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켈 그림

3월2일 ‘한사성 前활동가 피해당사자 모임’ 페이스북 페이지가 만들어졌다. 잇따라 다섯 개의 고발문이 게재됐다. 노동환경에서부터 조직문화, 정서적 영역에 이르기까지 활동가들이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한사성)에서 근무하며 감내해야 했던 광범위한 문제에 대한 증언이었다. 그중 한 활동가가 쓴 글에 눈길이 멈췄다. ‘내가 문제를 제기하면 사이버 성폭력 피해 지원에 제동이 걸리진 않을까?’ ‘이 이야기가 대중들에게 노출되면 여성운동 전체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이 쏟아지진 않을까?’ 같은 걱정을 멈출 수 없었다는 부분이었다.

한사성 전 활동가들의 글에서 부당함과 모순, 폭력에 대한 기록만큼이나 많은 자기검열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같은 이유로 침묵했던 수많은 시간을 떠올렸다. 하루 12시간에 가까운 근무, 최저임금에 미치지 못하는 급여, 열악한 업무환경, 비민주적 의사결정 과정과 시스템의 부재, 가스라이팅과 번아웃 강요 등 한사성에서 벌어진 일은 운동사회 내부의 꽤 흔한 경우에 해당한다. ‘시민사회활동가 대나무숲’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근로기준법을 아예 무시하는 노동조합이나, 혁신과는 거리가 먼 사회혁신기업, 언어폭력을 일삼는 인권단체 등에 대한 익명의 성토로 빼곡하다.

만성질환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활동가들

지난해 71개 인권운동 단체의 활동가를 대상으로 진행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한 상근자 절반 이상이 하루 9시간 넘는 근무를 하고 있었고, 전체의 30%에 가까운 이들은 주 6일 이상 일을 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활동가 10명 중에 3명은 최저임금에 미달하는 급여를 받으며, 활동가 대부분이 만성질환이나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운동에 온전히 헌신하는 것’이 마치 기본값처럼 인식되는 활동가들의 세계에서 개인이 갈려나가는 것은 당연하다. 자원은 부족한데 대의가 중요한 곳일수록 위계와 폭력이 움트기 쉽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때때로 나는, 영상활동가의 영역에 발을 들였던 시기 연이어 펼쳐졌던 부조리를, 내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그저 견뎠는지’를 생각한다. 내 첫 월급은 60만원이었다. 노동을 주로 이야기하는 감독 밑에서 조연출로 일했는데, 출근 첫날 그는 원래 80만원으로 이야기했던 내 월급을 60만원으로 줄이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자?”라고 말한 것이 소통의 전부였다. 일하는 날이 따로 없었고, 쉬는 날도 따로 없었지만 내 월급은 60만원. 예고 없이 치고 들어오던 위력 앞에서 침묵했던 것은 운동에 뛰어든 여느 활동가들처럼 나 또한 고통받는 피해자를 돕고 싶은 마음,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던 그 강렬한 욕구를 복사뼈와 발뒤꿈치 사이 어딘가에 꾹꾹 눌러 걸음마다 밟아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의 앞에서 너의 고통은 사사롭다’고 말하는 목소리들 사이에 내 목소리가 들렸던 기억은 끝끝내 후회로 남아 있다.

피해 지원을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고, 피해 경험자의 일상 회복을 누구보다 바랐다고, 여성 운동의 현장에 오래오래 있고 싶었다고 눌러 쓴 한사성 전 활동가들의 글을 다시 읽는다. 사이버 성폭력 문제를 지원하는 단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 불법 촬영물과 ‘N번방 성착취’ 범죄에 대한 여성들의 분노가 한계에 달한 지금 이 시점에 한사성에 대한 공론화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운동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에 대한 절박한 책임감과 고통의 무게를 생각했다.

사랑하는 세계에서 폭력을 경험했음에도 그 세계를 끝내 포기하지 않고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길 선택한, 용감한 사람들의 ‘말하기’에 더 많은 이들이 연대하기를. 그리고 한사성 또한 변화의 용기를 갖고 다시 많은 이들의 빛이 되기를.

기자명 박수현 (다큐멘터리 감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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