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ed Denmark폴케호이스콜레를 제안한 덴마크의 교육가 니콜라이 프레데비크 세베린 그룬트비.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서 주인공 햄릿의 독백이지. 알다시피 그는 덴마크의 왕자로 극에 등장하잖아. 덴마크 왕자라면 영국 역사에서 특별한 존재야. 오늘날 덴마크에 살던 바이킹의 원조 ‘데인 사람들(Danes)’은 잉글랜드를 무던히도 괴롭혔고, 급기야 덴마크 왕 크누트는 스칸디나비아반도 일부와 잉글랜드, 덴마크를 통일한 북해 제국(North Sea Empire)을 세워 잉글랜드 왕으로 군림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만만찮았던 왕국 덴마크는 근세에 접어들면서 쇠퇴의 길을 걸어. 나폴레옹이 유럽을 휩쓸던 무렵, 나폴레옹 편을 들었다가 영국 해군에게 수도 코펜하겐이 불바다가 되는 비극을 겪었고 그때껏 지배하던 노르웨이까지 잃게 되지. 나폴레옹 대군의 일원으로 러시아 원정에 끌려갔던 덴마크 청년 가운데 한 구두 수선공이 있었단다. 청년은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오랫동안 트라우마와 신경쇠약에 시달렸고 어느 서리 내리던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 이 구두 수선공의 아들은 훗날 작가로 성장해서 아버지가 겪었던 끔찍한 겨울의 공포를 소재로 동화를 쓰게 되는데 이 작품의 제목은 〈눈의 여왕〉이야. 작가가 누군지 짐작하겠지? 동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안데르센이 쓴 동화 전반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라고 하기엔 좀 암울한 색깔이 짙게 깔려 있지. 그도 그럴 것이 안데르센(1805~1875)의 생애 대부분은 덴마크 역사상 최악의 시기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야. 〈성냥팔이 소녀〉의 모델은 다름 아닌 안데르센의 어머니였어. 돈 몇 푼 벌기 위해 성냥이며 양초를 팔고 다니던 소년 소녀들이 길거리에 넘쳐났던 나라, 좌절에 빠진 젊은이들이 술독에 빠져 하루하루를 쓰레기통에 버렸던 절망의 땅이 19세기의 덴마크였어.

그랬던 덴마크는 오늘날 유엔 산하 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가 산정한 국가별 행복지수(World Happiness Report)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나라가 되었어. 그럼 세계 7대 무역대국이자 1인당 국민소득 29위(2019년 기준)인 한국의 행복지수 순위는 어떨까? 무려 61위. 이 수치가 절대적일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우리와 덴마크 사이의 ‘행복지수’ 차이는 꽤 크다고 표현할 수 있을 거야. 한국인들은 “먹고살 만한가?”라는 질문에는 다들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당신들은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예스!” 하고 외칠 사람은 그보다 훨씬 적을 테니까. 그런데 덴마크에 넘치는 이 ‘행복’의 씨앗은 바로 덴마크 역사상 최악의 절망기인 19세기에 뿌려졌단다. 오늘은 19세기 덴마크라는 막막한 광야에 가난한, 하지만 희망의 씨를 뿌렸던 선각자들 가운데 니콜라이 프레데비크 세베린 그룬트비(1783~ 1872)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구나.

그룬트비를 설명하는 단어는 무척 길어. 그는 덴마크의 목사이자 시인이요, 교육가이자 정치인이며, 역사가이자 민족운동가이고, 나락에 빠진 덴마크를 새롭게 만드는 데 견인차 구실을 한 철학자이자 개혁가였다. 그는 교회를 비롯한 기득권 세력에 대항해 사회 전반의 개혁을 소리 높여 외치는 한편 덴마크의 전설과 민담을 발굴해 덴마크인들에게 흐르던 민족 정서와 전통적 가치를 회복시켜 자신감을 심어주고자 노력했지.

ⓒ뢰딩 호이스콜레 제공최초의 폴케호이스콜레인 ‘뢰딩 호이스콜레’ 전경.

“모든 문자는 죽어 있다”

그리고 그룬트비는 일명 ‘죽은 문자’에 의지한 교육에 반기를 들었어. “모든 문자는 죽어 있다. 모든 책의 지식도 죽어 있다. 그것은 독자의 삶과 결코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수학이나 문법만큼 마음을 파괴하고 죽이는 것은 없다.” 그룬트비가 말한 ‘참된 덴마크인’은 똑똑하고 우수한 덴마크인이 아니었어. “가난하지만 신으로부터 받은 녹색의 대지를 보살피고 꽃을 피우며 열매 맺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들의 친구, 인간의 자유와 독립, 고귀한 자부심, 명예, 존엄을 파괴하는 언론의 폭력과 학자의 오만과 싸우는 자”였다(연세대학원 신문 제206호, 김경인).

