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4월2일 전국교육대학생연합이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 엄중 처벌 및 교육계의 성인지 감수성 제고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3월31일, 해외 클라우드 서비스 업체 한 곳이 한국 경찰의 ‘텔레그램 디지털 성착취 사건 수사에 협조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뉴질랜드에 있는 ‘메가(mega.nz)’라는 클라우드 서비스 업체로, 무료 제공 용량이 많기로 소문난 곳이다. 메가가 수사에 협조한다는 것은 디지털 성착취에 일조한 이들이 더 이상 안심할 수 없다는 의미다. 메가에 파일을 업로드하고 다운로드 링크를 보내는 방식으로 성착취 영상 다수가 유통되었다. 이용자들에게 메가는 텔레그램처럼 보안이 철저하고, 해외에 서버를 두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한국 수사 당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인식이 강했다.

‘n번방 사건’ 가해자로 추정되는 이들이 ‘도움받을 곳’을 찾아 나섰다. 지난해 10월, 한 포털사이트에 개설된 관련 혐의 피의자 모임 카페에는 4월1일부터 이틀간 130여 명이 신규 가입 신청을 했다. 철저히 비공개로 운영되는 이 카페는 2~3중 절차를 거쳐 ‘등업’을 완료해야만 카페 게시물을 읽고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가입 인사 게시판에 등업 신청서를 작성해두고 기다리는 동안, 불안을 이기지 못한 몇몇 이들은 이 카페에 마련된 채팅창으로 향했다. 4월2일 카페 채팅창에 모인 150여 명 가운데 일부는 “메가 때문에 아무것도 손에 안 잡힌다” “경찰이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는 것 같다” “이러나저러나 조심해야 할 타이밍이다” 같은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가입 신청자 전원이 텔레그램 성착취와 관계된 인물은 아니더라도, 제 발 저린 사람 다수가 이곳을 찾았다는 걸 알 수 있는 장면이다.

가해자는 모여서 정보를 나눌 수 있지만, 피해자는 그럴 수 없다. 모여서 함께 대책을 마련하기는커녕, 신분 노출이 두려워서 피해 사실을 먼저 신고하기도 어려운 게 디지털 성착취 범죄의 특성이다. 경찰이 4월2일까지 파악한 텔레그램 디지털 성착취 피해자는 103명이다. 이 중 10대 피해자가 26명으로 전 연령대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피해자를 어떻게 지원할 것인지, 이들이 당한 피해를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지가 당면 과제로 떠올랐다.

일단 정부 차원의 지원 논의가 구체화되고 있다. 4월1일 이정옥 여성가족부 장관은 기자회견을 열어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특별지원단(이하 지원단)’을 3월24일부터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여성가족부 산하 단체부터 민간 여성단체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성착취 피해자 구제를 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해 지원하는 방식이다. 지원 체계는 크게 네 분야로 나뉜다. 온라인에 남아 있는 피해 영상 등을 신속하게 삭제되도록 지원하는 영역, 심리치료 등을 지원하는 영역, 상담과 수사 분야, 그리고 법률 지원이다.

피해자들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하는 분야가 바로 ‘삭제 지원’이다. 온라인에 떠도는 피해 여성의 영상과 관련 정보를 삭제하는 지원은 여타 디지털 성범죄에서도 가장 우선되는 대책 중 하나다.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19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 보고서〉에 따르면, ‘삭제 지원’이 차지하는 비중이 2018년에는 85.1%, 2019년에는 94.1%를 차지했다. 상담 지원, 수사·법률 지원, 의료 지원 등 나머지에 비해 그 건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삭제 지원은 단순히 인터넷상에 업로드된 영상을 지우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디지털 성착취의 잔혹한 측면 중 하나는 피해자의 신상을 공개해 삶을 파괴한다는 점이다. 피해자와 관련된 정보를 언급한 흔적, 각종 신상 검색 기록, 검색엔진이 자체적으로 저장해둔 과거 인터넷 페이지 등도 삭제 지원 대상에 포함된다. 피해자가 단 한 명이더라도 여러 차례 지원이 필요한 만큼 ‘지속성’도 중요하다.

