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돌이켜보면 의학 교육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정상’을 배운다. 포도당이 세포 내로 들어가서 에너지를 만드는 회로, 어떠한 기계장치와도 비교할 수 없는 섬세한 뼈와 근육의 구조, 하나의 세포로부터 모든 장기가 분화해 나가는 과정, 그것이 얼마나 신비롭고 경이로운지를 새긴 다음 ‘이상(異常)’을 배운다. 유전자의 결함으로 하나의 효소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뿐인데 면역체계가 발달하지 못해 무균실에서 살아야 하는 선천성 이상, 발생 과정에서 분화를 멈춰 자궁이 두 개인 기형, 오래 써서 콜레스테롤이 혈관 벽에 침착되고 무릎 연골이 닳는 노화…. 자연스럽게 정상과 그렇지 않은 상태 간에는 위계가 생기고, 어떻게든 정상성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 의학의 숙명처럼 느껴진다.

“의학은 사회과학이며 정치는 대규모 의료행위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루돌프 피르호는 의과학이 단지 인간의 질병에 대한 연구뿐 아니라 사회를 이해하는 은유(메타포)라고 보았다. 절대군주나 성직자, 법관이 하던 정상과 비정상, 건강과 병리의 판가름을 의과학이 넘겨받게 되면서 의과학은 또 하나의 거대한 권력이 되었고, 기존 질서와 체계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이들은 선택적인 설명만을 받아들여왔다. 정신질환에 대한 감형,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골상학, 여성의 열등성을 증명하기 위해 근거로 든 호르몬과 뇌 연구 등을 떠올릴 수 있다. 고정관념에 따라 가설이 만들어지고, 그 가설에 부합하는 결과만 의미 있게 받아들여져 이론을 다시 공고화한다. 그런 의미에서 의과학은 절대적이거나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하지만 신화와 과학을 분리하고 어떤 것이 진실에 가까운 것인지를 찾아나가는 과정 역시 의과학의 손에 달려 있다. 알려진 것처럼 정자만 운동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팔관이 만들어낸 물결이 난자를 운반하고 난자에서 화학물질이 나와 정자를 유인한다는 발견, 남성과 여성은 몸무게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약이 작용하는 기전과 효과가 다르다는 증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물론 아직도 이런 연구에는 관심을 덜 쏟고, 교과서가 바뀌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정상’은 무엇일까. ‘생물학적 여자와 남자를 어떻게 나눌 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받고 있는 요즘,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보통 생물학적 성을 ‘섹스(여자female, 남자male)’, 사회적 성을 ‘젠더(여성women, 남성men)’라고 한다. 이런 이분법적 표현은 생물학적 성은 절대적이고 불변하며, 사회적 젠더는 화법·옷차림·화장·태도·성적 지향 등으로 구성된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사회적 젠더만큼이나 생물학적 성 자체도 절대적이지 않다.

ⓒEPA타이 방콕에서 한 트랜스젠더(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징병 신체검사를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개인

인간은 46개(23쌍)의 염색체를 가지고 태어난다. 이 중 X와 Y 염색체가 성을 결정한다. 여자 대부분은 46XX를, 남자 대부분은 46XY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약 400~1000명 중 한 명꼴로 단일 성염색체(45X0 또는 45Y0)를 가지고 태어나기도, 세 개 이상의 성염색체(47XXX, 47XYY 또는 47XXY)를 가지고 태어나기도 한다. 한 사람의 몸에 어떤 세포는 XO이고 어떤 세포는 XY인 모자이시즘을 가진 이도 있다. 남자는 일평생 정자 1조 개 정도를 만들어내고, 여자는 난세포 1000만 개 정도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 감수분열 과정에는 X와 Y만 완제품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XY도 XX도 O도 생길 수 있다. XO 여자, XXX 여자, XXY 남자, XXXXY 남자들을 보고 있자니, 과학자들은 Y 염색체가 있으면 남자, Y 염색체가 없으면 여자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런데 XX인데도 남자, XY인데도 여자인 경우가 발견된 것이다.

모든 신생아가 태어났을 때 염색체 검사와 유전자 검사를 다 해보지는 않는다. 산부인과 의사가 보고 페니스가 있으면 남자, 음순이 있으면 여자라고 ‘판정’한다. 태어날 때부터 모호한 모양의 외성기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선천성부신증식증이라는 질환은 XX 여자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지만 부신호르몬 합성에 관여하는 효소들이 결핍되어 테스토스테론의 혈중 농도가 과도하게 높아지면서 외성기가 남자처럼 보이기도, 남자와 여자의 중간처럼 보이기도, 클리토리스만 비대하게 보이기도 한다. 출생 남아 300~500명 중 한 명꼴로 진단되는 요도하열이라는 질환은 태내에서 에스트로겐에 과다 노출된 경우 요도가 여성형화되어 페니스 중간이나 뒤에 생기게 된다. 출생 시에는 여자·남자의 외성기 모양으로 보여 성별 지정을 받았지만, 사춘기에 2차 성징이 시작되면서 성기 모양이 바뀌는 경우도 있다. XX인데 음경과 질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성분화 이상, 성발달 장애, 모호생식기 등 용어가 혼재되어 있지만, 당사자들은 주로 간성(intersex)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간성은 많게는 전체 인구의 1.7%까지 추정되는데, 현대사회에서 내분비교란물질들에 의해 점점 그 빈도가 증가하고 있다.

