사건)’이라는 다소 중립적인 용어로 설명했다.

경찰의 기세를 누르지 못하던 영국 정부도 1977년 ‘대가’를 치른 후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경찰은 홍콩의 정책 결정에 참여할 수 없고, 정치적 중립을 유지해야 했다. 경찰 고위 관료는 은퇴 이후 엄격한 규제를 받았다. 형사 기소권은 변호사 출신인 형사국장에게 맡겨졌다. 홍콩 경찰에겐 법 집행 권한만 남겨진 셈이다.

1977년 경찰에 입문해 범죄 수사를 담당하던 리 당선자는 축소됐던 경찰의 영향력 확대에 힘써온 인물이라 할 수 있다. 2014년 ‘우산혁명’이나 2019년 송환법 반대 시위 등 사회운동에 대해 공식 언급을 한 적은 없다. 하지만 리 당선자는 반대 의견을 제거하기 위해 식민지 ‘악법’을 가장 잘 사용한 경찰 정책국 배후 인물이었다. 대표적으로 2018년 홍콩 경찰은 홍콩 독립을 주장하는 홍콩민족당(Hongkong National Party) 해산을 추진했다. 국가안보와 공공안전, 공공질서 등을 해칠 우려가 있을 때 사회단체의 해산을 가능케 한 ‘사단조례(社團條例)’가 그 근거였다. 당시 ‘민주파’ 의원들은 경악했다. 사단조례는 홍콩 폭력 조직인 ‘삼합회’를 단속할 때조차 사용되지 않은 식민지 시대의 사문화된 법령이었기 때문이다. 홍콩민족당은 2018년 9월 홍콩 정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기자의 취재 범위 좁아지면

홍콩 정부는 사단조례 같은 식민지 시대의 유산에 대해 언급을 회피해왔다. 분명한 사실은 리 당선자가 이 악법 계승을 꺼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2020년 7월 홍콩 국가보안법 시행 이후 정부가 식민지 시대의 ‘형사범죄조례(일종의 형법)’를 이용해 정치인과 언론을 선동죄로 고발하게 될 것이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 법에 따르면 선동적 출판물 출간을 모의한 죄는 최대 2년 징역형에 처해진다. 2020년 9월 홍콩 경찰은 정치운동단체 ‘인민역량(People Power)’의 탐탁치 부주석과 민주화 활동가 조슈아 웡을 선동죄로 체포했다. 영국 식민지 정부도 ‘선동죄’를 이용하지 않았다. 2021년 12월29일 온라인 매체 〈입장신문〉은 창간 7주년을 하루 앞두고 폐간되었다. 선동적인 출판물을 간행했다는 혐의로 전현직 임직원이 경찰에 체포되면서다. 〈입장신문〉 편집진 두 명은 여전히 감옥에 있다.

지난해 4월 홍콩 법원은 RTHK 방송 차이위링 PD(가운데)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EPA

경찰 출신 행정장관이 집권한 시대에 홍콩의 독립언론은 어떻게 될까. 수사관 출신인 리 당선자는 기자의 취재 활동을 어렵게 만드는 기본법 조항을 잘 알고 있다. 보안국에 재직하는 동안 개인정보 관련 규칙을 변경한 것이 대표적이다. 홍콩 공영방송 RTHK의 시사 프로그램 담당 PD 차이위링은 2020년 7월 송환법 반대 시위 당시 홍콩 시위대에 가해진 ‘백색 테러’ 배후를 추적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차이위링 PD는 당시 시민들이 촬영한 영상에서 곤봉과 각목이 실려 있던 자동차 번호판에 주목했다. 차적 조회 결과 친중파 인사의 차량이었다. 그런데 차이위링 PD는 언론인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는 혐의로 2020년 11월 체포된다. 홍콩 법원은 공공 데이터에 허위 정보를 제공하고 접근했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언론사 기자들은 더 이상 자동차 번호판을 통해 차주 신원을 확인하기 어렵게 되었다. 기자 신분으로 건축과에 건축계획서를 신청하는 것도 힘들어졌다. 기자의 취재 범위가 좁아질수록 언론은 깊이를 잃고, 보도는 무의미해질 것이다. 무엇보다 뉴스와 대중이 멀어지게 될 것이다.

리 당선자는 시위 진압작전의 총책임자인 탕핑컹 전 경찰국장(현 보안국 서기)과 함께 언론의 취재 과정에 ‘은밀하게’ 간섭했다. 국가보안법 시행 이후 일부 외신기자들이 감시 대상에 올랐다는 사실을, 대다수 홍콩 시민들은 알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홍콩 경찰은 2019년 송환법 반대 운동 관련 서적을 출간한 인쇄소를 수색하기도 했다. 당시 인쇄소에서 경찰이 “이 사진 빼라” “저 사진도 빼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2019년 송환법 반대 시위 사진들이었다. 해당 사진들이 베이징의 심기를 건드린 ‘레드라인’이 되었다는 소문이 당시 출판계에 돌았다.

