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인류가 멸망한다면? 그리고 지구상에 새로운 종족이 나타난다면? 〈ROBOT〉은 그런 상상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다. 새로운 종족이라고는 하지만 로봇들은 여러모로 인간을 닮았다. 생긴 것도 그렇고 의지와 감정을 지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제 막 도시국가 하나를 건설한 이들은 문명이 태동하던 시기의 인류가 그랬듯 자신들의 세계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다. 무엇보다 그들은 알고 싶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답을 찾기 위해 두 로봇이 용감하게 성벽을 나선다. 이름은 윌리엄과 메리웨더다. 각각 내향적인 과학자와 외향적 탐험가인 이들은 서부 개척시대 동명의 두 미국인이 그랬듯 호기심과 두려움을 안고 낯선 땅 위에 첫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곧 거대하고 아름다운 풍경들을 마주하게 된다. 인간이 사라져버린 세계는 문명 이전의 상태로 완전히 회복되었다. 숲과 강, 초원과 산맥, 늪지와 밀림으로 빽빽하게 차오른 원시적 자연 속에서 둘은 사소한 실수와 엉뚱한 오해를 반복한다. 심지어 사이마저 별로 좋지 않아서 툭하면 서로 상대의 실수를 조롱하거나 약점을 비아냥댄다. 그러니 때마다 동지애를 발휘할 위기의 순간이 찾아온 것은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파편처럼 흩어진 지난 문명의 잔해 찾기

이 모험의 가장 큰 성과는 여기저기 파편처럼 흩어진 지난 문명의 잔해들을 발견한 것이다. 이 세계의 신(타탸나 루바쇼바)은 로봇들을 위해 곳곳에 힌트를 잔뜩 숨겨놓았다. 그러나 힌트는 힌트일 뿐. 로봇들은 확장자명 PDF와 DOC를 위대한 두 학자의 이름으로 오인하고, 유적 속에서 발견한 마네킹들을 애타게 찾던 종족의 기원이라 믿는다.

그렇다고 이들이 내내 이런 헛발질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저도 모르는 엉뚱한 뒷걸음질로 진실의 꼬리를 밟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밀림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을 보고 하필 철물점 이름을 따서 ‘아마존’이라고 명명하거나, 높은 산속에서 만난 털북숭이 인간을 보고 ‘설명하기 어려운 인간’을 줄여서 ‘설인’이라고 부르거나, 날개 달린 동상을 보고 하늘을 나는 두 로봇 ‘이카’와 ‘로스’를 떠올리는 것. 심지어 깊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윌리엄은 어떤 이야기 하나를 상상하는데, 귀가 긴 수상한 생명체를 목격한 뒤 구덩이에 빠져 끝없이 오랫동안 떨어진 후 새로운 규칙의 세상에서 어떤 병을 마시면 줄어들고, 또 어떤 병을 마시면 거대해지고….

아, 이런. 결국 반복되는 것인가. 종족은 바뀌었어도 역사는 되풀이되는가. 아니, 아닐 것이다. 이야기 속의 인류는 무사히 더 나은 행성으로 이주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망가지지 않은 건강한 별에서 공생의 지혜를 터득해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것은 그저 유쾌한 모험담일 뿐이다. 탐험에서 돌아오는 두 로봇의 발밑에 묘지처럼 가라앉은 거대한 유적들을 보며 서늘해지는 것은 그저 기분 탓이다. 내가 이야기에 너무 몰입한 탓이다. 그뿐이다. 

기자명 무루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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