ⓒ연합뉴스지난해 6월1일 ‘서울퀴어문화축제’ 참가자들이 퍼레이드를 하는 모습.

간성인들의 기여로 유전학이 발전해온 것처럼, 많은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이 연구자로서, 피험자로서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성차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시상하부의 시각교차앞구역에 있는 성이형핵(sexually dimorphic nucleus of the preoptic area:sdnPOA)이라는 부위는 시스젠더(생물학적 성별과 심리적인 성별이 일치) 남성에서 시스젠더 여성보다 약간 큰데, 동성애자 남성은 이성애자 남성과 크기가 비슷했고, 트랜스여성(MTF)은 시스젠더 여성과 비슷했다. 어떤 연구는 트랜스 여성·남성이 시스젠더 여성·남성과 뇌에서 비슷한 부위가 있고, 다른 부위가 있다고 한다. ‘남성의 뇌’ ‘여성의 뇌’라는 건 없다는 말이다. ‘남성의 뇌와 여성의 뇌가 다르다’ 따위의 유사과학 기사에 속아 넘어가지 말자.

여기서 신경 가소성(neural plasticity)이라는 개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학자들은 뇌 발생이 태아 초기에 완료되고, 뇌세포는 새로이 생성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현대에는 학습, 경험, 자극 등에 의해 신경세포들 간 네트워크가 강화·변화·조정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트랜스젠더와 시스젠더의 차이가 발견 되었다면, 이는 선천적인 차이였는지, 차별의 경험으로 인한 위축 때문인지, 스트레스로 인한 호르몬의 변화 때문인지, 우리는 구분해낼 수 없다. 의학과 생물학에 답을 구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답은 자명하다. 의학과 생물학은 ‘이분법적 구별 짓기’에 답을 줄 수 없다. 행동유전학, 사회생물학, 후성유전학, 뇌과학 등 이름만 달리한 채 차이와 ‘비정상’을 설명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어 왔지만, 연구를 하면 할수록 단일 유전자나 염색체가 설명할 수 없다는 결론만 명확해졌다.

젠더도 마찬가지다. 생물학적으로도 생길 수 있는 수많은 변수와 이들의 상호작용에, 양육 과정의 문화와 환경의 영향까지, 모든 인간 현상은 사회적인 동시에 생물학적이다. 각각의 요인들은 어느 정도 성정체성에 영향을 미치지만, 유전자결정론과 환경결정론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할 필요는 없을뿐더러 그럴 수도 없다. 성도 젠더도 다양하며, 성정체성은 각각의 개인이 이를 인지하고 고민하고 모색하는 시작점일 수도 과정일 수도 목적지일 수도 있다.

많은 트랜스젠더 환자들을 만나봤다. 유방이나 페니스는 외부에 돌출되어 있어 특히 위화감을 많이 가지게 되는 기관이다. 당연히 더 많은 감정이 들 수밖에 없고, 이들을 제거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반면 호르몬치료로 발기와 사정이 없어지고 생식기가 위축되면서 그것만으로도 만족하여 수술에 대해 더 여유를 가지고 생각하는 MTF도 있다. 가르치는 초등학생들이 변화를 눈치챌까 봐 최소한의 용량으로만 호르몬을 받고 싶어 하는 FTM(트랜스남성) 교사, 생리에 특히 위화감이 심해 자궁적출을 고려했다가 미레나(자궁 내 피임장치) 시술로 무월경이 된 이후 만족했지만 결국 성별 정정을 위해 자궁적출을 한 FTM 환자, 2세를 원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난자를 보존해놓고 자궁적출을 받았지만, 성별 정정 이후 주민번호가 바뀌면서 동결 난자를 사용할 수 없게 된 FTM 환자. 100명의 환자는 100개의 이야기와 경험과 여정을 가지고 있다.