그는 우매하고 저열하다고 무시되던 민중의 힘을 믿었고, 그 힘이 최대한 발휘되기 위해서는 사회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고 여겼어. 그러려면 대중이 자유롭게 사회적 발언을 하도록 돕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보았단다. 그룬트비의 이런 신념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 ‘폴케호이스콜레(Folkehøjskole)’였어. 우리말로 옮기면 ‘평민대학’ ‘자유학교’ 등 다양하게 번역되는 개념이야. 자신의 법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당당한 시민을 키우기 위한 민주적 대학이 필요하며, 덴마크 국민이라면 누구나 이곳에서 교육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창했던 그룬트비의 뜻에 따라 덴마크 곳곳에 세워지게 된다.

폴케호이스콜레는 교사와 학생이 24시간 함께 생활하며 서로 보고 배우는 기숙학교였단다. 전문지식 중심의 교육을 거부하고 모든 이에게 개방된 교육을 추구했지. 성별·연령·계급·종교에 관계없이 누구든 입학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시험과 성적 평가 없이 자유롭고 열린 관계와 신뢰에 기초해 ‘생활의 계몽’을 추구하는 교육을 지향했어(신명직, ‘협동 공동체와 폴케호이스콜레’, 2012). 즉 지식 습득이나 신분 상승을 지상 과제로 삼는 교육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야. “배워야 산다”는 정신은 우리나 저들이나 마찬가지였겠지만 “배워서 남 주나”가 아니라 “남과 함께 배울 것”을 가르치는 학교였다고나 할까.

1851년 처음 설립된 폴케호이스콜레는 1867년에는 수십 개로 늘어났어. 덴마크 사람들은 폴케호이스콜레에서 함께 먹고 마시고 토론하며, 경쟁보다는 협동을, 개인의 이익에 앞서 공공의 행복을 생각하는 기회를 가지게 됐지. 해외의 값싼 농산물이 쏟아져 들어오자 가난한 덴마크 농민들은 어떻게 대응할까 머리를 맞댔고 ‘협동조합’이라는 아이디어를 창안해냈어. “소규모 경영으로는 국제 농산물 시장에서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한 농민들이 각자의 독립성은 철저히 유지하면서 서로 연합하여 협동조합을 만들어 공동생산·공동구매 활동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생활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터득한 것(〈녹색평론〉 제119호, 김종철)”이지. 돼지 사육 농민들이 시작한 축산협동조합 운동은 각 분야로 확산돼나갔어. 덴마크가 자랑하는 풍력발전도 폴케호이스콜레에서 아이디어가 나왔고, 폴케호이스콜레에서 함께 지내며 누리던 레그 고트(leg godt, 즐겁게 논다) 문화로부터 유명한 완구 ‘레고’가 탄생했다는 사실을 짚어본다면 그룬트비가 외치던 ‘교육’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지 않겠니.

덴마크가 최악의 상황에서 함께 사는 지혜를 가꿔나간 반면 만만찮게 최악이었던 19세기 개화기의 우리 선각자들은 ‘강자가 약자를 도태시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는 약육강식론의 포로였다는 지적이 있어(박노자, 〈우승열패의 신화〉). 약자와 패자를 대할 때 연민보다 멸시가 앞서고, 승자와 강자가 되고 싶은 욕망 앞에서는 부끄러움과 염치가 없었던 우리의 과거와 오늘이 오늘날 한국과 덴마크의 ‘행복의 차이’를 낳았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결론인지 모르지만 전혀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 같구나.

몇 년 전 코펜하겐 행복연구소장 마이크 비킹은 한국 사회에 대해 이런 진단을 한 적이 있다. “한국인은 자신이 필요한 것보다 남들이 얼마나 가졌는지 비교하며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룬트비 역시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면 정색하고 자신의 명언을 들려주지 않을까. “너무 많이 가진 사람이 적고, 충분히 가지지 못한 사람이 더 적을 때 사회는 더 풍요로워집니다.” 한국 사회는 종종 너무 많이 가진 사람은 더 가지려 하고, 충분히 갖지 못한 사람은 가질 가능성조차 소진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지.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