ⓒ연합뉴스4월1일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를 위한 특별지원단에 대해 밝히는 이정옥 여성가족부 장관(왼쪽).

“삭제 지원 인력 17명, 100명으로 늘려야”

정책 당국이 범사회적 지원 체계를 갖추겠다고 했지만, ‘삭제 지원’을 수행할 인력은 제한적이다. 특별지원단에서 실제 삭제 지원을 수행하는 곳은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하 진흥원)이다. 특별지원단 내 법률 지원 인원이 80명인데, 피해자들이 가장 원하는 삭제 지원 인력은 진흥원에 소속된 17명이 전부다. 이마저도 최근에야 안정적으로 확보된 인력이다. 진흥원은 지난해 12월, 개정 양성평등기본법이 시행되면서 재단법인에서 특수법인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일일이 사업진행비를 따내야 했다.

삭제 작업은 시쳇말로 ‘막노동’에 가깝다. 사람이 직접 일일이 피해 상황을 식별하고 개별 인터넷 플랫폼 사업자에게 삭제를 요청해야 한다. 지원 업무를 수행하는 인력의 정신적 스트레스도 강하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이런 작업에 대해 “인해전술이 필요한 일이다. 진흥원 전담 인원을 100명 이상으로 늘려야 한다”라고 말한다. 삭제 지원은 신속성이 중요한데, 24시간 교대 인력을 고려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보강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더욱이 텔레그램 같은 메신저 기반 디지털 성착취물 유통은 웹하드, P2P 중개 사이트, 웹페이지 단속에 비해 삭제 지원 작업이 훨씬 복잡하다.

하지만 피해자 지원 관련 예산은 예산심의 과정에서 손쉽게 삭감된다. 2018년 12월, 국회 예결위는 2019년 예산안을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디지털 성범죄 대응을 위해 책정한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 예산 26억4500만원을 삭감했다. 방통위 유관기관인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산하 디지털 성범죄 대응 조직을 확대하고 전담 인력을 보충하기 위한 예산이었다. 결국 지난해 방통위는 정식 예산이 아닌 방송통신발전기금에서 사업 예산을 일부 지원받아 디지털 성범죄 대응 인력을 늘렸다. 국회는 2020년에야 관련 예산 29억원이 포함된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제대로 된 적발과 수사도 중요하다. 디지털 성착취 영상을 통해 금전적인 이득을 취하는 고리를 끊어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 결제하든 결국 꼬리가 잡힌다는 걸 보여주어야 유사 범죄가 줄 수 있다. 텔레그램 토론방과 다크웹 커뮤니티 등지에서 관전자들이 흔히 논의하는 주제가 바로 ‘현실 속 금전 거래가 얼마나 위험한가’이다. 모네로 등 이른바 ‘다크코인’으로 불리는 암호화폐도 결국 거래소를 통해야 하기 때문에 법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선례를 이번 경찰 수사가 보여주고 있다.

핀코드(일종의 일련번호)로 유통되는 문화상품권 거래는 수사하기가 쉽지 않다. 현재 경찰이 추적 중인 ‘갓갓’은 문화상품권 거래를 통해 디지털 성착취의 시초 격인 n번방을 만들었다. 메신저 피싱, 마약 거래, 디지털 성착취 영상 거래 등에 활용되는 문화상품권 유통 구조를 개선하자는 목소리는 수년 전부터 나왔다. 하지만 아직 획기적인 대안은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당장은 경찰이 ‘문화상품권 거래도 잡는다’는 걸 보여주어야 비슷한 사례를 예방할 수 있다. 4월2일 현재 경찰은 갓갓의 신원을 특정해 쫓고 있다. 확실한 처벌이 이뤄진다면 단기적으로 효과를 낼 수 있다.

기자명 김동인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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