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3월24일 시민들이 서울 명동 하나은행 앞을 지나고 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 누군가 ‘곧 엄청난 경제 충격이 모든 선진국을 강타한다. 여러 달에 걸쳐 GDP(국내소득)의 50%에 달하는 비용을 발생시킬지도 몰라’라고 말했다고 치자. 믿었겠나? ‘그런 일’은 전쟁 때나 있는 거잖아. 미쳤다고 했겠지.”

미국의 유력 연구기관 경제정책연구센터(CEPR)의 비어트리스 웨더 디 마우로 소장이 〈파이낸셜타임스〉(3월21일)와의 인터뷰에서 한 이야기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이루어져버렸다. 전시(戰時)다.

코로나19가 국경을 뛰어넘어 확산되면서 세계경제가 통째로 녹아내리고 있다. 상대적으로 낙관적인 예측 기관들도 글로벌 GDP가 올해 상반기에는 축소(마이너스 성장)될 것으로 내다본다. 오는 2분기(4~6월)의 유로존(유럽연합에서 유로화를 사용하는 19개 국가) GDP가 지난해 대비 12% 떨어지고(모건스탠리), 미국 역시 25%에 이르는 마이너스 성장을 겪는다(골드만삭스)는 식이다.

다만 이번 사태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와 달리 경제(금융) 내부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바이러스 차단에 필요한 ‘국제적·사회적 거리두기’가 원인이다. 바이러스는 언젠가는 잡힌다. 앞으로 6개월 뒤쯤이면 팬데믹(세계적 차원의 감염병 대유행) 자체는 잠잠해질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그동안의 ‘격렬하지만 짧은’ 경기침체는 필연적이다.

국내외적으로 인력과 물자의 이동이 끊어지면서 돈의 흐름이 단절되었다. 민간은 경제 동력을 상실했다. 정부가 움직일 수밖에 없다. 또한 그 목표는 ‘경기부양’이 아니라 ‘전력(戰力)의 보존’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정책적으로 인력의 이동을 통제해야 하는 팬데믹 상황에서, 단지 돈을 받았다고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서지는 않을 터이다. 바람직하지도 않다.

바이러스를 퇴치한 이후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잘 운영되던 기업이 수개월 동안의 사회적 거리두기로 수익이 급락하면서 파산할 수 있다. 그 기업의 자본과 기술, 노하우는 사회적으로 퇴출되어 다시 못 쓰게 된다. 소득을 잃은 노동자들은 신용불량자로 전락해 살림집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수많은 기업과 개인들이 부도를 내면, 그 손실은 고스란히 금융기관으로 감염되어 ‘코로나19발 세계 금융위기’로 터져 나올 수 있다. 각국 정부의 당면 임무는 경기부양이 아니라 개인과 기업을 파산으로부터 ‘구제’하는 것이다. 그래야 바이러스가 물러간 뒤 시민들이 무사히 직장과 상점으로 돌아가서 경제 시스템을 신속하게 정상화할 수 있다.

미래통합당 황교안 대표 등 야권에서는 ‘퍼주기’가 아니라 “법인세율 인하, 최저임금 인하, 주 52시간제 완화” 등으로 기업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이 ‘전시’란 걸 간과한 한가한 소리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전시 대통령(Wartime President)’을 자처한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비상한(extraordinary) 시기엔 비상한 액션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리시 수낙 영국 재무장관은 “국가와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전례 없는(unprecedented) 상황에 전례 없는 수단”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whatever it takes) 동원”하겠다고 선언한다.