지난해 6월18일 인쇄 중인 〈빈과일보〉. ⓒHK feature

2021년 6월 〈빈과일보〉가 폐간되기 한 달 전, 미디어 업계에서는 중국공산당이 조만간 〈빈과일보〉를 없앨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 소문만으로 기자 20명 이상이 사임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사실이었다. 정권은 소문을 제대로 활용했다. 나는 여전히 6개월마다 “정부가 단기간에 독립언론 운영을 중단시킬 것”이라는 소문이 미디어업계를 휩쓸고 가는 것을 본다. 익명의 누군가로부터 “당신은 표적이 됐다. 다른 기자들에게 피해 주지 말고 일을 접어라”는 취지의 텔레그램 메시지를 받기도 한다.

이러한 경험은 개별 사례에 국한되지 않았다. 홍콩 정부와 법원은 〈빈과일보〉 직원들이 다른 방법으로 매체를 개설하는 것을 수시로 간섭했다. 그 결과 인터넷을 통한 보도를 주저하게 되었다. 〈빈과일보〉 〈입장신문〉 〈시티즌뉴스〉 등 폐간된 매체 기자만 해도 최소 2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절반 넘게 기자직을 그만두거나 해외 유학을 가거나, 혹은 다른 분야에서 일자리를 구한 상태다.

나는 홍콩에서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후 ‘새로워진 홍콩’이 이제 보안국으로 넘어갔다고 본다. 2021년 9월26일 최근 톈안먼(천안문) 사건 희생자를 추모하는 단체인 ‘애국민주운동 지지 홍콩시민연합(지련회)’이 공식 해산했다. 당시 지련회 간부들이 국가 전복 및 선동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얼마 전 이 기소장 서명을 당시 보안국 행정실장이던 리 당선자가 작성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는 행정실장으로서 리 당선자가 이미 사법 및 법 집행 권한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존 리 당선자와 탕핑컹 보안국 서기는 중국공산당과는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중국 본토에 명확한 ‘레드라인’이 있다면, 홍콩 정부는 우리에게 레드라인이 어디까지인지 말하지 않는다. 만약 홍콩인들이 ‘평소처럼’ 살고 싶다면 이 레드라인 하나가 어디까지 그어져 있는지 테스트를 해봐야 한다는 얘기다.

매일매일이 마지막 날과 같다

중국 본토에서 그 선은 명확하다. 1989년 6월4일 사건에 대해 공개 비판한 시민에겐 최소 10년 형이 내려졌다. 지난해 중국의 인권활동가를 인터뷰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베이징 당국은 시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톈안먼 사건에 관한 발언은 불법이다.” 장쩌민 국가주석 시대에는 레드라인이 좀 더 느슨했다. 〈남도일보〉와 같은 언론은 중국 인민의 그늘진 모습을 폭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진핑이 정권을 잡은 이후로는 중국 공안이 나서서 언론 보도의 선을 명확히 했다.

반면 홍콩에서는 보도 내용이 ‘선’에 위배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행정장관을 비판하는 게 범죄가 될까? 〈빈과일보〉가 국가 전복 혐의를 받고, 〈입장신문〉이 선동적인 출판물을 공모했다는 혐의를 받았을 때, 언론인들은 그제야 그것이 ‘레드라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홍콩 내 외신기자들은 여전히 보도를 이어간다. 〈홍콩 프리 프레스(HKFP)〉와 같은 언론사는 여전히 정부를 비판한다. 현재 어느 누구도 레드라인이 어디로 이동했는지 모른다. 다음번엔 내가, 혹은 다른 이가 선을 넘는 기자가 될 수 있다.

7월1일 존 리 당선자가 공식적으로 행정장관 자리에 오른다. 나는 홍콩 독립언론의 현 상황에 대해 낙관적이지 않다. 리 당선자가 중앙정부에 복종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홍콩의 중국화가 가속화할수록 홍콩은 국제사회에서 정치외교적으로 단절될 뿐 아니라, 군사적 긴장이 팽배한 중국의 준군사도시가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언론은 어떠한 생존 공간도 가질 수 없다. 베이징이 홍콩을 ‘국제사회에 부분적으로 개방’하는 결정을 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리 당선자 집권 후 언론인을 뒤쫓거나, 크라우드펀딩을 금지하거나, 편집국을 압수수색하는 등 행정 조치를 취할 것이다. 이 같은 간섭은 우리를 천천히 죽게 만든다. 그중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국가보안법을 동원해 언론사 운영을 중단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홍콩 독립언론은 매일매일이 마지막 날과 같다. 오늘은 있지만 내일은 없고, 보도는 언제까지 가능할지 전혀 가늠할 수 없다.

기자명 홍콩·관춘호이 (전 <빈과일보 > 기자, 현 독립언론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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