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 Photo1917년 10월 ‘공산주의’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는 러시아 병사들.

2013년 스위스에서 국민투표가 열렸다. 최고경영자 임금을 최저임금의 12배까지만 받을 수 있도록 제한하는 내용의 ‘최대임금제’ 도입이 안건이었다. 결과는 도입 반대가 높았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그 대상이 최고경영자가 아니라 임금노동자들이었다는 점 정도가 다를 뿐, 최대임금제가 실제 도입된 시기가 있었다. 바로 흑사병이 창궐한 직후다.

14세기 중반, 원나라를 멸망시킨 이유 중 하나였던 흑사병은 유럽 인구 중 7500만~1억명을 죽인 전염병이었다.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평균적으로 인구의 3분의 1이 갑자기 죽음을 맞았다. 절반 이상이 죽어나간 지역도 흔했다. 노동 공급이 급격히 축소되면서 임금수준이 급상승했다.

자코뱅 몰락의 원인이 된 최대임금제

이들의 고용주라 할 왕실과 귀족층은 당연히 이 같은 임금 상승을 반기지 않았다.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은 1348년, 잉글랜드는 1349년, 프랑스 왕국은 1351년 차례로 최대임금법이 제정된다. 그런데 이 법이 잘 준수됐는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결과적으로 잘 안 됐기 때문이다. 워낙 일손이 달리니 노동자와 고용주 모두가 법을 지킬 수가 없었다. 물가가 지역별로 달랐고, 적정 임금수준이 도대체 어느 정도냐 하는 논란도 많았다. 스페인의 아라곤 왕국은 1369년 임금 인상이 왕국의 근간을 흔든다고 주장한다. 부자가 가난해지고 빈자가 부유해지니 사회계층이 흔들린다는 의미다. 물론 이 호소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이들은 거의 없었다.

임금 제한을 준수하는 이들도 있기는 했다. 노동자들은 다른 방식으로 ‘틈새’를 활용했다. 업무시간 자체가 줄어들자 부업을 하거나, 식사나 의류 등 다른 ‘수당’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두 차례의 혁명은 최대임금제를 탄생시킨다. 바로 프랑스 대혁명과 러시아 혁명이었다. 급진주의자들이었던 집권 자코뱅 세력은 프랑스 혁명 당시의 어려웠던 경제 사정 때문에 1793년 ‘일반제한법 (Loi du Maximum général)’을 제정한다. 이 법에는 곡식 소유량, 빵과 식용유 물가, 임금수준 등에 대한 제한이 포함되어 있었다.

자코뱅을 지원했던 평민 세력인 상퀼로트는 실제 법이 실시되자 최대임금제를 반대하여 자코뱅과 충돌한다. 결국은 테르미도르 반동(1794~1795)에 따라 자코뱅과 상퀼로트 모두 사라지고, 최대임금제도 철폐된다. 최대임금제는 자코뱅 몰락의 원인 중 하나였다.

러시아 혁명 때 레닌은 파르트막시뭄(당원 최고 급료)이라는 최대임금제를 1921년 제정했다. 한 기관의 최고위급 관리자의 급여가 그 기관 평균임금의 150%를 넘지 못하게 했는데, 이 실험에는 반대가 많았다. 엔지니어들과 같은 공산당원이 아닌 전문가들이 소련을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도 시행 처음부터 엔지니어와 같은 전문직종의 경우 파르트막시뭄의 제한에서 풀어줬고, 스탈린은 1932년 이마저도 아예 없애버려 모두가 지위에 따라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게 허용한다. 소련 내 귀족층을 상징하는 노멘클라투라의 탄생이 이때부터라는 주장이 있다.

기자명 위민복 (외교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