발언의 강도에 걸맞은 ‘전례 없고 비상한’ 구제 대책이 서방국가에서는 실제로 동원되고 있다. 오늘 발표한 놀라운 정책이 며칠 뒤엔 소심한 계획으로 전락한다. 수낙 영국 재무장관은 지난 3월11일 300억 파운드(약 44조원) 규모의 코로나19 대책을 발표했다. 일부 서방 언론은 이를 ‘splurge(돈을 물 쓰듯 하다)’라고 표현했다. 엿새 뒤인 3월17일에는 구제 대책의 규모가 10배 이상인 3300억 파운드로 늘어나버린다. 트럼프 대통령은 3월16일까지 감세 위주의 경기부양책을 고집하고 있었다. 다음 날인 3월17일, 그는 갑작스럽게 1조 달러 규모의 정부지출 계획을 내놓았다. 시민 개개인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등 정부지출로 민간경제 부문에 돈을 꽂아 넣겠다는 것이다. 다시 일주일 뒤인 3월24일 현재 미국 의회는 2조 달러 내외의 구제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서방국가 지도자들의 위기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른 나라의 구제 대책은 단지 덩치만 커진 것이 아니다. 1980년대 이후 글로벌 차원에서 자리 잡은 국가경제 운영의 기본 프레임이 전복되는 조짐까지 나타난다. 그동안 서방 정부들은 국가경제 운영에서 대체로 통화정책을 선호해왔다. 중앙은행이 불경기에는 금리를 내리고 경기과열이 우려되면 금리를 올린다. 통화정책은 민주공화정의 원리와 통하는 측면이 있다. 금리 앞에서 시민들은 형식적이나마 평등하다. 금리가 오르면 누구나 돈을 빌리기 힘들고, 내리면 모든 사람들이 신용에 접근하기가 편해진다. 통화정책(금리 인상과 인하)이 모든 시민에게 동시에 같은 영향을 미친다면, 정치인들이 특정 계층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한 ‘선심성 정책’으로 사용할 수 없다. 또한 통화정책으로는 국가가 부채를 질 필요가 없다. 금리만 조절하면 된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통화정책은 국가가 경제에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하게 정당한’ 수단으로 간주되어왔다. 재정정책은 그리 정당하지 않은, 심지어 부당한 국가의 경제개입 수단이라는 이야기다.

ⓒAP Photo미국 연방준비제도 파월 의장이 3월3일 기준금리 인하 관련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재정정책에서 정부는 특정 계층, 산업, 복지, 공공 인프라 등을 콕 집어내 직접 자금을 투입한다. 통화정책이 둔탁하다면 재정정책은 뾰족하다. 신속하게 빈곤을 개선하고 특정 산업을 육성하면서 경기에 직접적 영향을 준다. 어떤 계층(주로 빈곤층)에겐 이익이지만 다른 계층은 손해를 볼 수 있다. 선심성 정책으로 악용될 수 있다. 국가의 노골적 경제개입이다. 정부지출이 ‘거두어들인 세금(세입)’의 규모를 뛰어넘기도 한다. 이럴 땐 정부가 국채를 발행해서 빚을 내야 한다(국가부채).

특정 부문에 유동성 공급하는 통화정책

서방 정부들은 재정정책을 ‘필요악’ 정도로 간주해왔다. 민주공화국가로서 빈곤층을 지원하고 공공 인프라도 건설해야 하기 때문에 재정정책을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가급적 자제해야 한다는 의미다. 결국 ‘재정긴축’이 일종의 경제 운영 준칙으로 굳어졌다. 세입 내에서 지출한다는 원칙이다. 재정긴축은 코로나19 팬데믹의 첫 희생양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각국 정부는 최근 유례없을 정도로 거대한 정부지출 계획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다.

물론 서방국가들은 코로나19에 대한 대응에서도 통화정책을 핵심적 정책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방법이 많이 바뀌었다. 특정 부문을 콕 집어내 유동성을 공급한다. 재정정책 같은 통화정책이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가 선언한 조치가 그러하다.

3월15일, 연준은 기준금리를 1.00~ 1.25%에서 0.00~0.25%로 한꺼번에 1%포인트나 내렸다. 평상시에는 1회에 0.25%포인트만 내려왔다. 이와 함께 7000억 달러 규모의 미국 재무부 채권(국채)과 MBS (Mortgage Backed Securities:주택저당증권) 등의 증권을 매입하기로 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시행하다 중단된 양적완화(중앙은행의 증권 매입)가 화려하게 부활했다.

2009년부터 시행된 양적완화에서 연준은 ‘민간 금융기관이 보유한’ 국채를 대량 매입했다. 중앙은행은 더 많은 국채를, 민간은행은 더 많은 유동성(중앙은행에 국채를 판 대가)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는 금리 인하다. 국채란, 국가(정부)가 민간으로부터 돈을 빌렸다는 증서다. ‘미래의 정해진 날에 정해진 돈(만기 상환금)을 준다’고 기입되어 있다. 만기 상환금은 변하지 않는다. 국채는 만기 이전에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다.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국채 역시 수요가 늘어나면 가격이 오른다. 수요가 줄면 가격이 떨어진다. 이에 따라 국채의 수익률이 변동한다. 정부가 ‘10년 뒤에 1만2000원을 주는 조건’을 걸고 1만원의 가격으로 ‘국채를 팔았다(정부가 1만원을 빌렸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투자자는 1만원을 빌려주고 10년 뒤에 2000원의 수익을 얻게 된다. 수익률은 20% (2000원/1만원×100)다. 해당 국가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국채의 인기가 떨어져 가격이 9000원으로 내렸다. 이때 국채를 사면, 9000원의 밑천으로 만기엔 3000원(1만2000원-9000원)을 벌 수 있다. 수익률은 33.3%(3000원/9000원×100)다. 이후 경기가 호전되면서 국채 가격이 1만1000원으로 올랐다. 1만1000원을 투자하면 1000원의 수익을 얻게 되니 수익률은 9%(1000원/1만1000원×100)다. 국채 가격과 수익률은 반비례한다.

