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지난 3월25일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가운데)이 검찰에 송치되고 있다.

경찰청은 지난해 여성 대상 범죄 대응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여성안전기획관을 신설했다. 경무관급에 해당하는 고위직이다. 지난해 12월24일 업무를 시작한 조주은 여성안전기획관은 여성가족부 장관 정책보좌관, 국회 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 등을 거치며 여성정책 관련 업무를 주로 해왔다. 저서로는 〈기획된 가족〉 〈페미니스트라는 낙인〉 〈현대가족 이야기〉 등이 있다. 그는 이번 ‘n번방 사건’ 수사를 위해 경찰청이 꾸린 ‘디지털 성범죄 특별수사본부’에서 활동하고 있다.

올해 대학에 입학한 딸이 최근 학교 앞 원룸으로 이사를 했다. 첫 독립은 딸에게 자유와 편안한 기분도 선물했지만 “집에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프고 심심할 때도 있다”라는 투정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런 딸이 전에 없는 장문의 카톡 메시지를 보내왔다.

“엄마 나 고민 털어놓을 게 있는데…. 그냥 엄마 시간 날 때 한번 읽어줬으면 좋겠어. 어제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터지고 내 여자 친구들한테 카톡,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할 것 없이 청원 요청을 하며 엄청 분노했어. 너무 먹먹해서 가슴 아프다고 우는 친구들도 있었고, 생일파티를 하는데도 내내 대화 내용이 그랬어. 근데 내 친구들의 공통된 걱정이 뭔지 알아? ‘우리 아빠도 거기 있으면 어떡하지?’ ‘내 남동생 혹은 오빠도 거기 있으면 어떡하지?’ 하는 거야. 가족 중에 남성이 있다면 모두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 근데 내 또래 친구들이 어제 입을 모아서 한 이야기가 또 뭔지 알아? ‘우리 아빠는 내가 그런 일 당해도 다 내 탓 할 것 같아.’ 이런 이야기 하는데 다 같이 ‘맞아, 사실 우리 아빠도…’ 하면서 공감하더라.”

코로나19가 국가적 재난으로 인식되고 있는 만큼이나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은 대다수 대한민국 국민들, 특히 여성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이 사회적 재난으로 인식되고 있다. 본인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다는 불안감과 유사하다. 대한민국에 사는 여성이라면 내가 등장하는 영상물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공포는 물론이고 내 주변 여자 친구, 후배, 동네 여동생 등이 성착취 대상이 되는,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된 현실에 대한 분노를 공유하고 있다.

내가 그동안 겪어온 공무원 조직은 변화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았다. 경찰청 역시 빠르게 변해가는 국민 눈높이에 부응하지 못해 여론의 뭇매를 맞을 때도 있었다. ‘성격 급한 나와 공무원 조직은 맞지 않는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24일 경찰청에 첫 출근을 한 나는 경찰청의 변화 속도에 놀라고 있다.

경찰청은 2018년 3월6일부터 18개 지방청에 디지털 성범죄에 대응하기 위한 사이버 성폭력 전담 수사팀을 구성해 운영 중이다. 2020년 3월 기준 지방청 사이버 경찰의 성폭력 수사팀 101명(현원) 중 여경은 24명(23.8%)이다. 최근 n번방 사건을 놓고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순식간에 몇백만 명의 서명이 이루어지고, 문재인 대통령 역시 3월23일 가해자 엄중 처벌 및 회원 전원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밝히면서 경찰청은 3월25일 ‘디지털 성범죄 특별수사본부(이하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했다. 사이버안전국장이 특별수사본부장이고 수사심의관이 수사단장, 여성안전기획관인 나는 피해자보호단장을 맡았다. 특별수사본부는 경찰청 내 관련 국·과에서 더 나아가 여성단체·관련 기관 간 유기적인 협력체계를 구축하여, 텔레그램 등 디지털 매체를 이용한 성범죄를 엄정 단속·수사하고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현재로서는 12월31일까지 9개월간 운영할 예정이다. 주 1회 합동회의를 개최하여 추진 실태를 점검하고 단속 지원 대책을 마련할 계획이다.

3월25일 현재 텔레그램 성착취물 유통과 관련해 총 126명이 검거되었다. 운영자 및 공범이 30명이고 제작·유통사범이 96명이다. 아동·청소년 성착취 수법의 악랄함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도저히 못 잡을 것만 같았던 ‘박사(조주빈)’도 결국 검거해 구속 및 신상 공개를 하기에 이르렀다. 경찰은 현재 또 다른 가해자인 ‘갓갓’ 검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피해자들이 발걸음 돌리는 일 없도록

최근 국회에서 열린 긴급 간담회에서 경찰력이 운영자 검거에 집중하는 사이 신고 접수나 피해자 보호에 빈틈이 있다는 뼈아픈 지적이 있었다. 불면의 와중에 잠시 잠들어도 생지옥이고, 눈을 떠도 불행이었던 텔레그램 n번방을 비롯한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이 있다. 그들이 엄청난 용기를 내서 일선 경찰관서를 방문해 피해 신고를 했을 때 “못 잡는다” “수사 못한다” “증거수집해 와라”며 신고 접수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2차 피해를 경험했다는 이야기를 가슴 아프게 들었다.

텔레그램은 물론 그 외 플랫폼으로 뻗어나가는 디지털 성범죄 방지를 위해 경찰에 요구하는 내용도 그 어느 때보다 구체적이다. 신고의 용이함, 사이버 성폭력 수사팀 증원, 내실 있는 피해자 보호에 대한 요구가 높아가고 있다. 기존 업무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법률 전문가들 역시 경찰에 피해자 법률조력을 자처하겠다는 제안을 하면서 피해자 보호에 더욱 힘써달라고 경찰청에 요청해오고 있다.

특별수사본부는 수사뿐만 아니라 피해자 보호도 선제적·능동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여성단체, 여성 변호사, 관계 기관과 적극적으로 협업할 예정이다. 용기를 내어 경찰관서를 방문한 피해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다시 발걸음을 돌리는 일이 없도록 적극적으로 사건을 접수하는 것은 물론이고,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교육을 강화하고 가이드라인도 제작해 배포한다. 더불어 최근 텔레그램 n번방 사건 등 청소년 사이버 성폭력 피해가 심각해짐에 따라, 청소년 대상 사이버 성폭력 예방에도 나선다. 개학 연기로 온라인 홍보를 먼저 실시하고 교육부와 협업으로 학생·학부모 대상 안내 및 교육을 시행할 계획이다. 여성가족부와 협업하여 학교 밖 청소년 지원센터, 가출 청소년들 쉼터에서도 관련 교육이 이루어져야 함은 물론이다.

지난밤, 아들에게 넌지시 물었다. “너도 혹시 그 방에 있었던 것 아니냐?”라고. “난 네가 그 방에 있었다고 해도 절대 봐주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아들은 되레 내게 당부했다. “내 주변 남자들도 엄청 분노하고 있어요. 그 XX들 빨리 다 잡아넣어요.”

텔레그램과 그 외 플랫폼으로 뻗어나가는 디지털 성범죄자 검거와 피해자 보호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피해자들에게는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는 따뜻한 지지와 위로가, 텔레그램 성착취물 운영자 및 제작·유통사범, 관람자들에 대해서는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 경찰은 플랫폼 보안성을 믿고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여성들에 대한 지배 욕구를 익명 뒤에 숨어 폭력적으로 행사한 ‘공동정범’들을 끝까지 검거하여 성착취를 뿌리 뽑도록 노력할 것이다.

기자명 조주은 (경찰청 여성안전기획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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