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P PHOTO미국 모더나가 개발 중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백신은 미국이 독점할 가능성이 크다.

모더나는 미국 동부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시에 있는 종업원 700명 규모의 바이오테크 업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백신 개발과 관련해 최근 사람을 대상으로 한 1차 임상시험에서 성공을 거뒀다고 발표한 직후 주가가 치솟아 대박을 쳤다. 이 회사는 5월 중 600명을 대상으로 2차 임상시험을 거친 뒤 오는 7월에는 수천 명 규모로 3차 임상시험까지 감행할 예정이다. 성공하면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을 수 있는데, 올 연말 혹은 늦어도 내년 1월까지 코로나19 백신을 대량생산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오는 9월 임상시험을 계획 중인 대형 제약업체 존슨앤드존슨도 백신 개발에 성공하면 연간 최대 3억 개의 백신을 생산할 계획이다. 문제는 이들 회사가 제공할 백신은 세계적 보급용이 아닌 ‘미국 전용’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다.

5월 하순에 접어들면서 전 세계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500만명, 사망자가 32만명을 넘어선 가운데 백신 개발에 청신호가 켜지면서 어느 나라가 가장 먼저 백신을 공급받을 것인가에 세계의 이목이 잔뜩 쏠려 있다. 현재 미국·영국·독일·중국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개발 중인 백신 후보는 100개도 넘는다. 하지만 미국 등 백신 개발의 주도적 위치에 있는 나라들이 백신 확보를 놓고 국가 이기주의에 빠져 코로나19 퇴치에 먹구름이 낄 조짐이다. 특히 백신을 어느 나라에 얼마나, 어떤 순서로 공급할지에 대한 세계적 기준을 마련해야 할 세계보건기구(WHO)마저 미국과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다.

이런 우려를 보여준 첫 사례가 프랑스의 거대 제약업체 사노피의 행태에서 나타났다. 이 회사의 폴 허드슨 최고경영자는 5월13일 블룸버그 통신에 “미국이 백신 연구 개발에 가장 먼저 자금을 지원했다. 백신이 개발되면 미국에 우선 공급할 것이다”라고 밝혀 프랑스가 발끈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에두아르 필리프 총리가 격노하며 불가 의견을 밝혔고, 유럽연합도 “백신이 국제 공공이익에 맞게 공평하게 배분돼야 한다”라며 사노피를 비난했다. 화들짝 놀란 허드슨 회장은 “백신이 개발되면 모든 나라에 공평하게 공급하겠다”라면서 한발 물러섰지만 문제가 완전히 해소된 것 같지는 않다. 이 회사에 3000만 달러를 지원한 미국이 선(先)주문권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미국은 프랑스 업체 사노피뿐 아니라 독일 제약업체 큐어백에도 손을 뻗쳤다. 트럼프 행정부는 백신 개발에 나선 큐어백에 백신 연구부문을 미국으로 옮긴 뒤 ‘미국인 전용’ 백신을 생산하는 대가로 거액을 제시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이 같은 보도가 나오자 독일 정부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미국이 주요 맹방인 프랑스·독일 등과 백신 확보 주도권을 놓고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사노피, 큐어백 같은 해외의 백신 업체 외에도 보건복지부 산하 생물의약품첨단연구개발국(BARDA)을 통해 자국 회사들의 백신 공급 우선권도 확보했다. BARDA는 백신 개발의 선두에 선 모더나에 4억8300만 달러, 존슨앤드존슨에 4억5000만 달러를 지원해 백신 입도선매를 마쳤다. 세계적 공공재가 돼야 할 백신이 한동안 미국에서만 공급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워싱턴포스트〉는 “긴급 백신 개발을 도맡은 연방정부기관이 백신 공급에서도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 정신을 답습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EPA트럼프 미국 대통령(가운데)은 마스크와 진단키트처럼 백신 확보에도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다.