중앙은행이 국채를 대량 매입하면 그 가격 또한 오른다. 수익률은 떨어진다. 국채 수익률은 그 나라에서 금융상품 투자(예금도 포함)로 얻을 수 있는 수많은 수익률(그중 하나가 예금이자)들의 바닥이다. 국가는 원리금을 돌려주지 못할 위험이 극도로 낮은, 가장 믿음직한 채무자이기 때문이다. 이자를 많이 낼 이유가 없다. ‘바닥(국채의 수익률)’이 낮아지면 다른 수익률들 역시 떨어지게 된다. 양적완화는 금리를 낮게 유지하기 위한 통화정책이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국채 매입은 현대 국가의 관습적 경제운용 준칙을 아슬아슬하게 비켜가는 측면이 있다. 중앙은행과 행정부 사이의 벽을 낮추기 때문이다. 행정부는 정부지출을 늘리고 싶어 한다. 그래야 인기를 얻을 수 있다. 행정부가 세입의 한계를 뛰어넘어 마음껏 돈을 쓸 수 있는 도구가 존재한다. 통화 발행 기관인 중앙은행이다. 세입을 늘리고 지출을 줄이기 위해 끙끙대기보다 차라리 중앙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리면 어떨까? 국채를 발행해서 민간이 아니라 중앙은행에 팔면 된다. 행정부가 중앙은행으로부터 직접 돈을 빌리는 행위다. ‘금 나와라, 뚝딱!’의 도깨비방망이와 다름없다. 평상시에 이런 일이 벌어지면, 중앙은행이 돈을 지나치게 많이 찍어내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야기할 수 있다. 돈의 권위가 떨어져 경제질서 자체가 무너질 위험도 있다. 현대 국가에서 법률적으로 행정부와 중앙은행 사이에 높은 벽을 쌓는 이유(중앙은행의 독립성)다. 물론 2008년 이후 양적완화에서 중앙은행이 행정부로부터 국채를 직접 매입하지는 않았다. ‘민간이 보유한’ 국채를 매입했다. 그러나 국채를 산다는 자체로 행정부와 중앙은행 사이의 벽은 상당히 낮아진다.

양적완화의 또 다른 갈래인 MBS 매입 역시 특정 부문에 의도적으로 통화를 유입시켰다는 측면에서 ‘순수한 통화정책’은 아니다. MBS는 주택담보대출의 파생금융상품이다. 은행이 A라는 사람에게 10년 만기로 1억원을 빌려준다고 치자. 금리는 10%(1000만원)로 가정한다. 해당 은행은 10년 뒤에 1억1000만원을 받을 권리(대출채권)를 갖게 되었다. 이 권리를 지금 당장 1억100만원에 팔 수 있다면 어떨까? 2000년대 들어 미국의 ‘주택담보대출 취급 은행’들은 대출채권을 무더기로 ‘대형 투자은행’들에 팔았다. 수년을 기다릴 필요 없이 즉각 금융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투자은행들은 그 대출채권들을 기반(기초자산)으로 또 다른 파생금융상품(MBS)을 만들어 사고팔면서 짭짤한 재미를 보았다. 그런데 MBS의 가치는 사상누각이다. 그 밑에 있는 A씨 같은 사람들이 착실하게 원리금을 갚아나가지 않는다면 무너진다.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미국인들 중 상당수가 원리금을 갚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점점 더 명확해지면서, MBS는 폭락하고 만다. MBS를 자산으로 갖고 있었던 글로벌 투자은행들이 부도 위기에 처하거나 망하면서 지구적 차원에서 신용의 흐름을 끊어버린 사태가 바로 2008년의 세계 금융위기다.

이후 연준은 투자은행 등으로부터 MBS를 대량 매입했다. 망해가는 금융기관에 돈을 투입해 살려낸 것이다. 특정 부문(MBS 보유 금융기관)을 겨냥했다는 측면에서 교과서적인 통화정책과는 많이 다르다. 일반 시민들에게도 이로운 정책이었다. MBS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주택담보대출 취급 은행들 역시 시민들에게 대출하기를 꺼리게 된다. 빌려준 즉시 그 대출채권을 팔아서 수익을 낼 기회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연준의 MBS 매입은 금융기관을 구제하는 동시에 시민들에 대한 주택담보대출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이기도 했다.