시스젠더 환자들도 복잡다단하긴 매한가지다. 뇌성마비 딸이 생리를 시작하게 되면 돌봄이 어려워질 것이기에 생리중단 시술을 고려하는 부모, 소음순이 너무 크다거나 예쁘지 않다고 축소술을 원하는 대학생, 유방암으로 인해 유방 전절제를 받고 완치되었지만 목욕탕과 수영장에서 받는 시선을 못 이겨 보형물을 삽입한 여성주의 활동가. 자신의 몸을 모색하기도 하고 순응하기도 하며, 욕망하기도 변형하기도 개입하기도 하는 과정은 사실 모든 인간이 겪고 있다. 그 과정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는 얼마만큼의 정보와 자원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그 정보가 누구에 의해 구성되었는지에 따라, 경제적 여건에 따라, 보고 듣고 자라온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성정체성뿐만 아니라 다른 요소의 정체성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모태신앙으로 태어나서 고민 끝에 무신론자가 되기도 하고, 후천적으로 장애가 생기면서 장애가 생긴 몸에 적응을 해나가기도 한다. 정체성은 그래서 유동적이다. 우리는 ‘그래서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개인을 믿을 수밖에 없다. 방송인 하리수씨의 커밍아웃 이후, 트랜스젠더를 호르몬 투여와 외부 성기 수술 등 의료적 조치를 원하고(완료했고) 전형적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참고 자료가 부족해서 그렇지, 성정체성은 과정이며 유동적이고 다양하다. 트랜지션(성전환) 역시 종착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위화감과 개인적 사정에 따라 다양한 단계 중에 있을 수 있다.

내가 의학의 역할을 깊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낙태죄 정국을 거치면서였다. 낙태죄 존폐를 논의하는 사람들이 ‘의학적으로 생명의 시작이 언제인지’ ‘의학적으로 몇 주부터 위험하니까 금지해야 하는지’와 같은 질문의 답을 원했다. 의과학은 여러 요인을 설명할 수 있을 뿐, 개인의 신념과 정체성에 관한 결정에 답을 줄 수 없다. 의학은 환자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심판자가 아니라 그들의 해결책과 방법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어떻게 하면 안전한 임신중지를 할지, 이후의 임신중지를 줄이기 위한 피임 교육을 어떻게 할지, 존엄한 삶의 회복을 위한 상담을 어떻게 제공할지 같은 질문 말이다.

트랜스젠더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담론을 보면 임신중지를 둘러싼 담론과 많이 닮았다. 본인의 신념과 정체성을 바탕으로 몸에 내리는 매우 개인적이고 치열한 결정이고, 질병은 아니지만 의료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 욕구를 드러낼 때 사회의 낙인에 부딪히는 것. 그리고 당사자를 믿지 않는다는 것.

퀴어의 존재 덕에 몸에 대한 이해 넓혀

입안자들, 의사, 법관들은 여성을 믿지 못해 자꾸 확실하게 결정한 게 맞는지 묻고 또 묻는다. 숙려기간을 두고 다시 오라고 하기도 하고, 의료인 몇 명이나 위원회나 상담사의 허락을 받아오라고 한다. 태아초음파를 무조건 보게 하면 후회와 죄책감으로 결정을 바꿀 거라고, 여성의 결정 능력과 판단력을 의심한다. 내 몸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인데 이기적이라고 비난받는다.

트랜스젠더에게도 마찬가지다. 호르몬 치료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정신과 의사의 진단서를 요구하고, 수술을 받으려면 1년 이상 살아보고 정말로 후회하지 않겠는지 정말로 확신하는지를 또 물어본다. 성별 정정을 위해서는 수술 의사 외에 추가로 또 다른 의사에게 확인을 받아야 하며, 성기 수술을 실제로 했는지 사진 등을 요구하며 모멸감을 준다.

젠더는 모호한 개념이지만, 퀴어의 존재는 실재한다. 그리고 차별 역시 실재한다. 시스젠더에 비해 트랜스젠더의 폭력 경험과 괴롭힘 경험, 자살 시도 경험은 월등히 높다. 고유한 의료적 필요가 있음에도 낙인과 편견으로 의료 이용에 장벽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의학의 역할은 판단이나 이데올로기의 모방이 아니라 고통의 최소화이다.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통합적인 존재로 살아가게 조력하는 것이다.

의과대학생일 때는 항생제로 자연을 정복하고 메스로 종양을 제거하고 바늘로 결손을 회복하는 의학의 권능에 도취되어 의학이 내 세계관의 전부이자 만능키라고 생각했다. 현실에 눈뜨게 해준 것은 성공의 경험보다는 실패의 경험이었고, 교과서적으로 딱 떨어지지 않는 환자들과의 만남이었다. 진단명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고 진단명으로 정의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생의 많은 순간은 완벽한 계획과 통제된 결과보다는 우연과 불확실성에 가깝다. 내 몸이 내 것이고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과 달리, 몸은 공부와 경험을 요한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생의학적 지식과, 그동안 내지 못했던 존재들의 목소리는, 기존의 몸과 정체성을 새로이 인식하게 해주고 상상과 개입의 가능성을 열고 있다. 성을 정의하고 성차를 밝히고 싶어 안달했던 의과학의 역사에서, 우리는 오히려 전형적이지 않은 존재들 덕분에 몸과 자연에 대한 이해를 넓혀나갈 수 있었다. 퀴어의 존재와 그들의 경험·서사가 의학을, 생물학을, 사회학을 풍부하게 한다. 이들의 복잡성과 이질성, 다양성이야말로 우리 인생과 자연의 정수이다.

기자명 윤정원 (산부인과 전문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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