조정해야 할 WHO는 제 코가 석 자

미국만 그런 것은 아니다. 맷 핸콕 영국 보건장관은 지난 4월 자국 회사의 백신 개발에 4250만 파운드 지원 계획을 밝히며 “개발된 백신은 영국인부터 공급하겠다”라고 천명했다. 실제 영국 제약회사 아스트라제네카는 옥스퍼드 대학과 손잡고 올해 말까지 백신 1억 개를 생산할 계획이다.

미국보다 먼저 백신 개발을 꿈꾸는 중국의 국가 이기주의도 만만치 않다. WHO에 따르면, 현재 임상시험 중인 백신 후보 8개 중 4개가 중국에서 개발 중이다. 코로나19 진원지인 중국은 자국의 자존심은 물론이고 타국에 대한 우월성을 과시하는 차원에서 백신 개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중국도 세계적 차원의 백신 대응 노력에는 미온적이다. 최근 유럽연합 등 전 세계 40여 국가가 ‘코로나19 글로벌 대응 국제공약 화상회의’를 열어 75억 유로(약 10조원)를 모금하기로 했다. 이 자금으로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해 싼 가격으로 전 세계에 공급할 계획이다. 중국은 다른 나라처럼 정부 수반이 아니어서 유럽연합 주재 대사를 이 회의에 참석시켰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최근 미국과 중국의 이런 행보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백신 개발과 공급을 둘러싼 양국의 지독한 경쟁과 국가 이기주의, 다원주의 쇠퇴로 코로나19 확산 저지 전선에 균열이 발생했다.” 특히 이 신문은 익명의 보건 전문가를 인용하면서 “미국의 지도력 공백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다. 미국이 이 정도로 발을 뺄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 공백을 어느 나라가 메울지 큰 문제다”라고 지적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지금처럼 국가 이기주의가 판치면 2009년 1월부터 2010년 8월까지 전 세계를 강타한 신종인플루엔자(H1N1) 당시의 상황이 재현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당시 팬데믹 때에는 전 세계적으로 57만5000명에 달하는 확진자와 1만8000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다행히도 2009년 11월 백신이 개발돼 바이러스 퇴치의 길이 열렸다. 당시 오스트레일리아는 자국 회사가 미국에 백신을 수출하지 못하도록 규제했다. 미국은 가난한 나라들에 백신을 기부하겠다는 약속을 미룬 채 자국민만 챙겼다.

이번 코로나19는 확진자와 사망자 수에서 신종인플루엔자를 능가한 지 오래고, 지금도 확산이 진행 중이다. 완전한 퇴치를 위해선 백신 공급과 관련된 범세계적 협력이 절실하다. 미국 듀크 대학 부설 세계보건정책영향센터의 개빈 야메이 소장은 〈워싱턴포스트〉에 “2009년 신종인플루엔자 팬데믹 당시엔 부유한 국가들이 백신을 독점했다. 백신을 세계적으로 고루 배분하지 않는 한 바이러스 확산을 끝낼 수 없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비영리단체인 세계보건평의회의 로이스 페이스 소장은 〈파이낸셜타임스〉와 인터뷰하면서 “백신이 개발되면 부유한 나라와 부유한 사람, 부유한 지역에 더 쉽게 공급될 것이라는 우려가 엄존한다”라고 말했다. 지금처럼 백신을 어느 나라에 어떤 순서로 공급할지에 관련된 국제적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라면, 부유층과 부국을 중심으로 하는 ‘백신 이기주의’가 횡행할 것이라는 우려다.

전문가들은 각국의 백신 이기주의가 본격화하기 전에 WHO를 구심점으로 교통정리를 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WHO는 코로나19 문제로 미국과 갈등을 빚으면서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은 WHO의 친중국 성향을 문제 삼으며 ‘한 달 내 구체적 개선 방향을 내놓지 않으면 연간 4억 달러의 WHO 지원금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WHO는 백신 공급에 관한 리더십을 발휘하기는커녕 당장 자기 조직의 보전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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