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성착취물을 제작·배포한 혐의로 기소된 ‘로리대장태범’의 재판이 열린 법원 앞에서 시민단체 회원들이 엄중한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이 범죄는 대한민국에서 반드시 재발할 것입니다. 그 방에 가입한 자가 처벌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공급자 처벌도 제대로 않겠지요. 그러니 처벌하지 않을 거라면 신상이라도 알려주십시오. 나라가 아이들을 성범죄자들로부터 지켜주지 않을 거라면, 알아서 피할 수라도 있게.”

지난 3월 게시된, ‘n번방 용의자 신상공개 및 포토라인 세워주세요’라는 제목의 청와대 국민청원이다. 20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으며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이 국민청원에는 뜨거운 분노와 엄벌 요구만 담긴 게 아니다. 사법제도에 대한 차가운 불신도 적나라하게 표출되어 있다. 국민들은 참혹한 가해와 피해의 현실이 계속되는 이유가 가해자들을 정당하게 처벌하지 못해왔기 때문이라고 본다. 수사기관이 “끝까지 추적하여 반드시 검거하고 엄정 처벌하겠다”라고 선언한들, 국회가 서둘러 가중처벌하는 법을 통과시킨들, 법원의 관대한 양형이 여전하다면 범죄자는 두려움을 모른다. 검거돼봐야 가볍게 처벌받을 테니 또 범죄로 나아간다. 피해자의 두려움만 더욱 커진다. n번방 사건으로 나라가 뒤집힐 지경인데도 유사 n번방들이 여전히 범죄 영업을 계속하는 이유다.

사실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엄벌 대책이 아니다. ‘정당한’ 형벌이 선고되기를 바란다. 죄질에 미치지 못하는 부당한 형벌은 범죄자에게 ‘계속해도 별일 없다’는 신호를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피해자에게는 ‘당신은 지켜줄 가치도 없다’라는 모욕과 마찬가지다. 이만한 2차 가해가 따로 없다.

마침 범정부 차원의 디지털성범죄 종합대책이 나왔다. 국회도 신속하게 n번방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제 양형기준에 사회적 관심이 모인다. 구체적으로 어떤 형벌을 선택하고 얼마나 내릴지는 판사에게 달려 있다. 국민은 형벌이 정당하게 결정되었는지 판단할 때 법조문이 아니라 선고형을 본다. 양형기준은 법정형의 넓은 폭(이를테면 최소 5년~최대 20년)을 합리적 범위로 좁히고, 형량을 높일지 줄일지 결정하는 판단 요소(양형인자)를 정해서 판사가 공정하게 형을 정하도록 돕는다.

ⓒ연합뉴스성착취 텔레그램 대화방을 만든 ‘갓갓’이 5월12일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잔혹성 숨기는 언어에 저항해야”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1년 전부터 준비해온 이른바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안’ 논의가 막바지에 이르렀다(편집자 주 - 5월18일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안’ 의결을 12월로 연기했다). 지난 4월20일 전체회의 결과에 따르면, 오는 6월 공청회를 거쳐 8월 확정할 예정이다. 디지털성범죄의 엄중한 현실을 고려해서, 기존 판결례는 물론 법정형이 같거나 비슷한 다른 범죄 형량 범위보다 높게 권고하는 데는 합의했다. 그러나 이 논의는 디지털성범죄의 특징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디지털성범죄 유형을 대표하는 범죄를 현행 아동청소년성보호법상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죄’로 하고, 성폭력범죄처벌특례법상 ‘카메라이용불법촬영죄’와 ‘통신매체이용음란죄’를 양형기준 대상 범죄유형으로 정하는 데 그친 것이다. 구체적인 형량 범위와 가중·감경 양형인자, 집행유예 기준 등은 아직 검토 중이다. 

국민이 분노하는 디지털성범죄는 단순한 ‘음란물’ 유통이 아니다. 강간과 추행, 아동 대상 성폭력, 성적 학대와 강요, 성폭력범죄 현장을 촬영한 영상을 사고파는 온갖 성폭력과 성착취 실태를 가리킨다. 더구나 디지털성폭력은 성폭력물 제작·유통자와 소비자가 서로 공모하고 조장하는 형태로 자행된다. 그들은 피해자에게 디지털 환경을 악용해 접근하며, 범죄수익을 암호화폐를 통해 거래한다.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새로운 법규가 처벌하고자 하는 범죄는 결코 아동 이용 ‘음란물’ 정도가 아니다. 마땅한 처벌 정도를 생각하면 단순히 ‘성범죄’ 중 하나인 것도 아니다. 미국의 여성주의 작가 리베카 솔닛의 말을 들어보자. “폭력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것도 거짓말이다. 일단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면 비로소 우선순위에 대해 진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잔혹함에 대한 저항은 그 잔혹성을 숨기는 언어에 저항하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이다.”(〈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창비, 2018)

디지털성범죄의 가해와 피해 특징을 제대로 반영하고 정당하게 이름 붙인 양형기준이 필요하다. 현재 양형위원회 검토안에는 아동복지법상 아동에게 음란한 행위를 시키는 범죄유형, 최근 신설된 허위 영상물 반포죄, 불법 성적 촬영물 소지·구입·저장·시청죄, 성적 촬영물 이용 협박강요죄 유형 등이 빠져 있다. 더 큰 문제는 권고형량 범위와 양형인자다. 양형기준 형량 범위는 종래 해당 범죄에 선고되었던 최저·최고 형량 사이의 70~80% 정도를 잡아 정한다.

양형위원회의 아동이용음란물죄 양형 조사자료(2017~2018년)에 따르면 아동 이용 음란물 제작·판매·배포죄에 대한 선고 형량 평균은 14.2개월에 불과하다. 소지죄 실형 선고 사례는 아예 없다. 여성변호사회가 조사한 불법촬영죄 판결(2011~ 2016년)을 봐도 70%가 벌금형이다. 죄질이 나쁜 유포 범죄도 벌금형이 다수이고, 실형은 대부분 1~2년 선고에 그쳤다. 국회가 거듭 법정형을 가중해도 법원이 종래 선고 형량을 기준 삼아 권고형량 범위를 정해버리면 양형기준을 새로 만들어도 실제 처벌에서는 별다른 변화가 없게 된다.

또한 디지털성범죄 피해는 유포에 대한 피해자의 두려움이 매우 크고, 2차 피해가 더욱 심각할 수 있으며, 불법 촬영물의 완전 삭제 없이는 피해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특성이 고려되어야 한다. 현행 양형기준상 감경 요소인 초범, 반성, 피해자와의 합의 등을 다른 범죄와 동등하게 디지털성범죄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 하물며 법원 내부 젠더법연구회에서도 기준 초안 권고형량 범위가 지나치게 낮고 감경 인자 내용도 피해자 특성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제까지 제정 방식을 답습한다면 양형기준을 새로 내놓는다 해도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법원조직법에 따르면 양형기준의 목적은 국민의 건전한 상식을 반영하고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양형을 실현하기 위함이다. 국민의 상식이 말한다. 자체 일정에 맞춰 부실한 양형기준을 제시하기보다는 관련 양형 실태를 분석하고 국민 의견을 수렴해서, 법정형 상향을 비롯한 변화 상황까지 고려한 충실하고도 새로운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 마련이 바람직하다. 한 사회가 이런 일을 겪고도 양형기준 제정 방식과 절차의 리뉴얼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법을 신뢰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자명 김한균 (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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