ⓒEPA2008년 3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당시 매물로 나온 뉴욕의 한 주택.

이처럼 양적완화는 온전한 의미의 통화정책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오히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부터 미국과 세계경제를 구제할 수 있었다.

2020년 3월 미국 연준은 이전의 양적완화 기조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콕 집어’ 유동성을 제공하는 범위를 대폭 늘렸다. 원칙적으로 중앙은행은 ‘일반은행(예금과 대출을 하는 금융기관)’에만 유동성을 공급해야 한다. 일반은행에 빌려주거나, 은행 보유의 증권을 받고 그에 상당하는 유동성을 내준다. 중앙은행은 일반은행을 통해 통화량을 조정함으로써 실물경제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기관인 셈이다. 중앙은행은 행정부는 물론 은행 이외의 다른 금융기관이나 기업엔 직접 돈을 빌려줄(그런 업체가 발행하는 회사채를 살) 수 없다. 2008년 이후의 MBS 매입도 반칙이다.

3월17일 연준은 기업어음(CP)을 매입하겠다고 밝혔다. 기업어음은 기업들이 단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행하는 증서다. 재할인 창구(일반 은행이 단기자금을 연준으로부터 빌리는 제도)를 은행 이외의 금융기관인 증권사나 투자회사(일정한 규모와 요건을 충족시키는)로 확대했다. 그 대출금리도 크게 내렸다. 한마디로 중앙은행이 기업과 은행 이외의 금융기관에 곧바로 돈을 빌려주게 된 것이다.

3월23일에는 더 파격적인 방안들을 무더기로 내놓았다. 연준의 증권 매입 규모를 3월15일의 7000억 달러에서 “시장이 제대로 기능하는 데 필요한 금액”으로 바꿨다. ‘무제한’이라는 의미다. 민간 금융기관의 MBS도 매입하기로 했다. 이후 하루 400억 달러 이상의 증권을 사들이고 있다. 2008년 이후의 양적완화에서는 한 달 동안 매입하던 규모다.

이뿐만 아니라 연준은 민간기업의 회사채(회사가 발행하는 채권)와 ETF (Exchange Trade Fund:상장지수펀드, 코스피 같은 증시 지수의 등·하락을 반영하도록 다양한 주식들로 편성한 펀드. 주식처럼 거래소에 상장되어 실시간 매매도 가능)도 매입하겠다고 선언했다. 법률적으로 연준은 회사채나 ETF를 매입할 수 없다. 편법으로 법망을 비켜 가기로 했다. 연준이 만든 ‘페이퍼컴퍼니’가 회사채를 사들이는 방식이다. 물론 그 돈은 연준이 제공한다. 연준은 학자금, 자동차, 신용카드 등 소비자금융의 대출채권을 기반으로 한 파생금융상품(ABS)도 매입하기로 했다. MBS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ABS가 거래되어야 그 밑에 있는 금융기관들이 소비자들에게 학자금과 자동차 매입 자금 등을 빌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연준은 미국의 중소기업들이 낮은 금리로 대출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도 조만간 발표할 계획이다.

ⓒ시사IN 이명익3월24일 여의도 KB국민은행 스마트딜링룸에서 직원이 전광판 앞을 지나가고 있다.

연준, 법망 피해 회사채 등 매입에 나서

연준이 3월23일 내놓은 방안의 상당 부분은, 벤 버냉키와 재닛 옐런 전 의장이 공동으로 〈파이낸셜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의 주요 내용을 수용한 것이다. 두 전직 의장은 연준에 ‘회사채 매입’ ‘중소기업 저리 대출을 위한 프로그램’ 등을 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중앙은행이 바이러스가 유발하는 고통과 손실 등의 직접적 비용을 제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단 바이러스의 직접적 효과가 통제된 뒤엔 경제가 신속하게 재도약할 것이라는 사실을 (사회에) 확신시킴으로써 감염병의 경제적 효과를 줄이게 도울 수는 있다.”

유럽연합(EU)의 통화정책을 총괄하는 유럽중앙은행(ECB)도 3월18일, 올해 내로 7500억 유로 규모의 증권을 매입하는 양적완화 계획을 발표했다. 일주일 전인 3월12일까지만 해도 ECB의 양적완화 프로그램은 1200억 유로 규모였다. 기준금리는 이미 0%이므로 더 내리기도 힘들다. 회원국 은행들에 저리로 장기자금을 대출하는 계획도 붙였지만, 이날의 경기부양책은 시장의 기대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규모였다.

