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pedia푸아브르가 만든 모리셔스의 팜플레무스 식물원. 커다란 연꽃이 있는 식물원이다.

20대를 온통 투자했던 모험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열대의 정글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남은 것이라곤 성치 않은 몸과 아픈 기억들뿐이었다. 다행히 중년 운은 그리 나쁘지 않아, 고향에서 양갓집 규수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집도 마련했다. 예상치 않은 계기로 사회적 명성과 안정적인 수입도 얻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다시금 고향을 떠나 지구 반대편으로 향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글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고국으로 향했던 피에르 푸아브르는 달랐다.

1756년 프랑스로 돌아온 그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그간 있었던 일을 책으로 펴내는 작업이었다. 〈철학자의 항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이 책은 당시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정책 결정권자들 사이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왕실의 감사원장과 외무대신이 그의 후원자가 되었고, 이들은 푸아브르가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의 회원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8세였던 아내 설득해 모리셔스 제도로

하지만 이들은 푸아브르가 고향에서 한가롭게 전원생활을 즐기도록 놔둘 마음이 없었다. 프랑스 동인도회사가 파산하며, 왕실 직할로 넘어오게 된 모리셔스 제도와 레위니옹 제도에 새로운 총독을 파견해야 했고, 그 일에 푸아브르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총독 직위를 제안받은 푸아브르가 아무런 갈등 없이 그 일을 수락했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더욱이 그에게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신보다 서른 살이나 어린 아내가 있었다.

푸아브르는 아내를 설득해 모리셔스 제도에 함께 가기로 한다. 당시 18세로 모험심이 넘치던 그의 아내는 기꺼이 남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1767년 모리셔스 총독으로 부임한 푸아브르는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프랑스의 향신료 무역에 일대 혁신을 일으킨다. 중형 군함 두 척을 고가의 향신료가 자라는 말루쿠 (몰루카) 제도에 파견해, 부하들로 하여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감시망을 뚫고 육두구와 정향을 구해 오도록 한 것이다. 부하들은 우연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불만을 가진 사람을 통해 육두구가 몰래 재배되고 있는 섬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 섬의 원주민들에게 육두구 씨앗과 정향의 묘목을 두둑히 얻어 이를 모리셔스로 운송하는 데 성공했다.

씨앗과 묘목을 프랑스령 식민지에 널리 퍼뜨리고 원산지를 벗어나 향신료가 재배되도록 한 것은 푸아브르의 철두철미함이 낳은 결실이었다. 그는 향신료 묘목을 셋으로 나누어 레위니옹, 세이셸, 모리셔스에 옮겨 심고 심지어는 남미의 프랑스령 기아나에까지 재배 단지를 조성했다. 또한 총독 관저에 식물원을 꾸미고, 이곳을 열대식물을 재배하고 연구하는 시설로 발전시켰다. 1776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정향이 인도네시아 다도해의 섬이 아닌 곳에서 결실을 맺었다. 그로부터 2년 뒤에는 육두구가 수확되었다. 총독 관저에서는 그때마다 이들 향신료가 듬뿍 들어간 요리로 파티를 열어, 프랑스산(産) 향신료의 시장 진출을 자축했다. 네덜란드의 향신료 독점 시대가 마감되는 순간이었다.

푸아브르는 아내와 모리셔스에서 태어난 두 딸과 함께 프랑스로 돌아가 행복한 여생을 보냈고, 1786년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모리셔스에는 그가 남긴 팜플레무스 식물원이 여행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신혼여행을 온 커플에겐 필수 코스나 다름없다고 한다. 이들이 이 식물원을 꾸민 사람의 치열했던 삶에 대해 알게 된다면, 정향나무 그늘 아래 펼쳐진 열대의 화원이 마냥 평화롭게 보이지만은 않을 것 같다.

기자명 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