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게가 12t에 달하는 거대한 카누가 물살을 헤치고 나아간다. ‘응아토키마타파오루아’라는 이름만큼이나 기다란 이 카누를 움직이는 것은 55명의 건장한 마오리족 전사들이다. 179년 전의 그날과 다름없이, 이들의 표정은 긴장과 경계심으로 가득하다. 리더의 외침 소리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노를 젓는 이들의 머리 위로, 전투기 편대가 오색 연막을 뿜으며 날아간다. 해마다 2월6일이면 펼쳐지는 뉴질랜드의 건국기념일 ‘와이탕이 데이’ 풍경이다.
우리의 광복절은 일본이 연합군에 패해 한반도에서 물러가게 된 날을 기념하고, 미국 독립기념일은 영국에 맞서 독립선언서를 문서로 공포한 날을 기린다. 이렇듯 세계의 건국절 혹은 독립기념일은 전쟁과 연관된 경우가 많다. 뉴질랜드는 좀 다르다. 이들이 기념하는 1840년 2월6일은 바로 영국에서 온 백인들과 원주민인 마오리족 사이에 ‘와이탕이 조약(Treaty of Waitangi)’이 체결된 날이다. 두 민족 사이의 약속으로, 뉴질랜드라는 나라가 탄생한 것이다.
영국, 500명이 넘는 마오리 족장들에게 서명 받아
1769년 영국 해군의 제임스 쿡 제독이 이 지역을 다녀간 이래, 뉴질랜드는 당시 최고의 해양자원이던 고래를 쫓는 사냥꾼들의 거점으로 차츰 이름이 알려졌다. 고래잡이들의 뒤를 이어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려는 사람들과 일확천금의 꿈을 안은 금광업자들이 몰려왔다.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의 갈등이 발생했고, 프랑스가 이 지역을 탐내고 있다는 첩보까지 날아들자 영국 정부의 마음은 바빠진다. 1840년, 윌리엄 홉슨 선장이 본국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고 남태평양으로 급파된다. 그는 7년 전부터 영국인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뉴질랜드 북섬의 와이탕이에 머무르던 제임스 버스비의 집에 회담장을 마련하고, 마오리 족장들을 불러 모았다. 회담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조약에 쓰이는 용어를 서로의 언어로 해석하는 데만 며칠이 걸렸다(나중에 해석의 차이로 분쟁이 일기도 한다). 마침내 3개 조문으로 된 문서를 최종안으로 채택하고 마오리 족장 45명이 서명했다. 그 후 영국 정부는 이 조약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한다. 8개월간 남섬과 북섬을 돌며 500명이 넘는 마오리 족장들에게 서명을 받은 것이다.
더 강한 군사력을 지닌 민족의 일방적인 침탈과 학살은 식민지 개척의 역사에서 수없이 반복되어왔다. 와이탕이 조약은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 문서로 된 약속에 따라 두 개의 민족이 결합한 역사의 쾌거였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단순한 조문과 영문본, 마오리어본의 뉘앙스 차이는 해석의 차이를 크게 만든 갈등의 씨앗이었다. 일례로, ‘통치권’을 뜻하는 영어 ‘Sovereignty’는 마오리어에 같은 단어가 없어서 ‘카와나탕아(지도자의 권력)’로 대체되었다. 또한 마오리어의 ‘타옹아’는 문화적 유산까지를 포함하는 소유물의 개념인데, 이것은 영어에서 단순한 ‘Treasure(보물)’로 번역되었다. 이와 같은 차이가 마오리와 백인들의 권력을 어떻게 나눌지, 마오리의 토지와 자원 소유권을 어디까지 인정할지에 대한 무수한 분쟁을 낳고 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4G 무선통신 주파수의 소유권이 뉴질랜드 정부에 있는지, 마오리 부족에게 있는지를 놓고 분쟁이 있었을 정도다. 이런 갈등을 해소하고자 1975년 ‘와이탕이 재판소’가 설치되었고, 조약의 자구 해석을 놓고 벌어지는 분쟁은 모두 이 재판소를 통해 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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