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pedia코르넬리스 하우트만.

네덜란드의 아시아 진출은 16세기 말이 되면서 본격화한다. 바스쿠 다가마가 포르투갈-인도 직항로를 열고,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가 1511년 향신료 무역의 요충지 말라카(현재의 말레이시아 믈라카)를 점령한 이래, ‘포르투갈령 인디아’는 유럽으로 공급되는 향신료 물량을 독점해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렸다. 13세기부터 이 지역에 전파되기 시작한 이슬람교가 15세기 들어 지배층의 종교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이를 구심점 삼은 토착 세력들이 연합전선을 형성해 포르투갈 함대를 습격하는 일이 잦아졌다. 네덜란드의 진출은 이 타이밍에 맞춰 이뤄졌다. 이재에 밝고 합리적인 태도를 갖춘 그들은 현지 군주들에게 포르투갈보다 더 나은 교역조건을 제시했고, 결국엔 포르투갈을 밀어내기에 이른다. 그 과정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항해 왕자’ 엔히크의 원대한 꿈 아래 모여든 항해자들이 목숨을 걸고 작성한 아시아의 지도 및 항해도는 포르투갈의 국가기밀이었다. 스페인의 한 타락한 귀족이 25개의 포르투갈 항해도를 반출해, 네덜란드의 한 출판업자에게 큰돈을 받고 넘겨줬다. 그는 입수한 지도 일체를 자비를 들여 복각했고,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펴냈다.

전 국민을 투자자로 만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이후 1594년 암스테르담에는 아시아 탐사와 무역을 위한 회사가 문을 연다. 사명은 ‘먼 곳의 나라에 대한 회사’라는 뜻의 ‘콤파녜 판 페레’. 상인들이 설립한 회사가 식민 개척의 첨병이 되는 첫 사례다. 이 회사에 의해 아시아로 향하는 네덜란드 최초의 원정 상선대를 지휘했던 인물은 코르넬리스 하우트만(1565~1599)이다. 선원이자 상인이었던 그는, 콤파녜 판 페레의 의뢰로 항로 기밀을 입수하기 위해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 2년간 머물기도 했다. 산업스파이의 원조였던 셈이다. 1595년 4월, 그는 배 4척에 선원 249명을 싣고 출발했는데, 처음부터 엉망진창이었다. 몇 주 지나지 않아 괴혈병이 창궐했고, 아프리카 해역을 벗어나기도 전에 선원 70명을 마다가스카르에 묻어야 했다. 1596년, 마침내 선단은 자바 북서부의 반텐 술탄국에 도착했다. 하우트만은 뻣뻣하고 건방진 태도로 일관하다가 술탄에게 모욕감을 주었고,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쫓겨나고 말았다. 그의 선단은 우여곡절 끝에 발리의 왕을 만나 후추 몇 단지를 얻어 2년여 만에 본국으로 귀환했다. 돌아왔을 때 살아남은 선원은 87명. 개별 항해로는 재앙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지만, 이 항로가 가지는 잠재력을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입증하기에는 충분했다.

암스테르담에는 콤파녜 판 페레와 유사한 회사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저마다 상선대를 조직해 인도네시아로 보냈다. 처음에는 그들 모두 큰 이익을 얻었지만, 과다 경쟁에 따른 폐해가 생겨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스페인과의 결전을 생각해서라도 모두가 하나로 힘을 합쳐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1602년, 암스테르담에서는 ‘네덜란드 연합 동인도회사’가 출범한다. 이전에는 상인들이 돈을 모아 항해에 투자하고, 이 배들이 돌아오면 최초 투자금의 비율대로 이익을 나눠 가졌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독특한 시스템을 도입해 아시아 항로 운영의 안정과 효율화를 꾀했다. 회사의 자본을 구성하는 종이 증서를 돈을 받고 판매한 것이다. 소규모 자본을 지닌 중산층도 아시아 무역에 투자할 수 있었다. 최대한 많은 계층으로부터 자본을 모아 큰돈을 굴리면서도, 경영은 이 방면의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이들이 담당했다. 이러한 형태의 회사를 오늘날 우리는 주식회사라 부른다. 네덜란드가 향신료 무역의 패권을 차지하며 한때 유럽의 최강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새로운 시스템 덕이다. 국민 전체를 투자자로 만들고 이들이 모두 ‘이익의 실현’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한 것이다.

기자명 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