ⓒReuter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 총재가 3월12일 통화정책회의를 마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더욱이 EU는 각 회원국의 정부지출을 엄격하게 규제한다. 특히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내 부자 나라들이 그리스·이탈리아·스페인 등 남유럽 회원국의 정부지출에 신경을 곤두세워왔다. ECB는 회원국들의 국채를 매입해서 그 나라의 정부지출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사줄 수 있는지는 제한된다. 어떤 회원국이 국채를 발행했을 때 그 3분의 1만 ECB가 매입할 수 있다. 회원국들은 ECB 설립에 출자한 비율(당연히 독일이 제일 높고, 남유럽 국가들은 낮다)에 따라 국채 매입에서도 차별받는다. 남유럽 국가들의 국채는 시장에서 인기가 없다(돈을 빌리기 힘들다). ECB마저도 그 국채의 일부만 사주겠다는 입장인 것이다.

3월12일 무렵 가장 절실하게 국채를 팔고 싶었던 나라는 이탈리아였다.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엄청난 자금이 필요해졌다. 투자자들이 위태로운 나라의 국채를 살 이유가 없다. 이탈리아 국채의 가격이 떨어지고 수익률은 크게 올랐다. 독일 국채의 수익률은 여전히 낮은 편이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회원국 국채시장의 수익률(스프레드) 차이를 줄일 계획은 없나’라는 질문을 받았다. 사실상 ‘이탈리아 국채를 더 매입해서 그 수익률을 내릴 생각은 없는가’라는 내용이었다. 라가르드 총재는 답변했다. “그것은 ECB의 역할이 아니다.”

시장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ECB가 이탈리아 상황을 방치하겠다는 것 아닌가. 이탈리아 등 남유럽 경제가 망가지는데 서유럽의 부국들만 멀쩡할 수는 없다. EU 회원국들의 국채 가격과 주가가 폭락했다. 라가르드 ECB 총재는 자신의 발언을 사과하고 새로운 구제 대책을 꾸릴 수밖에 없었다. 마침 회원국들 내에서 영업점 폐쇄가 본격화되고 있었다.

그 규모를 대폭 늘린 3월18일의 ECB 양적완화 계획에 따르면, 유로화를 사용하는 19개 국가의 국채는 물론 회사채와 기업어음도 사들일 계획이다. 지난 2010년대 초반의 남유럽 재정위기 이후 매입하지 않던 그리스 국채도 산다. 이밖에 국채 매입에 대한 규제를 풀거나 각 회원국이 아니라 EU 전체의 명의로 ‘공동채권’을 발행하는 방안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탈리아에 빌려주는 것을 꺼리는 투자자들도 EU엔 기꺼이 지갑을 열 것이다. 획기적인 방안이 합의된다면, 이탈리아처럼 특별히 어려운 나라들이 ‘비상한’ 지원을 받을 수 있다. EU가 ‘연합’이라는 명칭에 어울리는 방향으로 개혁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코로나19 팬데믹은 해외 주요 국가들이 통화정책을 재정정책처럼 사용하도록 만들고 말았다. ‘전시’지만, ‘이단적 정책’이 우후죽순 채택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의 국가경제 운영 프레임에도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해외 주요 국가들은 재정정책 역시 전례 없이 큰 규모로 계획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3월19일)에 따르면, 지난해 35개 부국의 재정적자 규모는 모두 1조5000억 달러(GDP의 2.9%)에 달한다. 그런데 올해 들어 지금까지 발표된 각 정부의 재정지출 계획을 반영하면 35개국의 GDP 대비 적자 규모가 평균적으로 5%포인트 상승한다. 각 정부들의 차입액이 올해 4조 달러까지 치솟는다. 더욱이 주요 국가의 지출 계획을 보면 대체로 상반기에 집중되어 있다. 바이러스가 더 오래 지속된다면 이 정도의 자금을 빌릴 수는 있을까?

이런 측면에서 최근의 비정통적 통화정책이 암시하는 것이 있다. 아직 정부가 국채를 중앙은행에 ‘직접적으로’ 팔아 자금을 마련하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유력 중앙은행들이 이미 정부지출이 필요한 회사채 시장 등 광범위한 민간 부문에 유동성을 꽂고 있다. 중앙은행이 국채를 ‘간접적으로’나마 매입하고 있는 것이다. 바이러스로 지금의 예측보다 훨씬 많은 정부지출이 필요한 상황이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재정적자를 통화 발행으로 메우는(monetizing deficits) 게 현실화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인류는 현재 코로나19라는 ‘외부 침략자’로 인해 국가경제 운용의 기존 ‘교리’는 물론 ‘화폐란 무엇인가’부터 새롭게 정의해야 하는 혁명적 시기를 경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